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1학년, 가정환경 조사서를 보던 담임 선생님이 조용히 자습하던 나를 불러내셨다. 선생님은 한참 뜸을 들이다가 왜 엄마가 안 계시냐고 물으셨다. 반 친구들이 다 지켜보는 앞에서 말문이 막혀 꼼짝 못 하고 서 있었다. 터져 나온 눈물이 뺨을 타고 툭 떨어졌다. 누가 볼까 얼른 손등으로 훔쳐냈지만 쉽게 그칠 수 없었다. 누군가 명치를 꾹 누르는 것처럼 뻐근했다. 대답하려고 해도 목소리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눈물을 그치려 할수록 가슴이 조여왔다. 담임 선생님은 난처한 얼굴로 다음에 상담하자며 자리로 들어가라고 하셨다. 책상에 엎드려 한참 소리 없이 울었다. 몇 년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던 ‘엄마’라는 단어를 듣고 엄마를 그리워했던 만큼 오랫동안 울었다.
엄마는 스물세 살, 앳된 나이에 나를 낳았다. 이듬해엔 연년생 동생도 태어났다. 할머니께서 우리 남매를 돌봐주셨고 엄마는 새벽부터 해 질 때까지 꼬박 신발 공장에서 일했다. 나는 해 질 무렵이 되면 집 앞 골목에서 마을 어귀를 열두 번도 더 쳐다보며 엄마를 기다렸다. 그러다 길모퉁이에 엄마가 어른거리면 맨발로 달려가 엄마에게 안겼다. 종일 공장에서 일하다 온 엄마는 공장에서 받은 빵을 먹지 않고 가방에 넣어와서 나와 동생에게 반씩 나눠 주셨다. 이십 대 꽃같이 젊었던 엄마는 사랑한다는 말은 배운 적이 없는 사람 같았다. 매일 가방에 넣어온 간식으로 사랑한다는 말을 대신하던 사람이었다.
엄마는 대장부 같은 사람이었다. 목소리도 크고 웃음소리도 호탕했다. 골치 아픈 일도 과감하게 처리하고 힘들다는 내색따위는 하지 않으셨다. 초등학교 1학년, 엄마가 회사도 빠지고 공개수업을 보러 온 날, 수업 시간 도중에 교실 뒤로 살짝 들어오는 엄마를 보고 달려가 꼭 안았다. 당황한 엄마가 얼른 자리로 가서 앉으라고 했지만 나는 이 예쁜 사람이 우리 엄마인 걸 교실에 있는 다른 사람이 다 알고도 남을 만큼 한참을 매달려 있다가 자리로 돌아왔다. 그날이 내 학창 시절을 되짚어 가장 기분 좋은 날이었다.
아빠는 다섯 살에 중이염을 크게 앓은 적이 있다고 했다. 내 말을 되물을 때가 많았고 내 말에 대답하지 않을 때도 잦았다. 잘 들리지 않는 아빠였지만 초등학교 시절 공부를 곧잘 했다고 하셨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하는 아빠를 안타까워한 담임 선생님이 집까지 찾아와 중학교에 꼭 보내라 할 정도였다고 했다. 결국 아빠는 중학교를 졸업하지 못하셨다. 일찍 돌아가신 할아버지 대신 가장 역할을 선택했다 하셨다. 열네 살, 교복을 입고 중학교에 가는 대신 가위를 들고 양복 기술을 배웠다고 하셨다. 아빠가 엄마와 만나 결혼을 하고 양복점을 개업하자, 기성복이 쏟아지는 시대가 왔다. 결국 아빠는 진학도 포기하고 배운 기술을 제대로 발휘해 보지도 못하고 막노동을 시작하셨다.
보청기를 끼고도 잘 듣지 못하는 아빠를 위해 우리 가족은 늘 화가 난 것처럼 소리를 지르며 대화했다. 나긋나긋하고 다정한 말투는 어색할 정도였다. 똑똑하고 실력도 뛰어났던 아빠는 혼자 책 있는 시간을 즐기셨다. 아빠는 우리 남매를 사랑하는 마음을 어떻게 표현할지 몰라 늘 짓궂은 장난을 치곤 하셨다. 할아버지가 되어 내가 낳은 아이를 대하는 아빠를 보고 비로소 알게 되었다. 아빠의 장난이 사랑한다는 말 대신이었다는 것을.
