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아파트는 무엇일까. 정답을 찾을 수 없는 고민이지만, 주거는 실존이므로 치열하지 않을 수 없다. 집과 아파트를 샀거나 사지 못한 일로 더 이상 고민하기 싫다. 집을 갖지 못한 불안정성과 집값이 계속 오른다는 불안감에 더 이상 에너지를 쏟기 싫다. 삶에서 에너지를 더 많이 들여야 할 곳은 너무나 많다. 삶의 한 대목을 매듭짓고 싶다. 집 문제다.
그러나 비싸게 살 수는 없다. 가진 게 넉넉하지 않다. 무리수를 둔다면, 평생 은행에 삶이 저당 잡힐 거 같다. 그럴 수는 없다. 내 삶은 내 삶이지 않은가. 어떤 곳에 얽매인다면, 나는 온전히 내 삶을 살 수 없다. 그곳이 은행이든, 채권자든, 어떤 다른 곳이든. 그렇지만 모든 자원을 긁어모아도 약간 모자란다면, 가진 자본의 약 십 분의 일 정도는 빌려서 보태는 방법도 괜찮을 거 같다는 자신감도 붙는다. 일하고 돈 벌어 조금 저축한다면, 몇 년 동안만 감내할 수 있을 정도 말이다. 그 이상은 어렵다.
우리 동네에서 집을 사야 할까, 다른 곳으로 떠나야 할까. 서울은 생각보다 분절적이다. 코로나19 시국에는 집값이 다 같이 오르더니, 요즘에는 오르는 곳만 더 오른다. 비수도권은 오히려 떨어지고 있다. 무슨 현상이람. 부동산은 서울 오르고, 경기권 오르고, 그 오름세가 비수도권으로 이어지는 거라며, 원정 투자니 고속버스 투자니 이런 말들이 난무했는데, 요즘은 달라졌나. 누군가는 저출생과 지방소멸 문제로 서울만, 그중에서도 비싼 지역만 더 오르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고 분석한다. 시시각각 변하는 현황에 눈이 돌아갈 지경이다. 내가 어찌 알겠는가.
나는 지금 살고 있는 동네가 좋다. 아내와 아이도 산 지 10년이 넘어 동네가 익숙하다. 주말에는 공원과 얕은 산으로 산책 가고, 동네 마트에서 라면이나 아이스크림을 사 먹고, 가까운 전통시장에서 오징어나 채소, 돼지고기를 사서 집에서 음식을 해 먹는 재미가 즐겁다. 소소한 행복이다.
하지만 동네 아파트값은 천정부지다. 강남 지역은 아닌데, 강남 3구 근처여서 그런지 엄청 올랐다. 나와 아내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의 두세 배가 넘는다. 이런 집을 이 가격에 사야 할까. 자신이 없다. 우리 동네에서 너무 오래 버텼나 보다. 요즘 드는 솔직한 심정이다. 동네에 사는 주민이 감당할 수 없는 주택가격이라니, 이런 게 '내몰림 현상'의 한 사례이지 않을까. 10년 전에 왜 집 하나 사지 못했을까, 후회해도 이미 늦었다. 과거는 생각할 필요 없다고 위안하는 것으로 평안을 찾는다.
방법은 두 가지. 감당 가능한 가격을 갖고 있는 다른 지역으로 이사 가거나, 아예 서울을 떠나는 것이다. 하루는 아이한테 물었다.
“내년에 이사 가는 거 어때? 그러면 전학 가야 하는데 괜찮아?”
“그건 좀..”
예전에는 전학을 흔쾌히 받아들였던 아이는 내년 중학교 입학을 앞두고 있어서인지, 최근엔 전학을 꺼려한다. 어쩌지, 아직 결정된 건 없으니 시간을 좀 벌어보기로 했다.
우리 동네에서 계속 살되, 싼 아파트를 찾거나 빌라나 다세대 주택을 사는 방법도 있다. 요즘 전셋값이나 아파트값이 오르는 원인 중 하나가 비아파트 주택의 전세사기 문제도 있다고 하지 않나. 그래서 아파트 선호가 더 증가했고, 비아파트 주택 가격이 떨어진다고 한다. 사기 문제로. 사기마저도 이젠 집값에 영향을 주는 시대가 됐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가격의 집이 있을까. 두루두루 찾아보고, 가늠해 보기로 하자.
내년 겨울 초입에 전세 계약이 또 만료된다. 2년마다 돌아오는 통과의례다. 그러면, 지금 집에서 6년을 살게 되는 것이다. 처음 입주했을 때는 다행히 동네 전셋값이 떨어졌을 때다. 2년이 지나고 전셋값이 다시 폭등했는데, 다행히 계약갱신청구권이라는 제도가 생겨서 5% 인상으로 재계약을 했다. 계약갱신청구권 도입을 부정적으로 봤던 사람들도 있었는데, 나는 도움을 받았다. 그리고 다시 2년이 지나서는 시세에 맞게 다시 계약했는데, 전세보증금을 더 올리지는 않았고 시세가 오른 만큼 월세를 추가해 반전세 계약을 맺었다. 내년 겨울이면 6년을 사는 거니, 하긴 아이가 초등학교를 여기서 온전히 다녔으니 그럴 만도 하다.
