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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을 Jul 31. 2024

어두운 밤, 둘만의 자리, 맞닿은 눈

[달조각을 모으는 남자] 9화

[D-60]


어느덧 아침이 밝았다. 나는 침대에 눕혀져 있었다. 흔들리는 마음을 감추려 복분자 주를 들이켠 탓에 바로 기절한 듯했다. 매신은 거실 소파에 담요를 덮고 잠들어 있었다. 테이블이 깨끗한 걸 보니 고맙게도 뒷정리를 해 준 모양이었다. 나는 조용히 그의 옆에 서서 고민했다. 아침밥을 만들어 주고 싶었지만, 부엌과 거실은 연결되어 있었다. 달그락 거리는 소리에 매신이 깰 것이 분명했다. 나는 혹시, 하며 매신의 허리에 팔을 넣었다. 그리고 그대로 들어 올렸다.

역시 바다 사람이라 그런지 몸이 부력으로 인해 가벼웠다. 자전거에 그를 태웠을 때 버벅거리긴 했지만 확실히 그의 키에 비례하는 체중은 아니었다. 부력은 바다에서 만큼은 아니더라도 육지에서도 어느 정도 작용하는 듯했다. 아차, 생각이 너무 길었다. 그가 가볍긴 해도 오래 들고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나는 허벅지에 힘을 싣고 매신을 침실로 옮겼다. 곤히 잠들어 있는 그 위로 핑크색 이불을 가슴까지 덮어주고 조용히 방을 나왔다.




'끼익'

천천히 열린 문 사이로 그가 얼굴을 감싸며 물었다.

"나 왜 여기서 자고 있는 거야?"

나는 긴 나무젓가락을 흔들며 말했다.

"왜긴, 내가 들어 옮겼으니까. 그것도 공주 안기로 말이야."

매신은 고개를 가로로 세게 저으며 이마를 짚었다. 흐트러진 하얀 머리칼이 푸른 눈을 가렸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나도 남자란 말이야..."

그의 모습은 무척이나 귀여웠다. 안 그래도 부스스한 머리 붕 떠오를 때까지 쓰다듬고 싶었다.

"단잠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어. 내가 힘이 세서 그래."

매신은 입을 삐죽 내밀었다. 나는 웃으며 젓가락을 흔들었다.

"아침 먹자. 네가 좋아하는 파스타야."




[D-57]


그동안 우리는 길가에 핀 동백꽃을 구경하기도 고,  15년 전 그에게 건넸던 쪽지를 읽어보기도 고(달 목걸이에 저장되어 있었다), 바다를 보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주고받기도 했다. 그렇게 매신과 함께 지낸 지 일주일이 지났다.

'행복하다.'

도망치다시피 떠나온 이곳이 나에게 최고의 휴양지였다. 행복하고 아름다웠다. 매신과 함께 지낼수록 잊고 있었던 웃음이 다시 나에게 방문하는 것 같았다.


"5일이 지났어. 이제 다음 달조각을 찾으러 가자."

우리는 거실에 나란히 엎드려 매신이 펼친 종이 그러니까, 달조각 지도를 바라보았다. 빨간 동그라미가 쳐져 있는 다음 장소는 한강면 청수리였다.

"반딧불이를 구경하다 달조각을 찾았던 기억이 나."

"초승달 때랑 비슷하네."

빛나는 무언가 들 속에서 달조각을 찾기란 사실상 쉽지 않았다. 마치 흩뿌려진 별들 속에서 인공위성을 찾는 것과 같았다. 첫 번째 달조각은 운 좋게 바로 발견했지만 계속 그러리란 보장은 없었다.


"이번에는 특히 어렵겠어. 장난기 많은 반딧불이는 무리 지어 달조각을 감싸고 이리저리 돌아다. 그래서 더 쉽게 알아볼 수 있기도 하지만 교류자 속이기에 재미 들린 반딧불이는 달조각이 없어도 있는 척 무리 지어 연기하거든."

마냥 신비스러운 존재인 줄 알았던 반딧불이가 장난꾸러기였다니.

"반딧불이 무리?"

"육지 사람들은 그걸 도깨비 불이라 부르더라."

매신은 한숨 쉬며 고개 저었다.

"반딧불이가 얌전히 달조각을 줬으면 좋겠는데, 꽤나 애 먹었던 기억이 나."

"장소까지는 얼마나 걸려?"


매신은 하늘색 유리구슬을 자세히 들여다다. 나는 몰래 유리구슬 너머로 보이는 매신의 눈을 바라보았다. 푸른 눈동자, 그의 홍채에서 심연의 파도가 보이는 것 같았다. 빨려 들어갈 것 같은 어둑함 옆으로 고은 자갈이 파도에 젖혀지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그의 눈에 홀리고 있었을 때, 그렇게 그가 유리구슬을 아래로 내렸을 때, 우리의 눈이 맞닿았다. 매신은 얼굴을 아래로 숙였다. 내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는 걸 이제야 안 걸까, 나는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그래서 장소까지 얼마나 걸린데?"

매신은 여전히 얼굴을 숙인 채 대답했다.

"자전거로 1시간 30분 정도."

이미 정돈된 머리를 괜히 쓸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다른 이동수단이 필요할 것 같아. 네가 힘들기도 하고."


맞는 말이었다. 아무리 부력으로 매신의 몸이 가벼워졌다 하더라도 그를 실은 자전거를 1시간 30분 동안 끄는 것은 무리였다. 이동수단은 도보, 자전거, 지하철, 버스. 도보와 자전거로는 거리가 멀었고, 제주도에 지하철은 없었다. 그렇다면 당장 생각할 수 있는 건 버스다. 그러나 버스정류장에 표기된 다음 배차시은 6시간 후. 매신은 턱을 두드리며 말했다.  

