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3학년, 수능을 불과 몇 달 앞둔 어느 날이었다. 우리 교실은 본관 3층 맨 끝, 매점은 별관 1층에 있었다. 한창 허기질 나이의 우리가 매점에 들러 햄버거빵이라도 하나 사 먹기엔 쉬는 시간 10분은 짧아도 너무 짧았다. 간식 하나 사는 데 성공하려면 계단을 뛰어 내려가 줄을 서야 했다. 그나마 앞 차시 수업이 조금이라도 늦게 마치면 매점행은 아예 포기해야 했다. 간혹 줄만 서 있다가 빈손으로 돌아오는 경우도 있었다. 운이 좋아 쉬는 시간 끝나기 전에 과자 한 봉지 사는 데 성공이라도 하면 기쁨을 즐길 여유도 잠시, 다음 시간 출석 호명에 대답하기 위해서 죽을힘을 다해 다시 교실로 뛰어 올라가야만 했다.
그날, 쉬는 시간, 잠에 겨워 방석을 책상 위에 깔고 기대어 잠시 피곤을 달래는 내게 영민이가 슬며시 다가오더니 말했다.
“야, 빨리 일어나라. 매점 가자. 커피하고 빵 사 묵자.”
좀처럼 매점에는 가지 않는 나였지만 영민이 말에 커피나 한 캔 사 올까 하는 마음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날따라 닭고기인지 돼지고기인지 모를 퍽퍽한 패티가 들어있던 햄버거 빵도 당겼다. 엎드렸던 몸을 일으켜 영민이를 따라나섰다. 복도 신발장에서 운동화를 꺼내 검지와 중지에 걸었다. 그런데 그것이 문제였다.
“야, 지금 뭐 하는 짓이고?”
매점은 엄연히 실외. 신발을 갈아 신고 가겠다는 나를, 시간이 부족해 실내화를 신은 채로 뛰어갔다 와도 모자랄 판에 신발을 갈아 신겠다고 챙기는 나를, 영민이는 입까지 벌린 채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고 있었다.
아랑곳하지 않고 운동화를 챙기는 나를 설득하는 걸 포기한 영민이는 얼른 따라오라며 계단을 두 칸씩 뛰어 먼저 내려갔다. 다친다고 뛰지 말라며 뒤따랐지만, 내 발걸음은 잰걸음에 불과했다. 내가 1층 현관에 도착해서 신발을 갈아 신고 영민이를 쫓아가는 동안, 영민이는 벌써 매점에 도착해 저만치 앞에 줄을 서 있었다. 영민이가 손짓하며 말했다.
“야, 빨리 여기로 온나.”
그런데 그럴 수가 없었다. 그건 새치기였다. 그렇다고 친구의 부름을 외면하고 돌아설 수도 없었다. 멍청하게 선 채 어찌해야 할지 몰라 식은땀만 흘리고 있었다. 영민이가 겨우 햄버거빵 두 개를 사고 캔 커피도 하나 달라고 매점 이모에게 말하는 도중에 종이 울려버렸다. 교실로 돌아오는 길에도 나는 양반전에 나오는 허세 가득한 양반처럼 뛰지도 못하고, 저만치 먼저 뛰어가는 영민이를 따라 교실로 돌아왔다.
그날 이후, 영민이는 혜진이랑 매점 가면 인간도 아니라며 나를 놀려댔다. 장난이었지만, 듣기 편하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불편을 끼친 것도, 놀림거리가 된 것도 낯설고 신경 쓰였다. 융통성 없는 내가 답답했지만, 규칙을 어기는 건 스스로 용납이 안 됐다. 그날 매점 앞에서 나는 여러 기준을 모두 만족시킬 수 없는 나의 한계를 마주했다. 그리고 다시는 매점에 가지 않겠다고 속으로 다짐했다. 나는 분명 규칙을 잘 지키는 친구였지만 좋은 친구는 아니었다.