언젠가 살아갈 우리 집은 하늘과 나무와 유채꽃 같은 색깔이었으면 좋겠다. 2024년 봄, 올림픽공원에서.
이제는 스무 살부터 지금까지 근 24년간의 셋집살이를 그만두고 싶은 희망이 있다. 굳이 ‘희망’이라고 표현하는 이유는, 이게 나만의 희망사항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내년 겨울 우리 동네, 서울의 다른 동네, 경기도 어느 곳의 집값에 따라 나의 희망사항이 실현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자원에 따라서도 선택이 조금 달라질 수 있다. 다만, 로또나 스피또에 당첨되지 않는 한 내년까지 내가 가진 자원이 그렇게 많이 늘어날 거 같지는 않다.
희망사항을 실현시키겠다는 의지로 매주 바뀌는 서울의 시세 그래프를 좇아가고 있다. 나 같은 무주택자에게는 절망적이게도 그래프는 계속 올라간다. 언제까지 오를지, 아무도 모른다. 혹자는 다시 떨어질 거라고 하고, 혹자는 떨어질 일이 없다고 호언장담한다. 어떻게 알까, 정답처럼 이야기하는 그들의 확신이 신기할 따름이다. 포털이나 앱에 들어가 나름 괜찮다고 생각하는 가격대 아파트의 시세를 보는 것도 자주 하는 일이다. 일희일비하지 않는 삶이 나의 가훈 같은 건데도, 수억이 넘는 숫자에 일희일비하고야 만다. 정말 비싼 집들이 이리도 많다. 놀랍다.
주지 않는 아내와 딸아이의 눈치를 스스로 보면서, 인테리어 가격대도 쓸데없이 찾아보고 있다. 상대적으로 싼 아파트는 이유가 있는 것이고, 대체로 오래된 곳이다. 그러므로 만약 오래된 아파트를 산다면, 인테리어 공사를 하고 들어가야겠지. 혼자서 상상하고 찾아보면서 희망 회로를 또 돌린다. 내가 싸게 살 기회가 올까마는.
순진한 마음에 이런 생각도 든다. 아파트를 사면, 10년 후나 20년 후에 어떻게 될까. 이렇게 저출생이고, 인구가 줄어드는데 부동산가격이 온전할까. 거시경제나 미시경제를 하나도 모르지만, 막연한 걱정이 들기도 한다. 집도 없는데 집이 있고 난 이후의 일까지 걱정하는 거 보니, 걱정도 팔자다. 쓸데없다. 혼자 웃는다.
나도 어쩔 수 없는 ‘먹물’이라, 빌라나 다세대 같은 일반주택보다 아파트가 좋은 거 같다. 각진 방에 각진 거실, 빨래를 널 수 있고 창밖을 바라볼 수 있는 발코니, 넓은 주차장과 언제든 버릴 수 있는 쓰레기장, 가까운 곳에 있는 공원이나 산책로, 아이가 다닐 수 있는 집 가까운 학교, 도둑이 들 수 없는 안전함까지.
나에게 아파트는 무엇일까. 지금까지 가져보지 못한 결핍이다. 결핍이니까 갖고 싶은 욕망이다. 그러니 좀처럼 쳐다보기 어려운 높은 나무다. 그러지 말자고 다짐하면서도 좋은 집 가진 사람과 나를 비교하는 비교의식이다. 와, 하는 부러움이면서도 쳇, 하는 시기심이다. 동시에 잦은 이사와 가격 급등 문제에서 빗겨 나고픈 고민거리다. 아파트는 참 복잡다단한 어떤 상징이다.
생각해 보면, 없어도 지금까지 나름 잘 버티고 살았다. 대단한 욕심부리지 않고 나름 괜찮다 여겨지는 곳에서 살아왔고, 살아갈 수 있다. 그 마음이 크게 변한 건 아니다. 너무 원론적이어서 굳이 말하지 않는 게 좋겠다 생각했지만, 오히려 원론적이어서 진실을 담고 있는 말을 꺼내 본다. '직육면체 콘크리트 물질보다 더 중요한 게 사람의 삶이다.' 진부하지만 맞는 말이다.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 아파트를 소유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조차 또 다른 집착일 수 있다.
집을, 그것도 아파트를 갖는 게 세상 전부는 아니다. 아파트는 수단이다. 삶의 수단. 집 속에 사는 사람의 삶이 진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