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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

인생의 공허와 허무

by 뜰에바다

(세상에서 가장 빨리 사라지는 게 무엇인지 아세요? 즐거움이에요; 사람의 웃음이 지나간 자리에는 허무가 앉으니까요. 먹어도 먹어도 배가 안 부른 사람이 있는데, 누구일까요? 마음이 공허한 사람이에요; 마음이 비어 있으면 아무리 채워도 허기지니까요. 세상에서 제일 큰 블랙홀은 어디 있을까요? 사람 속에요; 신 없이 무엇인가 채우려는 영혼은 아무리 채워도 가득 차지 않아요)


당신은 가끔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을 것이다. 열심히 살아도 마음 한구석이 텅 빈 느낌, 좋은 직장과 사랑과 돈과 명예를 가졌지만 이상하게 허전한 기분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이상한 게 아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끼는 본질적인 결핍이다. 따라서 사람은 '성공'해도 잠깐 기쁠 뿐이다. '사랑'으로 채워도 완벽하지 않다. 하여 결국 외치게 된다. '이 세상 어디에도 진짜 만족이 없구나!'


이유가 있다.

첫째, 중심이 '나 자신'이어서다.

사람은 언제나 '내가 주인공인 삶'을 살고자 한다. 하지만 세상은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그때 자아가 깨진다. 그리고 공허가 찾아온다. 누가 봐도 성공한 인생인데 허무하다. 모든 걸 다 가졌는데 만족하지 않다. 사랑받아도 그때뿐 또 불안하다.

그것을 가장 먼저 말한 사람이 '근대적 자아의 창시자'라고 부르는 데카르트(프랑스, 1596~1650)이다. 그는 인간 존재의 중심은 외부 세계나 신이 아니라, '생각하므로 존재하는 나'라고 못 박았다. (《방법서설·성찰; 데카르트 연구》 최명관 옮김. 도서출판 창, 2011)

나는 성년에 이르러 선생들한테서 벗어나자, 책으로부터 배우는 학문을 완전히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나 자신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학문, 혹은 세상이라는 커다란 책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학문 말고는 이제 어떠한 학문도 찾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하지만 데카르트의 말에 귀 기울이고, 그를 따르는 사람은 백 퍼센트 공허와 허무 앞에 서게 된다. 한계를 가진 '불완전한 나'로부터 시작되는 인생은 만족에 이를 수 없기 때문이다.


둘째, 사람은 ‘무한을 향한 존재'여서다.

사람은 본질적으로 의미를 찾는다. 하지만 세상 모든 것은 한계와 종말을 가지고 있다. 젊음이 사라진다. 명예가 잊힌다. 관계도 변한다. 사람이 찾고자 하는 욕망은 무한한데, 세상은 유한한 것이다. 이 한계 앞에서 사람은 또다시 허무와 만난다.

그것을 철학자 파스칼(프랑스, 1623~1662)이, 사람 속에는 '무한을 향한 공허'가 있다고 《팡세》(하동훈 옮김. 문예출판사, 2003/2023)에서 말했다.

이 세상의 공허함을 모르는 사람은 실로 자신이 공허하다. 평판과 오락과 장래의 예상에 마음을 빼앗긴 청년들이 아니라면 그것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다음에는 키에르케고르(덴마크, 1813~1855)가, 사람을 '유한과 무한 사이에 서 있는 존재'라고 정의했다. (《죽음에 이르는 병》. 강성위 옮김. 동서문화사, 2024)

사람은 유한과 무한, 시간적인 것과 영원한 것, 자유와 필연의 종합이다.

중요한 것은 사람의 무한과 영원의 영역을 무엇으로 채운단 말인가? 하여 한계가 있으므로 만족할 수 없는 세상에서 사람이 공허를 느끼는 것은 당연지사다.


셋째, 신과 단절되어서다.

사람은 '신의 형상'으로 지어졌다. 하여 신과의 관계가 끊어지는 순간, 근원적인 공허에 빠진다. 마치 어린아이가 부모를 잃어버리는 순간, 천애의 고아가 되는 것과 같다. 돈, 명예, 사랑, 쾌락, 철학 그 어떤 것도 공허를 채우지 못한다. 해답이 신과의 화목인 까닭이다. 그 사실은 어거스틴 (히포의 교부, 354~430)의 《참회록》(생명의 말씀사, 2017)에서 적나라하게 만나볼 수 있다. 그는 신에게 돌아와 진정한 안식과 기쁨을 얻기 전까지, 매우 탁월한 방탕아였다.

내 자만심이 성경의 겸손함을 싫어했고, 내 예지력으로는 성경의 내면을 꿰뚫어 볼 수 없다는 사실이 나를 참을 수 없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미천하고 작은 자를 위대한 자라 했으나, 나는 작은 자가 되는 것을 경멸하고, 자만심에 가득 차 스스로 나 자신을 위대한 자라고 여겼습니다.
나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까지도 ‘7 더하기 3은 10’처럼 분명히 이해하기를 원했습니다. 감각에 잡히지 않는 물질적인 것들 혹은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영적인 것들까지도 수학 계산처럼 분명히 이해하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황제를 찬양하는 웅변 준비를 하던 바로 그날, 스스로 비참함을 느끼게 하시기 위해 당신은 나에게 어떻게 하셨나요? 그날 나는 온갖 미사여구와 거짓으로 그를 찬양한 시를 낭독하면서 뻔한 거짓말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모릅니다. 그 시가 거짓인 것을 다 알고 있는 사람들로부터 많은 박수갈채를 받을 때는 속이 까맣게 타들어 가는 것만 같았습니다. 만감이 교차해 안절부절못했습니다.
이로 인해 눈 깜짝할 사이에 나는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을 발견할 수 있었고, 그제야 비로소 피조물을 통해 분명하게 계시된 당신의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할 때, 나는 빛과 선율과 향기와 양식과 포옹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는 주님이 내 속사람의 빛이시요, 선율이시요, 향기시요, 양식이시요, 안식처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영혼은 주님 안에서 쉼을 얻을 때까지 평안을 모릅니다.


그렇다. '공허'는 신을 잃어버린 사람의 반응이다. '허무'는 신을 외면하지만, 한계 앞에 다다른 사람의 절망이다. 그렇다면, 사람의 공허와 허무를 채울 방법이 있는가? 있다. 단 한 가지다. '신'으로 채우는 것이다. 충만은 밖에서 오는 게 아니라, 위에서 내려오니까 말이다.

"내 아들아, 또 이것들로부터 경계를 받아라. 많은 책들을 짓는 것은 끝이 없고. 많이 공부하는 것은 몸을 피곤하게 하느니라.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 (전도서 12:12~13)


당신, 공허하고 허무한가? 당신의 공허는 신호다. 당신의 허무는 신이, '이제 나에게 돌아오라'라고 부르는 초대장이다. 당신의 공허와 허무를 안식과 만족으로 채울 기회를 사라. 절대 놓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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