교사가 된 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친절한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 아이들 앞에서 밝은 얼굴과 온화한 미소로, 다정한 말을 건네는 선생님이 좋은 교사라 믿었다. 출근 첫날, 수업을 마치고 알림장에 적을 내용을 칠판에 썼다. 3학년이 되어 새 교실에서 수업한 소감을 일기로 써오라는 간단한 숙제였다.
그런데 다음 날, 숙제를 해 온 아이들이 절반도 되지 않았다. 규칙을 어기는 아이들이 이렇게나 많다는 것에 나는 적잖이 놀랐다. 숙제하지 않은 아이들에게는 책임을 물어야 마땅했다. 그러나 아이들을 엄하게 꾸짖는 나를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면 안 되는 줄 알았다. 아이들은 혼내는 선생님을 싫어할 거라는 걱정부터 앞섰다.
쉬는 시간, 숙제 안 해 온 아이들을 차례대로 한 명씩 내 책상 앞으로 불렀다. 둘만 들리게 조용히 숙제하지 못한 이유를 물었다. 가족 모임 때문에, 동생이 필기구를 숨겨서, 학원 숙제가 많아서, 그냥 깜빡해서... 저마다 다 그럴듯한 이유가 있었다. 첫 숙제 검사니 한 번쯤 눈감아 주자고 마음먹었다. 다음부터는 꼭 해 오라고 일러두었다.
하지만 그다음 날에는 숙제해 오지 않은 아이들이 곱절로 늘어났다. 아이들의 핑계는 더 발전했고, 나는 둘째 날에도 그럴 수 있겠다며 웃으며 넘어갔다. 그런 일이 몇 번 반복되다 보니 이젠 열심히 숙제해 오던 아이들마저 선생님은 숙제 안 해도 혼을 내지 않는다며 꾀를 내기 시작했다.
나의 친절을 이렇게 이용하다니. 아이들에게 실망한 나는 참다못해 폭발하고야 말았다. 친절한 선생님이 되는 건 그렇게 일주일도 안 돼 실패해 버리고 말았다. 화를 낸 마음이 불편해서 미안하다고 사과까지 했다. 그래도 숙제는 꼭 해 오라고 사정사정하기에 이르렀다.
“우리 선생님은 착해서 무섭게 못 한다.” 는 말이 교실 안팎에서 들렸다. 아예 대놓고 좀 무섭게 해 달라는 아이도 생겨났다. 숙제 내줘 봤자 풀어오지 않는 아이들이 많을 테니 되도록 숙제를 내주지 않으려고 했다. 그랬더니 이번엔 학부모들이 왜 우리 반은 숙제가 없냐는 불만을 전해 왔다.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제대로 아이들을 지도하지도, 단호하지도 않은 애매한 상태가 되어 버렸다. 분명 나는 친절한 선생님이었다. 그러나 좋은 선생님은 아니었다.
사람은 누구나 세상을 재는 저울을 갖고 산다. 어떤 이는 돈을 올려놓고, 또 어떤 이는 법과 질서를 저울추 삼는다. 권력이나 명예를 좇는 이도 있고, 평생 직업적 성취를 쌓아 올리는 이도 있다. 나는 오래도록 그 위에 ‘착한 사람’이라는 추를 얹고 살았다.
교직 20년 차가 된 지금은 안다. 착하다는 것이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 말이다. 때론 단호해야 하고, 때론 유연해야 한다. 착한 사람이 되려다가 깨지고 부딪친 끝에야 얻은 깨달음이다.
돌아보면, 매점 앞에서 우물쭈물하던 그날의 기억도, 초보 교사 시절의 좌절도 모두 값진 경험이었다. 그 덕분에 나는 상황에 따라 저울 위에 무엇을 올려놓아야 할지 깨닫게 되었다. 마흔을 넘긴 지금, 그래도 된다는 걸 알아서일까. 나이 들수록 사는 재미가 점점 커지는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