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오후, 가족과 편안한 시간을 보내는데 학부모에게 전화가 왔다. 잠시 통화가 가능하냐는 말에 그렇다고 했더니 어머니께서는 평소에 하던 것처럼 넋두리를 늘어놓으신다. 공감 능력을 발휘해 추임새까지 넣어가며 응대했더니 통화가 30분 넘게 이어진다. 아이들이 옆에서 한참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어머니께 상황을 말씀드리지는 못했다. 얼마나 속이 상했으면 주말 저녁에 담임에게 전화를 하셨을까 어머니의 마음이 이해되었기 때문이다. 전화 통화를 끝내고 자리로 돌아오자 아이들과 하고 있던 보드게임은 이미 상황 종료. 지나치게 높은 공감 능력이 이럴 땐 문제를 일으킨다. 통화를 다 끝내고 나니 아이들의 마음에 공감이 돼 미안하다는 말을 연신 내뱉어 본다. 이미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끝난 후다. 아이들에게 미안함과 죄책감이 함께 몰려온다.
첫 아이를 낳고 육아휴직 중이던 어느 날, 학교에서 전화가 왔다. 학교평가 보고서를 써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지금은 그런 보고서를 따로 쓰지 않지만, 그 당시엔 그 보고서를 바탕으로 학교 성과급까지 정해지던 시절이었다. 원래 내가 맡고 있던 일이긴 했지만, 이미 학기가 바뀌어 다른 선생님에게 인수인계가 된 일이었다. 그런데도 교감 선생님은 난처한 상황이라며 보고서를 부탁하셨다. 젖먹이 아이를 돌보던 나는 그 부탁을 거절하지 못했다.
울고 보채는 아이를 잠시 눕혀 놓고, 발로 보행기를 살살 밀어가며 보고서를 썼다. 보고서에만 몰두하다 보니 가족들 끼니도 제대로 챙기지 못했고, 집 청소는 손도 못 댔다. 빨래는 산더미처럼 쌓였고 빨래 건조대엔 걷지 않은 빨래가 가득 걸려있었다. 설거지통에 물때가 끼고 쓰레기 통 주변에 초파리가 날아다녔다.
보고서를 메일로 보내고 나서 이틀 동안 늘어져 잤다. 우람한 아이를 업고 엉망이 된 집을 치우는 데 꼬박 일주일이 걸렸다. 다행히 보고서를 잘 작성해서 학교는 높은 평가를 받았다. 교감 선생님은 고맙다며 따로 전화를 주셨다. 그러나 남편의 서운한 눈빛을 받아내는 것도, 제대로 보살피지 못한 아이에게 느낀 미안함도 결국 나 혼자 감당해야 했다.
이런 일은 자주 있었다. 누군가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는 성격 탓에 늘 내 일보다는 다른 사람의 일을 먼저 해결해 주느라 정작 내 삶이 엉망이 되었던 적 말이다. 실속 없이 바쁘게만 살았다. 내 상황도 여의치 않았지만, 누군가 도와 달라고 말하면 모른 척이 안 됐다. 목표를 정하면 다른 건 안 보고 직진하는 남편 눈에는, 목표도 없고 남에게 휩쓸려 다니는 내가 늘 한심한 아내처럼 보였던 것 같다.
실컷 부탁해 놓고 고맙다는 말도 없이 모든 수고를 퉁 치는 사람도 있었다. 강혜진은 ‘만만하다’는 소문이 돌고 돌아 내 귀에까지 들어온 적도 있었다. 아주 가까운 사람들은 나를 ‘호구’라고 놀리기도 했다.
호구. 범의 아가리, 그러니까 호랑이의 입이라는 뜻을 가진 이 단어는 원래 바둑판에서 쓰이는 말이다. 상대방의 바둑돌이 둘러싸고 있는 공간에 나의 바둑돌을 놓으면 어김없이 내 바둑돌은 상대방에게 잡히게 된다. 이렇게 바둑돌을 놓으면 안 되는 위험한 자리를 ‘호구’라고 한다.
또 다른 뜻도 있다. 어수룩해서 이용하기 좋은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아마도 그 공간이 위태로운 곳인지 아닌지 판단하지도 못하고 발을 들여놓는 어리석은 사람을 호구라고 부르게 된 모양이다. 어수룩해서 이용당하기 쉬운 사람. 나는 경계심 없이 남이 만든 틀 안에 쉽게 발을 들여놓고 상대방에게 이용당하기 쉬운 사람이었다. 그러니 들을 땐 섭섭하고 화가 났지만 결국은 내 이런 성격 탓이겠거니 자포자기하기에 이르렀다.
지난 시간을 돌아보면 나는 싸워서 이기는 것보다 지는 쪽이 마음 편한 사람이었다. 철없을 땐 이기지도 못하는 거, 스스로를 ‘평화주의자’라 포장하기도 했다. 그런데 나이를 먹고 나니 좀 달라졌다. 이제는 누군가 나를 이용하려는 의도가 있다는 것쯤은 감지할 수 있는 상태가 된 것이다.
그러면 이제 호구에서 벗어났느냐고? 아니다. 그런데도 계속 호구처럼 살고 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이제는 호구처럼 이용당하면서도 마음이 편하다는 것이다. 마치 대학생 누나가 다섯 살짜리 동생 기를 살려 주려고 일부러 한 번 져 주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다. 내가 상대보다 더 힘이 강하고 마음의 여유가 있으며, 동시에 상대에 대한 애정까지 가지고 있다면 져 주는 것이 꽤 괜찮은 것처럼 느껴진다. 지면서도 이긴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져 주는 것이란 참 위대하고 숭고한 행위다. 그 안에는 희생과 배려, 애정과 관대함이 다 포함되어 있으니 말이다. 내가 호구인지도 모르고 당하면서 호구라는 말을 들을 때에는 억울하고 비참하고 원통한 느낌마저 들었다. 지금은 그런 마음 들 때가 드물다. 상대가 나를 이용하려는 것을 알면서도 그를 포용할 수 있는 넓은 마음으로 일부러 호구 잡혀 줄 때는 뿌듯함마저 느껴진다.
그래서 결심했다. 앞으로 내 목표는 ‘호구’가 되는 것이다. 그냥 그런 호구 말고 세계 최고의 호구. 이왕에 호구가 되어야겠다면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호구가 되고 싶다. “주여, 뜻대로 하소서!”하고 자기 목숨을 선뜻 내놓았던 그분처럼, 나라의 독립을 위해 아들을 내어 준 안중근의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처럼. 그렇게 큰 뜻을 품은 사람이 되고 싶다. 물론, 그분들처럼 위대한 희생자가 되기가 쉽지야 않겠지만, 목표는 클수록 좋은 법 아닌가?
호구인지도 모르고 살 땐 미안한 감정, 억울한 감정을 느끼는 날이 많았다. 나는 왜 단호하게 거절하지 못할까 자책하는 날이 많았다. 이제 자발적 호구를 지향하다 보니 내가 더 크고 깊은 사람, 진짜 어른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두고 봐라, 내가 전 우주에서 제일가는 호구가 될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