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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

인간관계

by 뜰에바다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 마음이 오래 아팠던 적이 있는가? 시간이 지나면 그 상처가 저절로 아물던가? 상처가 자주 하는 말이 있다고 한다. '건드리지 마, 나 지금 예민해!')


프랑스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1905~1980)와 페미니즘의 대가인 시몬 드 보부아르(1908~1986)가 국가 교수 자격시험에서 수석과 차석을 차지하며 가까워졌다. 가난한 사르트르가 보부아르에게 청혼하니, 보부아르의 아버지가 거절했다. 그들이 합의하여 1929년, 20대 초반에 공개적으로 전대미문의 계약 결혼을 했다. 사르트르가 제안한 결혼이었는데, 계약 결혼 조건은 3가지였다.

첫째, 결혼하지만, 함께 살지 않으며, 다른 사람과도 연인이 될 수 있다.
둘째, 다른 사람을 사랑할 때는 솔직하게 이야기한다.
셋째, 서로 경제적으로 독립한다.

그 후 그들은 다른 연인들을 두기도 했으나 멀리 떨어져 있어도 편지로 사상과 지적 교류를 이었다. 그 과정 중에 혼자보다는 둘이서 사색한 성과물들을 각각 갖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의 실험적인 계약 결혼은 사르트르가 죽을 때까지 평생에 걸쳐 이어져, 51년간을 유지했다. 그들이 당대의 주목받은 석학이요, 철학·문학가요, 선구자였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추론한다면, 한 공간에 살지 않고, 서로를 존중하며, 적정한 거리를 유지한 것이 오히려 그들의 사랑을 더 견고하게 하고, 애틋함으로 몽파르나스 무덤까지 함께 가게 하지 않았을까?


그럼에도 그것은 잘난 사람들의 이야기다. 보통 사람들의 세상에는 사랑하지만, 씻을 수 없는 상처로 평생을 함께할 수 없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2차, 3차 감정의 상처들이 곪아 터져서 더는 같이 갈 수 없게 되는 경우가 많다.

사람은 누구나 사랑받고, 이해받고, 존중받길 원한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서 제일 깊은 상처를 입는다. 누구나 예외가 없다. 당신과 나도 마찬가지다. 왜 그럴까?


1. 심리학

심리학에서는 '기대와 현실의 불일치' 때문에 인간관계에서 상처가 생긴다고 말한다. 나는 상대방에게 이것을 기대하지만, 상대방은 나처럼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반대 지점에 가 있다. 하여 내가 기대한 말과 행동이 나오지 않는다. 그 순간 내 마음이 무너지고, 그 불일치가 배신감·소외감·거부감으로 이어진다. 결국 상처는 타인 때문이 아니라, '내가 만든 기대'에서 생긴다.


2. 철학

철학에서는 상처가 '사람이 타인의 시선에 종속되어 자기 주체성을 잃을 때' 생긴다고 본다. 그것을 가장 잘 정리하고 말한 사람이 사르트르다. (《닫힌 방》. 지영래 옮김. 민음사, 2013)

타인은 나의 지옥이다.

즉, 사람은 존재론적으로 타인을 배제하는 것이 불가능하므로, 타인의 잣대나 요청에 자기를 맞추는 삶이 자기다움의 실존이 훼손된다는 것이다.

현대는 소셜 미디어 사회이다. 과거보다 훨씬 더 타인의 시선에 나를 묶을 수밖에 없는 환경에 노출돼 있다. 따라서 타인과 비교하고, 타인·세상의 요구에 나를 꿰맞추려다 보면 결국 자기는 상처투성이가 된다. 사르트르의 말을 곱씹어야 할 것이다.


3. 성경

성경에서는 사람의 상처 근원은 '죄로 인한 자기 중심성' 때문이라고 규정한다. 범죄 이후 사람은 삶의 방향이 신 중심에서 자기중심으로 바뀌었다. 자기 중심성은 '내가 옳다, 내 뜻이 기준이다'라는 교만이다.

신은 아담이 혼자 있는 것이 안타까워, 돕는 배필 하와를 창조하여 함께 살게 했다. 그때 아담이 하와를 보고 감격하여 말했다.

"내 뼈 중의 뼈요, 내 살 중의 살이다!" (창세기 2:23)

하지만 그토록 아끼고 사랑하던 아담 부부가 신의 명령을 어긴 후에는 서로 핑계를 대었다. 사람에게 죄가 들어온 이후, 인간관계는 더 이상 '상대방이 아닌, 나 중심'이므로, 핑계를 대고 상처를 주고받을 수밖에 없는 구조로 변한 것이다.

"당신께서 제 곁에 주신 그 여자가 그 나무로부터 난 열매를 주어서 제가 먹었습니다." (창세기 3:12)

"뱀이 저를 속여서 제가 먹었습니다." (창세기 3:13)


그렇다. 사람은 언제나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상처를 입는다. 홀로 있으면 고독해도 잠깐일 뿐이다. 반면 가족·친구·연인·동료·상사·이웃과 함께 있을 때 상처는 비교가 안 될 만큼 많고, 크다. 과연 '죄가 낳은 자기 중심성'이 상처의 주범인 것이다.

그 주범은 당신과 나의 마음에 상처를 켜켜로 쌓아, 먹물 한 방울이 온 식수를 까맣게 물들이듯, 나와 당신 안에 피고름을 만든다. 종국에는 나를 해치고, 상대방을 죽이며, 어둠의 자식·지옥의 지식이 되게 한다.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사람 안에 들어 있는 자기중심적인 죄 한 방울, 사람이 거기에서 벗어날 방법이 있는가? 있다. 나 때문에 상처를 대신 입고, 상해를 받아, 목숨 버려 나를 고쳐준 예수, 그를 의지하는 것이다. 그것은 유일무이하다.

"그는 우리의 범죄 때문에 찔리게 되었고, 우리의 죄악 때문에 짓밟히게 되었다. 우리의 평화를 위한 훈계가 그에게 있었고, 그의 상처로 우리가 낫게 되었다." (이사야 53:5)


오늘, 당신의 상처를 전문가 예수에게 가져가라. 상처가 아문다. 피멍이 씻긴다. 무거운 짐이 새털보다 가벼워진다. 이 세상에서 육체를 입고 살 동안 자기 중심성에서 나오는 상처를 근절할 수는 없지만, 그가 상처를 보는 눈과 마음을 바꿔주는 까닭이다.


(주님, 제 안에 쌓여가는 상처들이 제 중심으로만 생각하는 '죄' 때문임을 고백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나 객관적인 눈을 주시고, 어려운 일일지라도 핑계나 합리화 대신 제안에서 비롯된 죄의 결과임을 인정하게 하소서. 하여 저를 위해 이 세상에 오시어 짓밟히고 상하시므로 저를 낫게 하신, 주 예수님을 의지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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