세상에 태어나 행복하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우리 엄마, 아빠도 행복한 가정을 꿈꾸었을 것이 분명하다. 사랑받아 본 적이 없어 제대로 사랑을 표현할 줄 몰랐던 아빠. 자신의 꿈은 뒤로 미뤄두고 생계를 책임지는 것이 아빠의 사랑 표현법이었다. 알콩달콩 결혼 생활을 꿈꾸었을 엄마. 그녀에겐, 다정한 말도 못 하고 정이 담긴 선물 하나 건넬 줄 모르는 아빠의 사랑을 사랑으로 해석할 마음의 여유가 없었을 것이라 짐작만 해 본다.
엄마, 아빠는 내가 4학년이 되던 해에 헤어지셨다. 벌써 30년도 더 된 이야기다. 그 후로 나는 아빠와 할머니 밑에서 자랐다. 엄마는 그저 나쁜 사람이었다. 외가와 왕래를 끊고 친가 사람들 이야기만 들었으니 더 그렇게 생각했는지 모른다. 나의 뿌리인 엄마가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마음에 시퍼렇게 멍이 든 채 자랐다. 어른들은 나에게 엄마와 아빠의 이혼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지 않았다. 그저 더 이상 골목길에서 기다릴 대상이 없다는 것, 남몰래 챙겨온 간식을 나눠 줄 사람이 없어졌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했다. 가족과 생계를 먼저 챙겨야 했던 서른 살 언저리의 어린 엄마, 젊은 아빠가 선택한 이혼. 나에게는 그것이 말 못 할 아픔이었고 평생에 걸쳐 가슴 서늘하게 하는 상처였다.
나는 아빠를 쏙 빼닮았다. 붕어빵 틀에다 찍어낸 것처럼 닮았다. 아빠를 아는 사람들이 길을 잃고 울고 있는 나를 보게 된다면 틀림없이 아빠에게 데려다 줄 거라 할 정도로 나는 누가 봐도 아빠 딸같이 생겼다. 생김새만 닮은 것이 아니다. 사는 방식도 비슷하다. 사랑하지만 사랑한다는 표현이 서툴다는 것도, 꿈보다는 현실이 우선이라는 것도, 나에게 좋은 것보다 모두에게 좋은 것을 먼저 선택하는 삶의 태도도 판박이다.
나는 엄마도 쏙 빼다 놨다. 좋은 것이 생기면 다른 사람 먼저 챙겨주는 것이, 내 물건을 살 때엔 십 원짜리 하나까지 따져 보면서 가족을 챙길 때는 잇속 따지지 않고 한없이 많이 주고 싶어 하는 것이 닮았다. 아닌 건 아닌 줄 알아보는 분별력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싫은 소리 하지 않고 참을 줄 아는 모습도 복사, 붙여넣기 급이다.
남에게 아쉬운 소리 못 하고 살았다. 내 것 빌려주고도 돌려달라 소리 못해 답답한 적이 많았다. 싫어도 싫은 내색 못 하고 속으로 끙끙 앓던 미련한 곰이었다. 상대가 당황하지는 않을까, 날 나쁜 사람이라 손가락질하지 않을까, 사이가 껄끄러워지지 않을까 마음 졸이며 살았다. 그래서 사람들 눈에 튀지 않으려 했다. 힘들어도 내색하지 않고 견뎠다. 몸고생, 마음고생하는 것이 낫지 남의 입에 오르내리는 건 죽기보다 싫었다.
속은 새카맣게 타들어 갔지만 겉보기엔 착하고 순했던 강혜진. 그런데 어느 날, 더 이상 착하게만은 살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착한 사람 소리 듣는 것보다 아닌 건 아니라고, 싫은 건 싫다고 외치고 싶다는 마음이 불쑥 솟았다. 나는 그것도 참 아빠, 엄마를 빼닮았다.
상황에 맞춰 살아가던 엄마, 아빠가 누군가의 남편, 누군가의 아내가 아니라 각자의 이름으로 자기 인생을 선택한 것처럼, 나도 이제 조금은 이기적인 선택을 하며 살아가게 되었다. 아직 남은 날이 지나온 날보다 더 길 것이라 했던 어느 책의 한 글귀가 가슴에 사무친 어느날 밤이 시작이었다. 더 빨리 그렇게 했으면 좋았으련만. 후회만 하다가 더 늦어 버릴까 봐 나는 결심했다. 착하게만 살았던 과거를 버리고 조금 삐뚤어지기로. 그 첫 실행이 바로 “나 이제 설거지 안 해!” 파업 선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