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과 공포
(사탄이 가장 좋아하는 말은? 두려움, 공포. 공포의 반대말은? 안녕)
나는 30대 말에, 한 분에게 어이없는 말총을 맞고 실신한 적이 있다. 공동체에서 찬송대회를 마치고 즐겁게 식사하러 가는 중이었다. 불과 서너 번 정도 "가족 찬송보다 구역 찬송대회가 더 좋은 것 같아요" 장난처럼 의견을 주고받았는데, 상대 어른이 폭발했다. 다음날엔 사무실을 찾아와 말총으로 짓밟기 시작했다. 이성으로서 맞대응할 수 없으니 억장이 무너져, 호흡곤란이 오고 온몸이 마비되기 시작했다. 가까운 병원에 옮겨져서 링거를 맞은 후, 두어 시간 후에야 겨우 정신을 차렸다. 그때는 실제 총이 아닌, 말총만 맞고도 사람이 실신하는 것이 무엇인지 몰랐다. 나의 한계려니 생각했다. 최근에서야, 그것이 공포에 의한 공황발작인 것을 알았다.
사람에게는 본능적인 '공포'가 있다. 추락의 위험을 느끼는 높이에 대한 공포, 어둠·큰 소리·낯선 존재에 대한 생존의 공포, 육체적 손상을 예감하는 고통과 상처의 공포, 존재가 사라지는 것에 대한 죽음의 공포 등등이다.
거기에 더하여 가부장적 사회에서는 능력이나 성취, 경제력이 남성들의 정체성이므로 실패나 실직이 남성들의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이었다. 현대사회에서는 여성도 산업전선에서 현역이므로 똑같이 '무너질까 봐 두려운 공포'가 존재한다.
그렇다면, 사람 안에 서식하는 두려움과 공포, 언제부터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을까?
첫째, 심리학에서는 위에서 살펴본 것과 같다. 공포가 사람의 '생존 본능'이라고 말한다. 사람의 뇌는 위협을 감지하면 즉각 '도망치거나 싸워야 한다'라는 신호를 보내므로 극도로 긴장한다. 그럼에도 그 상황을 벗어나면 곧 해제된다. 한편, 서서히 옥좨오는 공포는 심장 등 생명에 손상을 가한다. 불행하게도 현대 사회는 물리적인 맹수의 위협보다는 불안·고독·실패·불안정 등 정신적 위협에 의한 공포가 대부분이다.
둘째, 철학에서는 자기 존재가 무(無)와 마주할 때 공포가 생긴다고 본다. 사람은 누구나 언젠가 사라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여 그 사실을 의식하는 순간 마음속에 설명할 수 없는 근원적 두려움이 몰려온다. '왜 사는가?' '죽음 뒤엔 무엇이 있을까?' 이런 질문과 무지가 바로 공포의 씨앗인 셈이다.
키에르케고르(덴마크, 1813~1855)는 '자유'가 두려움을 준다고 덧붙였다. (《불안의 개념》. 강성위 옮김. 동서문화사, 2024) 사람은 자유롭지만, 어떤 선택을 하든 또 다른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에서 불안과 두려움을 느낀다는 것이다.
불안이란 자유의 현기증이므로, 정신이 종합(영혼과 육체의)을 정립하려고 하자 자유가 자신의 가능성을 들여다보다가 그 몸을 의지하기 위해 유한성을 붙잡을 때 일으키는 현기증인 것이다. 이 현기증 속에서 자유는 정신을 잃고 쓰러진다.
셋째, 성경은 말할 것도 없이, '죄로부터 공포가 왔다'라고 선언한다. 인간 최초의 공포는 첫 사람 아담의 죄 이후에 생겼기 때문이다.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창세기 3:10)
아담의 공포는 단순히 벌 받을까 봐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었다. 신의 명령을 어긴 후, 신과의 단절로 생긴 두려움에서 오는 공포였다. 사람의 첫 공포가 죄를 짓고 의지할 신을 잃은 상태에서 시작된 것이다. 이후 사람의 모든 공포는 근원적으로 '신과의 단절'에서 나왔다. (같은 책)
죄는 불안을 따라 들어왔다. 그러나 그 죄가 또 불안을 데리고 온 것이다.
죄로 인해 감성은 죄성이 되었다. 이 명제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죄에 의해 감성이 죄성으로 된다는 것과, 아담으로 죄가 이 세상에 들어왔다는 것이다.
사람에게 죄가 들어오기 전, 신이 사람을 위해 만든 에덴동산은 그 자체가 '기쁨'이었다. 사람이 가진 기본 감정 중 기쁨만이 신이 주신 감정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죄'로 인해 기쁨이나 만족 등의 감정은 안으로 눌리고, 대신 두려움(공포)·슬픔·분노·혐오·놀람 등 부정적인 감정들이 사람 안에 들어왔다.
결론적으로, 사람 공포의 근원은 단순한 위험 때문이 아니다. 신을 잃어버린 마음의 상태다. 따라서 사람은 다시 신과 연결될 때, 두려움과 공포를 넘어 기쁨을 회복하게 된다. (같은 책)
죄의 궤변을 진실로 제거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신앙이고, 상태 그 자체가 또 하나의 새로운 죄임을 믿을 수 있는 용기이며, 불안 없이 그 불안을 버릴 수 있는 용기이다. 이것을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신앙뿐이다.
구원이 현실에 정립되는 순간, 그때 비로소 이 불안이 극복된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요한일서 4:18)
당신의 두려움과 공포, 그 근원이 어디일까? 그것을 아는 것만으로도 두려움과 공포가 뿌리째 뽑히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