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설 유치원에 입학한 아들이 학습지 한 장을 가지고 와서 내밀었다.
“엄마랑 아빠가 좋아하는 게 뭔지 조사해 오래.”
학습지에는 엄마, 아빠가 좋아하는 것들을 묻는 질문이 잔뜩이다. 식탁에 앉아 볼펜을 집어 들고 학습지를 한참 들여다보았다. 아이 아빠가 좋아하는 것들이 무엇인지는 진작 다 써 놓았다. 그런데 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쉽게 쓸 수 없었다. 옆에서 빨리 써 달라고 재촉하는 아들을 앉혀두고 혼자서 한참 고민하며 쓰고 지우기를 반복했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도통 생각이 나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연필 끝을 잘근잘근 씹다가 결국 그날 밤 학습지의 빈칸을 다 채우지 못하고 잠자리에 누웠다.
이불을 덮고 누워 밤새 뒤척였다. 내가 좋아하는 음식, 좋아하는 노래, 여행하고 싶은 나라가 어디인지 스스로 묻고 골똘히 답을 찾았다. 그러다가 문득 깨닫게 되었다. 35년 살면서 나는 한 번도 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는 것을.
내 인생에 ‘나’는 없었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순간,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반듯이 누워 한참을 울었더니 눈물이 관자놀이를 타고 귀를 적셨다. 돌아누워도, 일어났다 다시 누워도 눈물이 그치지 않았다. 소리 없이 얼마나 울었던지 베개가 축축해졌다.
가난한 형편, 반찬 투정할 사정이 아니었다. 매일 먹는 김치찌개와 된장찌개에 어쩌다 한 번 고기 몇 점, 작은 참치 캔 하나라도 들어가면 별미라 생각하며 밥을 두 그릇씩 먹었다. 옷 한 벌 제대로 사 본 적이 없었다. 스타일을 생각하는 건 사치였고 그저 팔다리가 짧지 않은 옷이면 감사하며 입었다. 주어진 대로 받아들이며 살았던 나에게 취향이 있을 리 없었다. 그러니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따져 볼 여유도, 이유도 없었다.
아이들을 데리고 외식을 할 때면 어떤 메뉴든 상관없었다. 오늘은 뭘 먹으러 갈까 고민만 하고 있다가 메뉴 결정은 늘 아이들이 먹고 싶은 것이나 남편이 먹고 싶은 것으로 골랐다. 좋아하는 가수도, 노래도 없었다. 쫓기듯 살다 보니 노래 한 곡 들을 여유를 즐기지도 못했다. 죽기 전에 가보고 싶은 곳에 대해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오늘 하루를 아등바등 사느라 나의 미래에 대해 생각해 볼 겨를이 없었다.
아이의 학습지를 마주한 그날, 나는 내가 그동안 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염없이 눈물이 났던 것은 그동안 나조차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나 자신에 대한 미안함과 섭섭함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밤새 눈물이 그치지 않았던 것은 어쩌면 나 자신을 인생의 구석에 미뤄두고 살던 나를 알아차린 것에 대한 안도의 눈물이 더해졌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날 이후로 바뀌기로 했다.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하고 싶은 것’에 집중하기로. 형편에 맞춰 살아야만 했던 과거를 바꾸어야겠다는 용기를 내게 되었다. 그런데 어떻게 해야 할지 도통 알 수 없었다. 한참을 고민하다가 얼마 전 도서관에서 보았던 ‘그림책 상담’ 수강생 모집 안내 책자가 떠올랐다. 어렵사리 남편에게 말을 꺼냈다.
“여보, 나 수요일마다 도서관에서 하는 그림책 수업 가기로 했으니까 그날은 애들 좀 봐.”
부탁이 아니라 통보였다. 당신은 맨날 하고 싶은 거 하러 나가고 나는 일주일에 고작 한 번이니 그날은 애들을 알아서 보라며 그간 쌓였던 섭섭함을 담아 남편에게 퉁명스럽게 말했다. 남편도 내가 집을 비우는 걸 싫어하지 않을까 일부러 더 큰소리치며 화내듯 이야기했다. 남편은 쿨하게 다녀오라고 대답했다. 누가 주지도 않은 눈치를 스스로 보느라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생각도 못하며 살던 나에게 남편의 반응은 의외였다.
내가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비싸고 좋은 재료보다는 어렸을 적에 이웃집 밭에서 뽑아 먹던 마늘종 볶음을 제일 좋아한다는 것을 알았다. 요즘처럼 기름에 볶아 윤기 반들반들하도록 올리고당을 넣은 세련된 마늘종 볶음이 아니었다. 멸치 우린 물에다가 빨간 고춧가루 넣고 푹 익혀서 자글자글하게 끓인, 볶음이라기보단 찌개에 가까운 그 음식이 나의 최애 음식이었다. 좋아하는 노래를 찾기 위해 한동안 이 노래, 저 노래를 듣다가 플레이 리스트를 만들었다. 나는 아이유와 성시경 노래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예전엔 의미 없이 흘려들었던 노래 중 가사가 귀에 들어오고, 따라 부르면 눈물이 흐를 것만 같은 위로를 주는 노래도 몇 곡 찾았다. 여행하고 싶은 곳도 생겼다. 나중에 아이들이 다 자라면 함께 남미로 배낭여행을 가고 싶다는 생각에 여행 프로를 즐겨보게 되었다. 혼자서도 따뜻한 차를 마시고 책 읽는 시간을 즐기게 되었다. 가끔 사고 싶은 물건이 생기면 오래 고민하기보단 그냥 산다. 여태껏 가져본 적 없는 나 혼자만을 위한 물건을 통해 소소한 행복을 느끼게 되었다. 열심히 일하고 난 후에는 일부러 지갑을 열어 나를 위한 선물을 한다. 가끔은 책, 어떨 땐 예쁜 커피잔, 그럴듯해 보이는 원피스 한 벌. 내가 나를 축하하고 위로하며 산 물건에는 의미가 있어 소비하고 나서도 죄책감보다는 뿌듯한 마음이 든다.
처한 환경 탓에, 먼저 챙겨야 할 누군가가 있어서, 나만 행복하면 안 될 것 같아서, 내 목소리를 무시하며 살아왔다. 작은 일에도 쉽게 화가 나고, 이유 없이 섭섭했는데 그 이유조차 알지 못했다. 돌이켜보니 그것은 내가 나를 존중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깨닫는데 35년이나 걸렸다.
내 마음속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나를 챙기게 되자 세상을 향한 원망도, 섭섭함도, 분노도 슬며시 그 크기가 쪼그라드는 것 같다. 누군가의 딸로, 엄마로, 아내로, 며느리로. 나에게 주어진 역할에만 초점을 맞추고 내면의 소리를 무시하고 살고 있는 나에게, 이제는 나부터 먼저 챙기며 살아도 된다고 말해주고 싶다. 내 안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나를 챙기는 삶이야말로 지금껏 성실히 살아온 내 인생을 더 빛나게 하는 길임을 알게 되었으니. 내가 행복해야 그 행복이 흘러넘쳐 주변에도 따뜻하게 전해질 것이다. 그러니 이제는 주저하지 않고 나 자신에게 이렇게 말해주려 한다.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봐. 괜찮아, 그렇게 살아도 돼. 너는 그럴 자격이 충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