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작스레 불어온 찬바람에 공기가 부쩍 싸늘해졌다. 아파트 화단 한쪽의 철쭉 덤불이 잎을 떨구고, 가지 사이로 앙상한 틈이 벌어졌다. 그 속에, 어미 고양이 한 마리가 보금자리를 만들기 시작한 것은 막 잎이 초록을 붉게 물들이기 시작할 때였다. 잎이 떨어지자 고양이 안식처가 훤히 드러나 보이기 시작했다. 길을 걷다 만난 미물에 마음을 쏟는 이가 나 말고도 또 있었는지, 어느 날부턴가 고양이가 드나들던 곳에 담요가 깔린 스티로폼 박스 하나가 놓여 있었다. 그 사이 세 마리 새끼를 낳은 어미 고양이는 제법 포근해 보이는 박스에도 불안한 듯 경계를 풀지 않고 있었다. 그러다 담요 위에 올라가 앉은 새끼들을 따라 어미 고양이도 그제야 박스 안으로 들어갔다.
새끼가 제법 자라자 덩치가 제일 큰 녀석이 수풀 밖으로 얼굴을 내밀기 시작했다. 어미는 날카롭게 하악질을 하며 새끼를 불러들였다. 녀석이 수풀 밖으로 한 발짝만 벗어나도 곧장 물고 돌아와 품에 안았다. 젖을 물리며 새끼를 챙기던 어미는 비쩍 말라 그야말로 가죽만 남아 있었다. 축 늘어진 젖과 앙상한 갈비뼈, 그 위로 매섭게 빛나는 눈빛이 대비를 이루었다. 먹을 것이 생기면 먼저 새끼 입으로 가져다주고, 남은 조각을 허겁지겁 삼키는 모습이 애처로웠다. 해가 짧아지고 바람이 매서워질수록 그 앙상한 몸이 눈에 밟혔다.
놀이터 나온 아이들이 쪼그리고 앉아 새끼 고양이를 구경했다. 작은 동물원을 보는 듯했다. 학교를 마친 초등학생들은 소시지와 육포를 들고 새끼 고양이를 유인했다. 처음엔 풀숲 안쪽에서 눈만 반짝이던 새끼들이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경계를 풀었다. 그제보다 어제, 어제보다 오늘, 손길 닿는 곳까지 기어 나오는 속도가 부쩍 빨라졌다. 한 아이가 소시지를 들고 어미 고양이 눈치만 살피고 있는데, 가장 덩치가 큰 새끼가 소시지를 재빨리 낚아채 달아났다. 아이들이 신기해하며 우르르 편의점으로 몰려가 소시지와 통조림 캔을 잔뜩 사 왔지만 그게 마지막이었다. 다음 날, 그 자리에 남아 있는 건 빈 스티로폼 박스와 담요뿐이었다.
고양이를 볼 때마다 아빠 생각이 났다. 어미 고양이 모습이 아빠와 겹쳐 보였다. 아빠는 혼자서 나와 동생을 키우며 남의 도움을 받지 않으려 애썼다. 사랑했던 사람에게서 받은 상처가 너무 깊어, 결국 아빠는 누구에게도 곁을 내주지 못한 채 날 선 삶을 사는 것 같았다. 피곤에 절어 피부도 거칠어지고 몸도 말라갔지만, 본인 챙길 겨를 없이 먹을 시간, 잘 시간 줄여 돈 버느라 고생했던 아빠였다. 젊은 시절부터 일흔이 된 지금까지 아빠를 버티게 하는 건 가장이라는 책임감인 듯했다. 우리를 남의 손에 맡겨 서러운 꼴 당하게 한 적 없었고, 남에게 폐 끼치지 않고 손가락질받지 않으려고 밤낮으로 일했다. 하고 싶은 것을 다 하고 살 수 없으니 참아야 한다고, 책임감 있고 성실하게 일해야 한다고 행동으로 본보기가 되어 주셨다. 이래라저래라 잔소리 한번 한 적 없었지만 삶 그 자체로 모범이 되는 내 인생의 롤모델이었다.
삼십 대 중반에 홀로 된 아빠는 재혼도, 연애도 생각 없다고 했다. 내가 이유를 묻자, 우리 남매가 시집, 장가 다 가서 손자, 손녀 볼 때까지는 결혼 생각이 없다며 무뚝뚝한 대꾸를 하는 게 다였다. 아빠의 대답에 서러움도 조금, 비장함도 조금 섞여 있었다는 걸 나는 엄마가 되고 나서야 뒤늦게 깨달았다.
