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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풍과 김밥

by 강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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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이 현장 체험학습을 간다. 도시락이 필요할 텐데 준비해 달라는 말이 없다. 알림장 어플을 보고 도시락과 비닐봉지, 물과 과자, 음료수가 필요하다는 걸 알았다. 체험학습이라 해 봐야 학교 밖 어딘가에 들러 견학을 하거나 단체 체험활동을 하는 것이 전부라 생각해서인지 아들이 심드렁하다. 친구들과 버스를 타고 학교 밖으로 나간다는 사실만으로도 설레기 마련인데 아들은 벌써 사춘기 훌쩍 지난 애늙은이 같다.

새벽 4시 알람에 일어나 제일 먼저 밥을 안친다. 압력솥에 물양을 평소보다 적게 잡고 고슬고슬한 밥을 짓는다. 오이를 채 썰어 소금에 절이고 당근을 볶고 계란 지단을 굽고 햄이랑 어묵을 간장에 졸여 김밥 속에 들어갈 재료들을 준비한다. 그러고 보니 내가 김밥을 싸기 시작한 지가 올해로 벌써 30년이 넘었다.


어렸을 적엔 소풍 전날 엄마 손을 잡고 시장 구경을 가고 동네 작은 슈퍼마켓에도 따라가는 재미가 있었다. 먹고 싶은 과자와 음료를 마음에 드는 걸로 골라도 그날은 무조건 사라는 허락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제일 신났다. 엄마는 새벽같이 일어나서 압력밥솥에 밥을 짓고 참기름 냄새 풍기며 김밥을 말았다. 소풍날만 되면 신기하게 눈이 일찍 떠져서 엄마 옆에 쪼그리고 앉아 김밥 싸는 걸 구경했다. 감히 햄에는 손을 대지 못하고 어묵만 하나씩 집어 먹었다. 엄마는 칼에 기름을 발라가며 김밥을 예쁘게 썰어 도시락통에 넣었다. 김밥이 줄줄이 통속에 들어가면 참기름을 바르고 깨소금을 뿌린 후 뚜껑을 닫았다. 엄마는 책가방보다 작고 가벼운 소풍 가방 바닥에 김밥이 담긴 도시락을 먼저 넣었다. 과자와 음료, 숟가락 통과 물통을 테트리스 쌓듯 가방에 채우고 혼자만 앉을만한 작은 돗자리와 카라멜과 껌, 여행용 휴지까지 빠트리지 않았다. 나와 동생은 학교 갈 시간이 한 시간은 더 남았는데도 옷을 챙겨 입고 모자까지 쓴 채 가방을 메고 주방과 안방을 분주하게 오가며 접시 위에 올려진 김밥을 맨손으로 집어 먹었다. 엄마가 새벽잠 줄여가며 김밥을 싸고 소풍 가방을 꾸려주시던 건 딱 초등학교 4학년 때까지였다.

5학년 때부턴 엄마가 없었다. 부모님이 이혼하고 난 후론 엄마를 만나지 못했다. 평생 김밥은 싸 본 적이 없다던 할머니를 대신해 김밥 싸는 법을 익혔다. 엄마와 함께 장을 보던 걸 기억해 흉내 냈다. 이래라저래라 가르쳐 주는 이도 없었고 유튜브나 인터넷도 없던 시절이었다. 엄마가 하던 것처럼 김밥을 말고 칼로 썰었다. 칼에 참기름을 바르고 썰어도 내가 싼 김밥은 좀체 썰리지 않았다. 질퍽하게 지은 밥이 문제였다. 으깨듯 썰어둔 김밥을 도시락통에 넣고 도시락을 가져갈까 말까, 아침마다 망설였다. 그러다 결국 소풍 가방 제일 아래 보기 싫다는 듯 도시락통을 툭하고 던져 넣었다. 소풍 가는 날이 되면 엄마가 평소보다 더 미웠다. 잊으려고 발버둥 치며 살다가 소풍 가는 날만 되면 잘 안 싸지는 김밥 때문에 엄마 얼굴이 떠올랐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애꿎은 김밥에다 짜증을 냈다. 참기름을 바르고 깨소금을 소복하게 뿌려도 엄마가 싼 김밥과는 너무 다른 김밥.

