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은 학부모 상담을 준비하느라 마음이 바쁘다. 새로 만난 아이들의 성향과 고민을 3월 한 달 동안 제대로 파악해 메모해 두어야만 학부모 상담을 의미 있게 진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주로 고학년 담임을 선호하는 나는 사춘기 자녀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모르겠다며 도움을 호소하는 부모님들을 종종 만난다. 그리고 가끔은 댁의 자녀는 아직 사춘기가 오지 않았다며 걱정하는 학부모도 있다.
“우리 아들은 사춘기가 안 올 건가 봐요.” 하고 장담하는 부모님도 있고, “사춘기 치료제는 개발 안 되나요? 힘들어 죽겠어요.” 하며 우스갯소리에 고민을 슬쩍 담는 부모님도 있다. 사춘기는 와도 고민, 오지 않아도 고민이지만, 큰 갈등 없이 스리슬쩍 지나가길 바라는 마음은 모두 같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 얼굴에 여드름이 하나둘 돋으며 사춘기의 징후가 나타난다. 몸에만 변화가 생기는 것이 아니라 지적 능력과 심리 상태에도 급격한 변화가 일어난다. 자아 개념이 생기고, 자신의 존재와 인생에 대한 고민이 시작된다. 까칠하고 예민한 태도로 어른들의 권위에 도전하는 경우도 종종 생긴다.
그러나 나의 사춘기는 그리 요란하지 않았다. 그때의 나는 어른들의 권위에 도전하거나 반항할 여유가 없었다. 하루하루 살아내느라 인생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관심을 가질 힘이 없었다.
이혼한 아빠와 아픈 몸으로 손자들을 돌보는 할머니는 애증의 관계였다. 부부 간의 갈등보다 더 큰 갈등이 부모 자식 간의 갈등이라고 했던가. 팍팍한 인생살이의 어려움을 할머니에게 쏟아내는 아빠와, 혼자 아픈 마음을 삭이며 눈물만 흘리던 할머니를 보며 나는 나대로 살길을 찾아야 했다. 되짚어 보니, 아빠는 청소년기가 아니라 서른이 넘어서야 사춘기를 맞았던 것 같다.
진로에 대해 깊이 고민해 본 적이 없었다. 형편에 맞게, 성적에 맞게, 얼른 사회로 나가 자리 잡을 수 있도록 취업이 잘되는 대학을 선택하다 보니 교대로 진학했다. 교사에 대한 로망이 없지 않았지만, 스물네 살에 졸업과 동시에 평생 직장이 생기고, 게다가 국립대라 등록금도 저렴한 교대는 나에게 딱이었다. 그러니 수능 성적은 교대에 갈 정도면 충분했다.
점수가 높으니 인서울 대학에 원서나 넣어보자던 고3 담임 선생님의 권유를 넌지시 거절했던 이유는 사실 원서비가 부담스러워서였다. 가지도 않을 학교에 원서를 넣는 건 경제적 가치로 따지면 분명 사치이자 낭비였다.
그래서 교대 진학에 의미를 부여했다. 나처럼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을 만나면 누구보다 진심을 다해 도와주겠다는 각오를 다졌다. 결과적으로 내 인생에서 대학 입시 원서는 진주교대 한 장이 전부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임용시험도 한 번에 붙었다. 집 가까운 곳으로 발령받아 여전히 아빠와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스물일곱에 결혼해 스물아홉에 첫아이를 낳고, 서른하나에 둘째를 낳았다. 남들에게 손가락질받지 않을 정도로 직장생활도, 가정생활도 해 나갔다.
그런데 서른다섯, 뒤늦게 사춘기가 찾아왔다. 하루하루 쳇바퀴 돌 듯 출근하는 학교가 재미없어지기 시작했다. 퇴근하면 어린아이 둘을 뒤치다꺼리하며 보내는 시간이 힘들고 버거웠다. 물건을 다루는 일과 달리 아들, 딸을 다루는 일은 내 능력 밖이었다. 예측할 수도, 통제할 수도 없어 무기력해지기 시작했다.
집안일도 적성에 맞지 않았다. 돌아서면 어질러져 있고, 시간을 들여도 티 나지 않는 집안일은 가슴에 돌덩이를 얹어 놓은 듯했다. 좀처럼 내 뜻대로 풀리지 않는 삶. 나는 사춘기 청소년들처럼 불만 가득한 얼굴로 주변 사람들을 대했다. 까칠하게 굴었다. 지금의 삶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계속 이렇게 살아도 될까? 어떻게 살아야 하지?’
서른다섯이 되어서야 내 삶을 돌아보고 인생의 진로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마음이 잘 맞는 동료 선생님들과 함께 도서관 문화센터에서 진행하는 그림책 상담 프로그램에 등록했다. 그림책이어서 좋았고, 상담이라서 좋았다. 내가 좋아하는 두 가지가 함께 있는 프로그램이었으니 꼭 참여하고 싶었다.
아이들을 낳은 후 처음으로 혼자 외출하는 날이었다. 집에서 차로 50분은 족히 걸리는 거리였다. 수업 시간과 이동 시간을 합치면 어린아이들을 두고 4시간 이상 자리를 비워야 했다. 늘 주변 상황을 거스르지 않고 살던 나에게는 대단한 용기가 필요했다.
함께 프로그램에 참여했던 선생님들과는 학교에서 전문적 학습공동체(공통의 주제를 가지고 자율적으로 연구하는 동아리)를 운영하며 책을 써보자는 원대한 계획도 세웠다. 퇴근 후 자발적으로 남아 어떤 내용을 어떻게 구성할지 아이디어를 나누고 회의에 회의를 거듭했다. 비록 출간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그 이전부터 이미 내 마음속에는 ‘내 이름으로 된 책 한 권’을 갖겠다는 꿈이 자라나고 있었다. 뒤늦은 사춘기에 만난 나의 고민이 오늘의 나를 읽고 쓰게 한 씨앗이 되었다.
사춘기 청소년이 반항하듯, 일상을 흔들어 놓은 나의 예측 불가능한 행동과 까칠한 태도에 아이들도, 남편도 힘들었을 것이다. 가정은 뒷전이고, 다 늙어서 꿈을 찾겠다며 설쳐대는 나를 감당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얼마나 다행인가. 서른다섯, 늦은 나이였지만 내 꿈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도전할 수 있었던 그 소중한 시간이 나에게도 찾아왔다는 것이. 정말로 슬픈 인생은, 죽는 그 순간까지도 이런 경험 한 번 하지 못하는 인생이 아닐까.
돌이켜보면,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든 사춘기는 꼭 필요한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열다섯이든, 서른다섯이든, 혹은 그 이후든 말이다. 흔들리는 마음을 들여다보고 삶의 방향을 고민했던 그 시간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다.
늦게 찾아온 사춘기가 나를 다시 살아 있게 만들어 주었다. 이제는 안다. 흔들림은 나약함이 아니라, 다시 나를 찾아가는 시작이라는 것을. 언젠가 또 다른 사춘기가 온다 해도, 이번에는 반갑게 맞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때의 사춘기도 또 한 번, 나를 자라게 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