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 주하는 학교에서 시조창을 배운다. 스쿨버스를 타고 등교하면 교장실에서 레슨이 시작된다. 아침 독서 시간과 점심시간을 반납하고 시조창을 배우느라 열심이다. 시조창에 관심이 많은 교장 선생님께서 아이들에게 재능을 나누어 주시니 고마울 따름이다.
가을에는 진주에서 열린 개천 예술제 ‘전국 시조창 경연 대회’에도 나갔다. 한복을 차려입은 주하가 의젓하게 시조창 한 자락을 뽑았다. 무대를 내려오는 딸과 눈을 맞추며 싱긋 웃어 보였다. 긴장이 풀린 딸아이가 눈썹 끝을 축 늘어트리며 아쉬운 듯 허탈한 표정을 짓자, 괜찮다고 엉덩이를 토닥였다.
지켜보고 계시던 교장 선생님과 인솔해 주신 담당 선생님이 다가와 주하 어머니시냐고 먼저 말을 건네셨다. 내가 먼저 인사를 드렸어야 하는데 죄송스러웠다.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담아 인사드렸다. 담당 선생님은 아이를 참 잘 길렀다며 부럽다고 말씀하셨다. 주하를 잘 아는 눈치였다. 나는 알아서 큰 아이라고, 내가 잘한 건 없다고 말씀드렸다. 겸손이 아니라 진심이었다. 반성의 마음도 조금 섞인 말이었다. 집에서는 아무것도 못 하는 철부지, 짜증 잦고 자기중심적인 것처럼 보였던 딸이 학교에서는 반듯하게 잘하고 있구나 싶었다. 그런데 대견 마음과 함께, 왠지 모를 걱정도 스친다.
아이들은 부모를 닮은 듯 보이지만, 결국은 고유한 성품을 가진 존재다. 머리로는 알지만 마음은 다르게 움직일 때가 있다. 아빠 닮은 주원이와는 달리, 나 닮은 주하를 볼 때면 마음이 많이 쓰인다. 남의 눈을 의식해 반듯한 사람으로 보이려 노력하는 모습이 꼭 내 어릴 적 같다. 집 에선 한없이 짜증스러울 때가 많다. 과한 어리광을 부린다. 그러다가 신발을 신고 현관문 밖으로 나가는 순간, 표정도, 말투도, 눈빛도 변한다. 상냥하고 예의 바르며, 흐트러진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선생님들이 칭찬하는 건 어쩌면 그런 모습만 보셨기 때문일지 모른다.
칭찬받는 딸이 대견하고 고마울 때가 많지만, 동시에 그런 딸을 보는 게 안쓰럽다. 나는 그 무게를 잘 알기 때문이다. 본모습을 감추고 바짝 긴장하며 살아야 하는 힘겨움, 자기 검열로 숨 막히는 시간들. 학교와 사회에서 늘 스스로에게 잔소리하며 살아가는 아이의 속이 얼마나 불편할지 안다.
“참아.” “제대로 해.” “정신 차려.” “포기하지 마.” 스스로를 다그치며 팽팽한 상태를 유지하다가 집으로 돌아오면 그 긴장을 탁 풀고 자기의 본모습으로 돌아오는 것임을 안다.
주하에겐 집이 안심할 수 있는 공간인 듯하다. 그래서 주하의 짜증과 어리광은 웬만하면 받아주려 한다. 집에서만이라도 긴 호흡으로 몸과 마음을 이완하고 편하게 쉬었으면 해서다. 다시 에너지를 얻어서 현관문 밖으로 나가기 전까지 편안함을 충전하라고. 주하의 어리광에 싫은 소리 하지 않고 받아주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소극적인 배려다.
주원이가 훌쩍 커버려서 요즘은 주하와 단둘이 보내는 시간이 많다. 강아지와 산책을 하고, 도서관에 들러 표지가 예쁜 책을 고른다. 마음에 드는 옷을 고르고 분위기 좋은 카페에 가서 그림도 그린다. 참새가 방앗간을 드나들 듯 다이소에 들러 소소한 행복을 챙긴다. 천 원짜리 소품을 바구니에 담으면서 이야기해 준다. “엄마는 어릴 때 착하게 행동하라는 말, 남을 배려하라는 말에 속아서 나 자신은 배려하지 못했어. 그래서 힘들고 후회도 많아. 집에 와서도 충전이 안 될 때가 많았지. 착한 척 사는 게 제일 힘들더라. 나는 그렇게 착한 사람이 아닌 걸 너무 잘 알았거든. 너는 그러지 마.”
노파심 섞인 잔소리 뒤엔 꼭 덧붙인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은 자기 자신이라고.
친구가 찾아와 연필이 없어서 그러니 빌려 달라고 하면 어떻게 하겠냐고 딸에게 묻는다. 당연히 빌려주겠지. 딸이 웃으며 대답한다. 연필이 딱 한 자루밖에 없고 그걸 당장 사용해야 한다면 어떻게 할 거냐며 다시 질문한다. 딸이 머뭇거린다. 그대로 기다리면 빌려주겠다 말할 것 같아 얼른 선수 친다. 그럴 땐, 한 자루밖에 없으니 미안하지만 못 빌려주겠다고 이야기하라고. 그것이 나 자신을 무시하지 않고 대하는 행동이라고 설명한다. 항상 나 자신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라는 말은 아니다. 연필이 한 자루밖에 없지만, 너무 빌려주고 싶은 마음이라면, 그런 자신의 마음을 소중히 여겨 빌려주라는 말도 곁들인다. 자기 마음을 소중히 여기는 게 먼저라고 말해준다. 헷갈릴 법도 한데 찰떡같이 알아듣는 눈치다.
착하게 살라는 말을 곧이곧대로 들었다. 싸우면 안 되고, 욕하면 안 되고, 양보해야 하고, 갈등을 일으키는 건 손가락질받을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늘 하나밖에 없는 연필 한 자루를 남에게 양보하며 살았다. 싫어도 예스라고 했다. 갈등을 피하려고 내 것을 내어주었다. 하나 남은 연필을 내주며 살았다. 그게 착하게 사는 길이라 믿었다. 그런데 놓친 게 있었다. 내 목소리를 무시한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나는 무시한 채 다른 사람만 배려하며 살았다. 웃으며 남을 도왔지만 속으로는 울었다. 집에서는 쌓인 마음을 가족에게 쏟아내며 못되게 굴었다.
살다 보니 깨달았다. 착한 선택이 늘 마음처럼 쉽지 않다. 내 깊은 곳에서 ‘정말 내가 원하는 걸까?’ 하는 물음이 들려올 때가 있다. 그 목소리를 외면하고 괜찮은 사람처럼 보이려 했던 날들. 겉은 착해 보여도 속은 아니었던 나를, 나는 용납할 수 없었다. 그래서 착하게 살아도 삶이 좋아졌다는 기분이 들지 않았다.
그때 조금만 더 내 마음을 들여다봤더라면 좋았을 텐데. 지금의 나처럼, 그때의 나에게 누군가 “너부터 챙겨도 돼.” 알려주는 이가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아쉬움이 남는다.
늦었지만 이제는 안다. 진짜 착함은 내 마음을 버리지 않는 데서 시작된다. 주하는 나처럼 어리석은 선택을 하지 않기를 바란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은 자신이라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주하의 애쓰는 모습 뒤에 늘 든든하게 서서 말해주고 싶다.
“애쓰지 않아도 돼. 너부터 챙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