잠을 설치며 기다리던 소풍은 반갑지 않은 연례행사가 되었다. 가끔 내 것까지 싸 주더라며 가지고 온 친구 어머니의 김밥도 고맙지 않았다. 날 엄마 없는 불쌍한 아이로 여기는 것 같아 기분이 상했다. 고집스럽게 혼자 싼 김밥은 점심시간쯤 되면 통 안에서 뒤죽박죽이 되곤 했다. 보이지 않게 뒤 돌아앉은 채로 도시락 뚜껑을 열고 얼른 김밥을 꺼내 물었다. 어금니를 빠드득빠드득 갈며 김밥을 씹어 삼켰다. 목구멍 뒤로 비릿한 눈물이 함께 넘어갔다. 먹는 둥 마는 둥 서둘러 도시락을 정리하고 나면 늘 속이 더부룩했다.

어렸을 적, 도시락을 직접 쌀 때는 참 많이도 서러웠다. 새벽잠 아쉬운 것도 짜증 났고 엄마가 미운 마음이 들 때마다 김밥 싸는 소풍 따위는 없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런데 지금은 좀 달라졌다. 아들과 딸의 도시락을 싸기 위해 새벽에 일어나는 것은 하나도 성가시지 않으니 신기할 노릇이다. 참치가 좋을지 돈가스가 좋을지 고민하며 장을 본다. 깻잎이랑 오이도 넣을까 물으며 아이들 취향까지 챙긴다. 김밥용 밥은 고슬고슬하게 지어야 한다는 것쯤은 여러 번의 실패를 통해 익혔다. 밥에 참기름과 소금을 넣어 짜지도 싱겁지도 않게 간을 잘 맞추는 것이 김밥 맛의 비결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김밥 마는 발로 꼭꼭 눌러가며 단단하게 싸야만 김밥이 예쁘게 썰어진다는 것도 터득했다. 방울토마토와 체리, 키위, 씨 없는 포도, 오렌지 같은 과일도 종류별로 넣는다. 욕심을 부려 뚜껑이 안 닫힐 때까지 넣었다가 한두 개쯤 아쉬워하며 꺼낸다. 김밥 꽁지는 내가 먹고 아이들 아침밥 접시에는 예쁜 김밥만 올린다. 비린내 나지 않게 후추랑 파를 듬뿍 넣은 계란국까지 끓여 준비한다. 아이들 소풍날에 싸는 김밥에는 서러움이 묻어있지 않으니 감사할 따름이다.

자고있는 아들을 깨워 혹시 반에 도시락 못 싸 오는 친구는 없는지 묻는다. 아는지 모르는지 무심한 아들은 아마 없을 거라고 이야기한다. 친구 어머니의 도시락이 자존심 상했던 어릴 적 내가 떠올라, 이렇게 챙기는 게 오지랖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도시락 몇 개 더 챙겨주고 싶은 마음을 살짝 접어둔다.

별것 아닌 도시락.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똑같이 싸 주었던, 특별할 것 없는 도시락. 아들과 딸에게는 그것이 정말 별것 아닐 수 있기에 감사하다.

오늘은 욕심이 난다. 아들이 도시락에 담긴 엄마의 사랑을 알아볼 수 있기를. 소소하게 누리는 이 행복이 얼마나 큰 것인지 뼈저리게 알고 있는 나처럼, 아이들도 아주 평범한 매일에 감사하며, 즐겁게 보내면 좋겠다는 조바심을 부려본다.

사랑을 듬뿍 담은 도시락을 식탁 위에 준비해 두고 나는 오늘도 일찍 출근한다. 혹시나 필요할지 모를 용돈도 조금, 재미있게 잘 지내고 오라는 손 편지도 한 장 같이 넣어둔다. 나도 소풍 가는 마음으로 백팩을 메고 자전거로 출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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