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 호색 그 강렬한 두 영웅의 서사시......
1. 호색(好色)의 등장
부산포에 호(號)는 밀월(蜜月)이요 자(字)는 호색(好色)인 인물이 있었다.
당대 명망이 높은 해주 최 씨(海州 崔氏)로 시조인 최충(崔冲)의 19대 손이었다.
그의 키는 오척반(1척이 30CM)의 작은 체구였지만 바늘로 찔러도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몸은 탱탱했고 부리부리한 눈은 호랑이를 방불케 하는 맹수의 눈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하체는 그 누구도 따르지 못할 대단함을 지녀 부산포 인근의 모든 아낙네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어이~~~ 안에 누구 있는교?”
컬컬하고 탁한 목소리가 사립문을 통해 쩌렁쩌렁 울려왔다.
탁배기 몇 사발을 들이켰는지 모를 정도로 연신 헛구역질을 해 가며 누군가를 부르고 있었다.
“보이소~~ 있으면 이바구라도 좀 해 보이소~~ 어이~~!!!”
누군가를 애타게 부르고 있는 이는
부산포 저잣거리에서도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로 색(色)을 밝히기로 이름난 호색(好色)이었다. 호색은 해주 최가로 문반(文半) 양반가였지만 호색의 부친(父親)은 부산포 왜관 항거 왜인을 관리하는 무관 첨사(僉使) 벼슬을 하고 있던 터라.. 호색은 어릴 적부터 칼, 창, 화살에 익숙한 유년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칠 척 장신인 부친의 풍모와는 달리 외탁을 하여 체구가 작은 것은 옥에 티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워낙 탄탄한 체구를 가지고 있어 어느 누구도 그를 업신여기거나 아래로 보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만약 그런 상황이 빚어진다면 시비를 건 쪽은 그날은 “비 오는 날 먼지가 털릴 만큼....” 뼈도 못 추리게 만들어 놓는 것이 호색의 성품이었다..
어떤 이는 개망나니라 했고, 어떤 이는 양반이지만 “에이 호로자슥” 이라 쑥떡 거리기도 했으며 어떤 이는 “그래도 호색 도련님은 시비 거는 사람한테만 그래 하지 가만있는 우덜한테는 안 그런다 안합니꺼?“라며 평판이 극과 극이었다....
그러나 호색의 치명적인 단점은 너무 과하게 색(色)에 빠진다는 것이었다.
그의 타고난 하체가 그러해서 그런지 술만 들어갔다 하면 이성의 끈을 놓고 양반, 상놈, 왜놈을 가리지 않고 추태를 부리는 것이 평판의 기울기의 추를 조금 더 부정적인 쪽으로 향하게 하였다.
조선 명종 11년, 병진년(丙辰年), 1556년 호색은 아버지인 최성필과 어머니 강 씨의 둘째로 태어났다. 첫째인 두 살 터울 누이인 진숙과 밑으로는 세 살 터울인 여동생 민정이 있었다 누이인 진숙은 맏딸의 역할을 충실히 하였고 여동생인 민정 또한 막내로서의 귀여움을 독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집안에 아들이라고는 호색 한 명이었지만 극과 극의 성품을 가진 호색을 바라보는 부모의 입장은 애가 타지 않을 수 없었다. 양반가로 태어났지만 행동은 마치 저작거리 사당패와 다를 바 없는 난봉꾼의 전형이 바로 호색이었기에 호색의 부모는 맘 편히 하루를 보낼 날이 없었다....
조선 선조 9년, 병자년(丙子年) (1576년) 호색의 나이도 스무 해를 넘겨 다가오는 무과 식년시를 준비하고 있었다. 식년시가 코앞이지만 호색은 아무 거리낌 없이 저작거리를 둘러보며 “평성춘” 이라하는 주막에 자리를 잡고 탁배기 한 되를 시켜놓고 신맛이 가득한 짠지를 입에 물고 주위 사람들을 훑어 보고 있었다.
“아지매요? 오늘 섭다리 장 씨 아재는 아직입니꺼? 호색은 입안에 남아있는 짠지의 신맛과 탄산기가 남은 탁배기의 시큼함을 트림을 섞어 주모에게 물어보았다...
도련님!! 그 잡놈하고 가까이하면 대감마님한테 제가 경을 치는 구먼유... 저번에도 장 씨하고 투전판에 도련님 끼워준 것이 대감마님 귀에 들어가 제가 얼마나 곤욕을 치렀는지 모르것구먼유... 하며 주모인 보령댁은 다시는 장 씨와 같이 섞이지 말라며 큰일 날 소리라며 진저리를 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