"아무래도 차를 타야겠어."

"그렇지만 나는 면허가 없어. 당연히 너도 육지 면허는 없을 거고."

"교류자가 육지에서 타고 다니는 차가 있어. 전국을 돌면서 교류해야 하는 우리에게 필수적인 수단이지. 이 차는 교류할 때만 탈 수 있고 당연히 육지 사람에겐 보이지 않아."

"교류할 때만 탈 수 있다면 지금 같은 상황엔... "

"법 적으로 그렇다는 거야. 그냥 나중에 처벌받으면 돼. 그래봤자 벌금 몇 푼이거나 봉사 100시간 정도야."

"정말 괜찮겠어?"

"애초에 차 없이 달조각을 모은다는  불가능이었어. 16년 전에도 육지 교류자의 차를 타고 다녔었으니까."


매신은 은 목걸이에 손을 넣었다. 설마 차도 목걸이에 저장되어 있는 것일까. 바다 거품이 없어지면서 매신의 손에는 슬라임 같은 물방울이 들려 있었다. 슬라임은 바닥에 떨어지면서 작은 승용차 크기로 부풀었다. 거대한 물탱크 같았다. 이게 차라고? 바퀴도, 핸들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물이었다.

'물컹'

느낌이 이상했다. 축축하면서도 바지를 적시지 않는, 맑은 공기가 떠돌고 있는 차 내부는 깨끗한 산소만이 존재하는 듯 정신을 뚜렷하게 만들었다. 몽글거리면서도 어딘가 단단한 차는 모든 사물과 사람을 통과해 지나쳤다. 통과할 때마다  꿀렁이는 차는 살아있는 액체 괴물 같았다.

매신이 오른쪽으로 손짓하자 차는 그대로 방향을 꺾었다.

"정말 이상해."

"뭐가?"

매신은 유리구슬과 윈드실드를 번갈아 보며 말했다.

"아까도 긴가민가하며 차를 꺼내긴 했지만, 역시 너는 차를 볼 수 있었어. 이 차는 육지 사람을 통과하잖아. 그러니까, 육지 사람은 차를 볼 수도 탈 수도 없이 그저 통과 뿐이야. 그런데 너는 왜 다른 걸까?"




한강면 청수리에 도착하고 차는 다시 작은 물방울이 되어 목걸이 안으로 들어갔다.

지금 시간은 오후 2시, 해가 지기까지는 앞으로 6시간이 남았다. 달조각은 낮에도 찾을 수 있지만, 반딧불이는 밤이 되기 전까지 달조각을 풀 숲 어딘가에 숨겨놓는다고 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밤에 쏟을 에너지를 비축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초승달을 찾던 그날처럼 풀 숲에 앉았다. 그리고 그대로 누워 잠들었다. 피곤한 것도 아닌데, 지친 것도 아닌데 희한하게도 풀 숲만 보면 잠이 쏟아졌다. 나른함을 주는 자연의 촉감은 언제나 눈을 감게 만들었다.


북적이는 사람들의 소리에 눈을 떴다. 어느덧 해는 모습을 감추고 달이 환하게 세상을 비추고 있었다. 달이 태양보다 더 눈부신 것 같았다. 먼저 깨어있던 매신은 내 손목을 잡고 수풀로 데려갔다.

"장소가 어디였는지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인적이 드문 곳이었어. 아마 이런 수풀 속이었을 거야."

매신의 말에도 나는 비몽사몽, 아직 잠에서 완전히 깨어나지 못했는지 눈앞엔 그저 늦은 밤에도 꺼지지 않은 건물 속 전등들이 일렁였다. 뚜렷하다가도 번지고, 흐리다가도 초점이 잡혔다. 눈을 비비고 다시 고개를 들자 이제야 반딧불이의 아름다운 빛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은 하늘에 날아다니기도 하고 풀에 앉아 자신만의 빛으로 자연을 누리기도 했다. 매신은 감흥 없어 보였지만 나는 입을 벌리고 두리번거렸다. 동화에 뛰어든 것 같았다. 환상적이고 경이로웠다. 매신은 그런 나를 보며 웃더니 풀 위로 카디건을 깔았다.

"잠깐 앉았다 갈까?"

"그렇지만 찾지 않으면-"

매신은 하늘을 바라보며 한 번 더 웃었다.

"내가 보고 싶어서 그래."


그렇게 나는 몇 분 동안을 눈도 깜빡이지 않고 반딧불이를 바라보았다. 매신은 나를 보고 있는 듯했지만 아무래도 반딧불이에 정신이 쏠려 바로 알아챌 순 없었다. 매신의 시선을 알아본 것은 그로부터 30분이 지난 후였다. 지켜보던 반딧불이 한 마리가 내 오른쪽을 향해 날아가 고개를 돌린 순간이었다. 밤공기를 담은 푸른 눈동자는 밤바다에 별이 떠오른 듯 반짝이고 있었다. 그의 눈에 떠오른 별은 연결된 시선을 타고 나에게로 넘어올 것 같았다. 그리고 이내 어진 우리의 별들이 별자리가 되어 신화를 만들 것 같았다. 어두운 밤, 둘만의 자리, 맞닿은 눈, 위험하다. 나는 서둘러 고개를 돌리 말했다.

"이, 이제 달조각을 찾으러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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