혼자서 자식 둘을 기르느라 악착같이 벌고 악착같이 모으며 살았던 아빠. 그런 아빠를 원망한 적이 많다. 어릴 적에는 가족들과 식당에 나가 외식해 본 기억이 없었다. 길거리에 많고 많은 식당이 망하지 않고 장사가 잘되는 것이 이상하다고 느낄 정도였다. 여행 한 번 간 적도 없었다. 가족 여행이라는 단어는 드라마나 소설 속 이야기만 같았다. 학원에 다니고 싶었다. 친한 친구들이 학원 다니며 떡볶이 한 컵씩 나눠 먹을 때 나도 그 속에 끼어있고 싶었다.
“아빠가 나한테 해 준 게 뭔데?”
사춘기가 무르익었던 어느 밤, 늦게까지 일하고 돌아온 아빠에게 나는 해서는 안될 말까지 내뱉아 버렸다. 그래서일까? 아빠는 더 일하는 데 혈안이 되었다. 돈 버는 기계 같았다. 벌어서 모으기만 했고, 쓰는 법은 모르는 어딘지 약간 고장 난 기계. 기계도 가끔 멈춰 열을 식히고 기름칠을 해 주어야 하는데 아빠는 쉴 새 없이 엔진을 돌렸다. 어린 나는 그런 아빠가 미우면서도 고장이 나 버리지 않을까 자주 불안했다.
사랑한다는 말을 자주 들은 사람은 그 말을 할 때 어색해하지 않는다. 사랑을 받아본 사람은 억지로 애써 표현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사랑을 드러낸다. 그러나 아빠는 그 말을 들어본 적도, 해본 적도 없는 듯했다. 가끔은 마치 사랑이라는 단어 자체를 삶에서 지워버린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입학식이나 졸업식 날, 아빠와 사진 한 장 남기고 싶었지만 아빠는 그날도 일터에 계셨다. 운동회 날 가족들과 김밥을 나눠 먹고 싶었지만 그런 시간은 허락되지 않았다. 서럽고 속상했어도 그 마음을 드러내지 않고 꾹꾹 눌러 담았다. 내 마음을 꺼내는 순간, 아빠가 더 미안해할까 봐, 더 빨리 무너져 버릴까 봐 두려웠다.
게리 채프먼은 사랑의 언어를 ‘인정하는 말, 함께하는 시간, 선물, 봉사, 스킨십’ 다섯 가지로 분류한다. 아빠의 언어는 분명 ‘봉사’였다. 말도, 선물도, 스킨십도 부족했지만, 가족을 위해 힘든 일을 마다하지 않는 모습으로 사랑을 표현했던 아빠를, 나는 『사랑의 언어』를 읽으며 비로소 이해하게 되었다.
어쩌다 길에서 새끼 목덜미를 물고 가는 어미 고양이를 만나면 늘 아빠가 떠오른다. 어미가 배운 대로 새끼를 키우듯, 나도 아빠의 사랑법을 닮았다. 사랑은 애쓰는 것이고, 고생은 견뎌내는 것이라 믿으며 살았다. 닮지 않으려 애썼던 아빠의 모습마저 닮아 있었다. 그것이 현명한 사랑이 아님을 마흔이 넘어서야 깨달았다. 이제는 인정하는 말을 건네고, 함께 시간을 보내며, 마음을 담은 선물과 따뜻한 포옹으로 사랑을 표현하려 한다. 그러나 평생 봉사로만 사랑을 보여준 아빠는 여전히 다른 방식에는 서툴고, 그 모습에 마음이 먹먹해진다.
아빠를 유심히 지켜보며 자란 나는 언제나 스스로 해결했고, 갖고 싶은 것도, 원하는 것도 말하지 않았다. 가족뿐 아니라 세상 앞에서도 예의 바르고 눈치 빠른 사람으로 살았다. 행복을 찾기보다는 곁에 있는 이가 불편하지 않도록 행동했고, 어느새 나도 고장 난 기계 같은 사람이 되어 있었다. 사랑한다는 말은 입에 붙지 않았고, 그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늘 어색했다.
그러다 스무 살에 한 남자를 만나 사랑한다는 말을 배우고, 선물을 나누고, 시간을 함께하는 법을 알았다. 7년 연애 끝에 결혼해 16년째 살아가며, 이제는 ‘보통 사람들의 사랑법’에도 익숙해졌다. 아빠에게서 20년 동안 사랑을 배웠지만, 남편과의 23년 세월이 내게 새로운 사랑을 가르쳐 주었다. 마흔두 살의 나는 이제 제법 사랑다운 사랑을 할 수 있다.
이제는 아빠의 사랑에 나의 사랑을 보태고 싶다. 평생 나에게 베풀어온 아빠의 봉사를 조금이나마 되돌려드리며, 언젠가는 아빠의 입에서 “사랑한다.”는 말이 자연스레 흘러나오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