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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 수 있을까?

내 힘으로

by 뜰에바다

사람이 자기 힘으로 인생을 살 수 있을까? 백여 년 간의 크고 작은 우수사려와 사건·사고를 어떻게 감당할까? 실패나 질병, 죽음 같은 문제들을 혼자서 해결할 수 있을까? 인생에는 예기치 못한 일, 혼자 감당하거나 헤쳐나가기엔 벅찬 방해꾼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 일들을 당당하게 헤쳐나가는 지혜와 힘, 내 안 어디에 있을까? 그 힘의 근원이 무엇일까?


십여 년 전, 절친이 암 진단을 받았을 때, 덜컥 마음이 무너졌다. 힘든 과정을 어떻게 견딜까, 잘 이겨낼 수 있을까, 두려웠다. 그토록 좋아하는 직무를 내려놓음이 답인 것 같아, 권하기도 했다. 소식을 듣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몇 갈래로 찢겼는데, 당사자는 그때 오죽 전신이 갈기갈기 찢겼을까! 멀리 있다는 핑계로 살뜰하게 챙겨주지 못했음에도 잘 치료하고 이겨, 지금은 건강하게 곁에 있어 주니 고마울 따름이다.


2년 전 12월, 톱스타 배우 이선균이 자신의 차 안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그는 두 달 동안 마약 투약 혐의를 받아 경찰 조사를 받고 있었다. 조사 결과 '음성'으로 나왔음에도, 여러 정황을 책임지고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어처구니없는 값싼 희생이요, 미래가 없는 결말이었다. 비단 이선균뿐인가? 얼마 전에는 여고생들이 학교에서 차별을 받았다고 느끼고, 셋이 함께 아파트 옥상에서 뛰어내렸다. 죽음이 무슨 이벤트 쇼라고 생각하지 않고서야, 어찌 그런 일을 벌일까!


문제 해결로서 과연 자살이 해답일까? '생명 경시 사상'이라는 또 다른 문제가 있거니와 그것은 결코 답이 아니다. 답이 따로 있는데, 답안을 잘못 선택한 우매한 소치다. 깨알 같은 글씨로 시험지 문제는 잘 풀면서 왜 가장 중요한 인생의 해답엔 깜깜한 것일까? 답안을 만들려고조차 시도하지 않는 것일까? 이 세상에서 몸만 없어지면 그만인가? 몸은 없어져도 영혼과 정신은 그대로인 것을, 왜 간과한단 말인가? 내가 눈을 감는다고 해서 실제 하늘이 사라지는가? 평생을 눈물로 보내야 하는 남은 가족들은 무슨 형벌이란 말인가!


어쩔 수 없이 다가오는 '집단적인 문제'는 무엇으로 대처할까? 14세기, 1347~1351년의 '페스트'는 역사 기록에 의하면, 유럽 인구 절반인 7,500만 명에서 2억 명 이상이 사망했다. 페스트는 이전(541~542년)에도 있었고, 이후 1855~1960년)에도 계속되었으나, 중세의 그것은 '흑사병(Black Death)'이라는 별칭을 만들면서, 인류 역사를 바꿨다. 그때 페스트를 직접 경험했던 조반니 보카치오(이탈리아, 1313~1375)가 바깥출입을 금하고, 세기의 이야기 소설《데카메론》을 남겼다. 20세기 까뮈도 《페스트》에, 페스트의 처음 발단과 사람들의 우왕좌왕과 집단으로 연대하여 헤쳐나가는 과정을 소상하게 기록했다.


지난 2019~2023년까지 약 4년간 '코로나19'가 우리 곁에 머물렀다. 물론 지금 2025년에도 간헐적으로 남아 있다. 가장 공포와 불안이 심했던 때는 2020년 2월~2022년 6월까지다. 그때는 첨단 과학도, 문명도 소용없었다. 무력감과 미래를 알 수 없는 공포가 일상이었다. 불청객으로 나타난 죽음의 바이러스 앞에 만물의 영장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별반 없었다. 감염 방지를 위한 사회적 거리 두기와 소독, 마스크 쓰기, 손 씻기가 전부였다.

정부 '감염병 포털'에 의하면, 2025. 4. 13 기준으로 전 세계 코로나19 누적 감염자는 777,720,205명이다. 누적 사망자 수는 7,094,447명이다. 그때 내가 일선에서 살얼음판을 디디며 직접 경험한 바로는, 사망자 수는 치료 기간 7일 이내에 사망한 경우만 포함했다. 감염자가 지정 병원에서 치료받고 귀가해 바로 두 사람이 사망했으나 제외되었다. 백신 접종 후유증으로 3~4개월 앓다가 사망한 두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이를테면 적어도 누적 사망자로 보고된 수에 최소한 '곱하기 4'를 해야 한다는 말이다. 의학 발달과 청결 시스템으로 과거 흑사병만큼은 아닐지라도, 21세기 현재에도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인류 약 3천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것이다.


거기에는 나의 친엄마도 포함되었다. 코로나19가 가장 기승을 부린 2022년 2월이었다. 노쇠하여 치매와 살집이 없었을 뿐, 엄마는 그때까지 식사도, 말씀도 잘했다. 감염 후, 지침에 따라 지정병원에서 치료받고 귀가했다. 엄마가 달라졌다. 의식은 있었으나 식사도, 물도 섭취하지 못했다. 등창이 여기저기 낭자했다. 평소처럼 걱정하지 마, 나는 살 만큼 살았어, 라고 말할 줄도 몰랐다. 겨우 하룻밤을 지냈을 때, 호흡이 거칠어졌다. 급하게 응급차를 불러 종합 병원으로 달렸다. 여기저기 전화해도 병실이 없으니 오지 말라, 는 말을 무시하고 무작정 달려갔다.

"얼마나 기다려야 하나요?"

"자리가 날 때까지요."

당시 종합병원 응급실은 어디나 똑같았다. 마음이 타들어 갔지만 속수무책으로 기다렸다. 4시간 만에 응급실 옆, 임시로 마련된 음압격리실 한 공간을 차지했다.

"엄마, 눈 뜨세요! 조금만 더 기운을 내세요!"

하지만 그 밤, 엄마가 숨을 몰아쉬었다. 혼수상태에서 내가 부르는 찬송을 따라 불러 준 것이 마지막 살아있는 몸짓이었다. 만일 '하늘나라에서 다시 만나는 약속'이 없었다면, 그때 아마 나는 미쳐버렸을 것이다. 늘 함께 있다가 치료병원에서 열이틀 만에 귀가한 엄마와 단 하루 반 만에 헤어져야 했으니까.


사람은 만물의 영장일지라도, 한계로 가득 차 있다. 아무리 노력하고 최선을 다해도 공허, 죄책감, 목마름에서 벗어날 수 없다. 내 실패와 질병은 물론이거니와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도 따라가기에 버겁다. 사람이 스스로를 구원한다는 것은 진실로 어불성설이다.

하여 예수가 2025년 전, 전 인간의 한계를 해결하기 위해 이 세상에 왔다. 실제로 십자가에서 사람의 모든 한계, 악, 죄, 허물을 짊어지고 제물이 되었다. 그리고 3일 만에 부활하여, 인생에 영원한 삶과 생명을 선물했다.


당신, 오늘 예수가 나를 위해 애쓴 행적을 받아들여라. 내 힘만으로는 안 되는 것을 부여잡고 몸부림치는, 어리석은 자 되지 말라. 차 안에서 쓸데없이 등짐을 지고 있는, 우매한 자리에서 돌아서라. 예수로 인해 내 모든 무거운 짐이 사라진, '가볍고 살만한 인생'을 경작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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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