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5학년 여름, 남해로 야영 수련회를 간다는 계획에 조그마한 시골 마을 아이들이 단체로 들떴다. 그곳에 가면 실내 수영장도 있고, 이층침대도 있다고 했다. 수영복, 수경과 수영 모자까지. 내게 없는 것들을 준비해야 했다. 생전 처음 집을 떠나 하룻밤 자고 온다는 사실보다 수영복 준비할 걱정에 잠을 설쳤다. 야영 수련회 갈 때 입을 옷을 샀다는 은경이와 이모에게 용돈을 받았다는 호영이 이야기를 들으며 슬며시 복도로 빠져나왔다. 한숨 한 번 푹 내쉰 후 별것도 아닌 걸로 야단을 떠는 친구들을 철없는 아이 바라보듯 우두커니 쳐다보았다.
친구들 이야기에 끼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아직 수영복도 준비하지 못했고 용돈 한 푼 받지도 못했다. 한심하다는 듯 친구들을 바라보는 시선 속에 나의 결핍을 숨겼다. 그것이 내 자존심을 지키는 손쉽고도 간단한 방법이었다.
전기세 아끼겠다며 저녁 여덟 시면 온 집안의 불을 끄고, 나물 무칠 때도 참기름을 한 바퀴 이상 두른 적이 없었으며, 김치도 소금에 푹 절여 조금씩 아껴 먹을 수밖에 없는 요리를 하던 우리 할머니. 그녀는 사위들이 와도 씨암탉은커녕 찬물 한 대접조차 인심 좋게 내어준 적 없는 소문난 자린고비였다. 할머니 쌈지에서 돈이 한 푼이라도 나오는 일은 해가 서쪽에서 뜨는 것만큼 드문 일이었다. 할머니는 꼭 사야 할 물건이 있더라도 선뜻 돈을 내어주는 법이 없었다. 할머니에게서 준비물 살 돈이라도 얻으려면 한참 동안 잔소리를 들을 각오를 해야 했다. 평생 불편한 다리로 살아오신 데다 마흔에 할아버지와 사별한 뒤로 할머니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아끼는 것 말고는 없었을 거라 이해는 한다. 어린 자식들을 학교 대신 일자리로 내몰 수밖에 없었던 할머니였다. 그런 할머니가 돈에 인색할 수밖에 없었던 삶을 살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돈 때문에 서러울 때가 많았다. 우리 할머니는 해도 너무한 구두쇠였다.
일 년 내내 수련회를 다니는 것도 아닌데, 고작 하루 이틀. 그것도 몇 시간 입을 수영복을 사자고 할머니 쌈짓돈을 꺼내 달라고 했다가는 잔소리가 끝도 없이 쏟아질 게 뻔했다. 차마 말을 꺼내지 못한 채 하루이틀 시간이 흘러갔고, 그동안 내 속은 바싹 타들어 갔다. 빠듯한 살림살이를 알면서도 모른 척하는 철부지로 보일까 두려워, 나는 입술만 꾹 다문 채 뚱하게 삐쳐 있을 수밖에 없었다.
더듬더듬 글 읽는 것이 힘들었던 할머니와, 일하느라 바빠 얼굴 보기도 어려웠던 아빠는 예쁜 글씨로 또박또박 썼다고 칭찬받던 내 알림장을 끝내 제대로 읽어보지 않으셨다. 수련회 날이 며칠 앞으로 다가왔다. 수건, 세면도구, 갈아입을 옷쯤은 스스로도 챙길 수 있었다. 하지만 수영복만은 다른 문제였다. 돈을 주고 사지 않는 이상, 어디서 구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건 한 살 어린 내 동생도 마찬가지였다.
일요일, 성당에서 돌아오는 길에 버스를 기다리던 때였다. 동생이 아빠에게 수영복을 사 달라고 말했다. 귀가 어두운 걸 들키지 않으려고 낯선 사람 많은 곳은 피해 다니고, 모르는 사람과는 말조차 섞지 않던 아빠였지만, 동생 말을 들은 아빠는 큰맘 먹고 버스정류장 근처 옷 가게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까만 봉지 하나를 들고 나와 집으로 가는 버스에 오르고야 말았다.
그 봉지 안에는 달랑 동생 수영복 하나만 들어 있었다. 내 것은 없었다. 나도 수영복이 필요하다는 걸 아빠는 정말 모르는 걸까. 버스가 목적지에 가까워질수록, ‘수영복 가게 하나 없는 시골’ 동네에 다다를수록 마음이 점점 더 조급해졌다. 결국 나는 참고 참던 눈물을 터뜨리고야 말았다.
“나도 수영복 있어야 된다고! 아빠는 그것도 모르나? 태진이 꺼만 사 주고, 내 꺼는 왜 안 사주냐고?”
우리 집이 가난했으면 가난했지, 이런 것까지 말 못 하고 끙끙대야 한다는 서러움이, 동생과 같이 가는 나도 수영복이 필요할 거라는 계산을 못하는 아빠에 대한 원망이, 버스를 타고서야 터져 나왔다.
