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사와 인권
나는 식사가 중요한 사람이다.
상차림도 중요하고 음식의 맛을 음미하는 것도 중요하다.
같이 식사를 하는 사람도 중요하고
그 사람과 식사를 하면서 나누는 얘기도 중요하다.
식사는 나에게 글을 쓰는 것만큼
마음에 차는 형식과 격식이 제대로 어우려져야 하는,
종합 예술이며 가장 애정하는 유희이기도 하다.
그런 식사시간이 아이를 낳으면서 세랭게티 초원의 하이에나가 할법한 생존을 위한 투쟁의 장이 되었다.
우는 애의 입을 어떻게든 막아야 하기에 식탁에서 가슴을 오픈하고 모유수유를 하면서, 안먹으면 죽을 것 같아 아무렇게나 인스턴트 음식으로 때우는 식사가 반복됐다.
애들이 몸은 스스로 가눌 정도로 컸어도, 우는 것으로 밖에 소통할 줄 모르는 애들을 데리고 내가 원하는 제대로 된 식사를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이 가까웠다.
말그대로 chaos의 향연.
아이들을 키우며 가장 즐거워야 할 식사 자리에서 번번이 처절하게 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이 무너진 경험은, 알게 모르게 내 안에 트라우마로 자리 잡았다.
아이들에게 식사 예절은 엄하게 가르쳤지만 웬만하면 겸상을 피한다.
당시 인간다운 식사가, 유희가 가능했던 식사는 애들 재우고야 가능했던 유니콘과의 야식타임 뿐이었다.
어쩌면 아이들이 어렸을 땐 그런 나를 주변도 이해했을 것이다.
고만고만한 애가 셋.
모유 수유하랴, 우는 아이 달래랴, 식탁 위는 전쟁터였으니까. 그러니 혼자 따로 밥을 먹겠다는 나의 선택이 ‘그럴 수 있지’는 공감은 자연스러운 결론.
하지만 아이는 큰다. 그리고 우리 애들도 컸다.
큰아이는 대학을 가고, 막내도 어느덧 9학년에 올라간다.
누구 하나 숟가락을 집어던질 일도, 파스타 그릇을 머리 위로 뒤집어 쓸 일도, 음식을 입에 넣다 말고 갑작스런 똥폭탄의 습격으로 기저귀를 급하게 갈러가야하는 일도 더이상 일어나지 않는다.
그 혼란의 식사씬은 이제 다시 일어날 일이 없다는 걸, 나도 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겸상이 싫다.
유니콘과 내 식사는 늘 따로 차린다.
가끔은 “좀 심한 거 아닐까”하는 유니콘의 우려를 짐짓 못들은 척 한다. 나도 아니까.
아이들과 함께했던 식사에서의 경험은
식탁을 마음을 나누는 공간이 아니라, 내가 존엄을 방어하는 전선으로 만들어버렸다.
아이들이 자란 만큼 나도 변했어야 했는데,
나는 여전히 “아이들과의 겸상”을 대할 때마다 그때의 그 “내 존엄의 위기” 속으로 되돌려 놓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