아빠는 머쓱한 얼굴로 미안하다는 말도 한마디 없이 버스에서 내려, 왔던 길을 다시 돌아갔다. 밤이 깊어서야 아빠가 집으로 들고 온 까만 봉지 안에는 촌스러운 꽃무늬 원피스 수영복이 같이 들어 있었다. 색깔도 무늬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내 몸에는 작아 어깨끈이 잔뜩 조이던 수영복. 그래도 다행이었다. 그날 버스에서 서럽게 울었던 덕에, 수영복을 준비물 가방에 챙겨 넣고는 걱정 없이 잠을 푹 잘 수 있었으니 말이다.
돈에 있어서는 인색했지만 나와 동생을 예뻐하신 것만은 틀림없었던 우리 할머니. 매일 밤 일찍 자야 한다는 할머니 옆에 이불을 턱까지 끌어올리고 누우면 할머니는 자주 늙으니 잠이 오지 않는다면서 우리가 잘 때까지 토닥토닥 등을 두드려주셨다. 자라고 하면서도 끝없이 이어지는 이야기는 듣고 또 들어도 지루하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할머니가 내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할 때면 나는 더 이야기해 달라고 밤새 조르곤 했다. 나는 맹랑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아이였단다. 강아지도, 송아지도 겁 없이 막 끌어안고, 주변에 보살펴 주는 어른이 없어도 먼 곳까지 맨발로 겁 없이 다녀오던 아이였단다. 생전 처음 보는 사람에게도 낯을 가리지 않았단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거침없이 다 하던 천방지축이었단다. 아무에게나 가서 이거 뭐야, 저거 뭐야 물어보고 나 하나 달라며 얻어오던 개구쟁이였단다.
그런데 열두 살 강혜진은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끙끙 앓으며 주변 눈치부터 본다. 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하지 못하고 한참 고민부터 한다. 할머니와 아빠의 주머니 사정을 먼저 살피고, 편치 않은 두 분의 몸을 먼저 걱정한다. 필요한 것이 많아질까 봐 새로운 건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학교를 마치고 친구들과 들렀다 가는 분식점을 접근 금지 구역이라 여긴다. 떡볶이 한 컵 사 먹을 용돈도 없는 것을 친구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아서다. 덕분에 친구들 사이에서는 자존심 세고 허튼짓하지 않는 모범생 이미지를 지킬 수 있었다. 그러나 실상은 결핍을 들키지 않으려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하느라 속이 시커먼 열두 살이었다.
어린아이에게는 부모와 가족이 든든한 백이 되어 주어야 하지만 열 두 살 되던 해에 내 뒤에 그런 백은 없다고 단정 지었다. 대신 가족을 보살피는 어른의 역할을 조금 앞당겨 하기로 결심했다. 갖고 싶은 것이 있어도, 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애써 외면하며 저런 것은 가질 가치도, 할 의미도 없다고 나를 달랬다. 어느새 열두 살의 나는 해 달라고 하는 것보다 해 줄 것이 없나 먼저 헤아리는 애어른이 되어 있었다. 내가 그렇게나 맹랑하고 거침 없었으며 천방지축 개구쟁이였던 때가 있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을 때 쯤, 나는 필요한 것이 있어도 애써 묻어버리는 열두 살, 도움이 필요할 만한 일도 혼자서 대충 해결해 버리는 것에 익숙한 열두 살이 되어 있었다.
고난이 축복이라는 말을 믿기까지는 긴 시간이 걸렸다. 마흔이 훌쩍 지나 돌아보니, 열두 살 그때가 힘들었지만 가장 크게 성장했던 시기였다. 응석을 부려야 할 나이에 일찍 철이 들어 공부에 매달렸고, 교대에 진학해 든든한 직장까지 얻게 되었으니 실패한 인생이라 하긴 어려운 삶을 살고 있다. 아빠와 할머니에게는 자랑스러운 딸이자 손녀였고, 주변에서도 인정받는 모범생으로 살았다. 경제적으로는 늘 빠듯했지만, ‘꽤 괜찮은 사람’이라는 정서적 만족을 품고 자란 시간이 지금의 나를 만든 것만은 분명하다.
그때의 결핍 덕분에 지금은 이혼 가정이나 조손 가정의 학생과 학부모를 상담할 때, 경험에서 우러난 조언을 건넬 수 있다. 오해 없이 대화하며 마음을 터놓을 수 있고, 비슷한 상처를 겪는 아이들을 먼저 알아보며 진심 어린 관심을 건넬 수 있음에 감사한다. 내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려주면 아이들의 눈빛과 태도가 달라지는 것을 느낄 때가 많다. 어쩌면 신은, 내가 이런 어른으로 자라도록 어린 날의 고통을 주신 게 아닐까. 이제는 지난 힘겨웠던 날들이 오히려 나를 지탱해 준 축복임을 깨닫고, 감사한 마음으로 잠드는 날이 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