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은 자기애가 넘치는 사람이다. 남편의 카톡 프로필 사진에는 아내인 내 사진도, 아이들 사진도 한 장 없다. 자기 얼굴만 여러 장이다. 프로필이란 그 사람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이라 당연히 자기 얼굴이 들어가 있어야 한다는 남편의 말. 내가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데 살아있는 오늘, 당장 내가 원하는 것은 하고 살아야 한다는 남편의 삶의 방식은 프로필에 올라온 자기애 넘치는 사진과 무관하지 않다. 남편은 건강하게 늙고 싶다면서 테니스 클럽에 가입해 저녁마다 운동하러 다닌다. 가격이 꽤 나간다 싶을 정도의 자전거를 사서 사이클을 즐기곤 한다. 얼마 전에는 좋은 러닝화 한 켤레를 사서 틈날 때마다 달리기를 하고 있다. 시간과 돈을 들여 자기에게 투자하는 남편이 얄미울 때도 있다. 그러나 나와는 달리 자기 자신을 위해 현명한 소비를 할 줄 아는 남편이 부러울 때가 더 많다.
2015년, 2016년에 마산에 있는 우산초등학교에서 6학년 담임을 하며 연년생 형제를 가르친 적이 있었다. 늘 독서를 즐겨하던 형제를 남다른 교육철학으로 기르던 학부모와 인연이 되어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다. 아이들이 졸업한 후에도 친정 언니처럼 나를 챙기던 그 학부모를 옥이 언니라고 부르며 지금까지도 일 년에 서너 번 만나 서로의 근황을 묻고 지내고 있다. 성실히 일하고, 긍정적으로 사고하는 옥이 언니에게 자주 이런저런 조언을 구하기도 한다. 현명한 아내와 부모로 자녀들을 잘 기르는 옥이 언니. 언니가 일주일에 한 번은 아이들 다 두고 남편과 단둘이서만 외식을 한다며 부부의 데이트 이야기를 들려준 적이 있다. 아이들이 있을 땐 잘 먹지 못했던 맛있는 음식을 부부가 데이트하듯 먹으러 다닌다고 했다. 옥이 언니는 값을 더 치르더라도 옷감 좋은 옷을 사서 품격 있는 차림으로 다니라고 일러주었다. 일주일에 한 번은 자석 치료를 받으러 다니며 건강을 챙기는 옥이 언니를 보면서 참 멋지게 산다는 생각을 했다. 나도 저렇게 나이 들어가면 좋겠다는 바람을 갖게 되었다.
2020년 같은 학교에 발령받아 함께 일하던 부장님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멋쟁이셨다. 어쩜 그리 예쁜 단어만 골라 말하는지, 여자인 내가 봐도 반할 정도로 예쁜 선배였다. 하나 있는 아들을 다 키워 군대에 보내놓고 아침에는 수영, 틈날 때마다 요가와 필라테스를 하며 최근에는 저녁마다 한 시간이 넘게 달리기를 한다는 부장님을 보며 닮고 싶다는 마음이 불쑥 솟았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어떤 옷을 입어도 예뻐 보이는 부장님의 옷맵시를 감상하느라 출근길이 기다려질 때가 많았다. 함께 3년을 일하고 나란히 다른 학교로 발령받던 날, 부장님은 새 학교에 부임하는 날 입고 갈 예쁜 옷 한 벌 사러 가야겠다 하셨다.
“혜진이도 예쁜 옷 한 벌 사서 입고 새 학교 첫날 부임 인사 잘하고 와.”
건강을 위해 운동하는 시간을 꼭 챙기시는 부장님, 특별한 날에는 자기 자신에게도 선물할 줄 아는 부장님이 행복해 보였다.
살면서 선물 받아본 적이 몇 번 없다. 어린이날도 생일도, 크리스마스도. 나에게는 그저 그런 날이었다. 그래서인지 선물을 받아도 한껏 기뻐할 줄 몰랐었다. 너무 좋아하면 선물 주는 사람이 다음에 또 달라는 반응으로 받아들일까 봐, 이런 건 안 주셔도 된다는 말을 먼저 하곤 했었다.
하루하루 먹고사는 게 일상의 가장 큰 고민이었고, 절약하는 것이 가장 가치 있는 일이라 여겼던 집안 분위기. 덕분에 선물을 사서 주고받는 것은 우리 집에는 없는 문화였다. 내가 누린 유일한 사치라고는 책 사는 것 말고는 없었다. 남들 하는 만큼 배우지 못한 아빠와 할머니 덕분에 문제집 살 때, 책 살 때는 그나마 잔소리 듣지 않았다. 그런데 먹는다고, 입는다고 돈을 써야 한다 말하면 꼭 거절의 말을 들어야만 했다.
이제 돈 걱정 안 할 만큼 살고 있는데도 나를 위해 돈을 쓰는 것이 쉽지 않다. 그런데 아끼기만 하고 살던 친정 식구들만 보다가 자기가 꼭 하고 싶었던 일에 돈을 쓸 줄 알고, 건강 챙기는 일에 지갑을 열며, 자기 자신에게 선물을 할 줄 아는 사람들을 볼 때 저것은 사치라기보다는 행복을 위한 현명한 소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첫아이 낳기 전 대학원에 진학해 공부했던 시절이 있었다. 교양 과목으로 심리 상담 과목을 듣던 내게 교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잊히지 않는다.
“세상에는 자기에게 너무나 인색한 사람들이 많아요. 행복하려면 자기를 먼저 챙겨야 해요.”
나만을 위한 선물, 경치 좋은 곳에서 차 한잔 하는 여유.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는 즐거운 시간을 누리라고 하셨다. 그중 아무것도 해 본 적 없었던 나는 행복을 찾기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날 이후로 깊이 고민하기 시작했다.
통장에 돈이 없었던 적은 없었다. 그런데 없는 사람처럼 살았었다. 열심히 일해 돈을 버는 것만 목표로 두고 살았다. 그 돈을 오로지 나만을 위해서 쓰는 것이 머뭇거려졌다. 물건 하나 사는 건 계산만 하면 되는 것이니 돈만 있으면 가능하다. 그런데 내가 원하는 건 백화점에서 마음에 드는 물건을 사는 것처럼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것은 따로 있었다. 돈뿐만 아니라 시간까지 투자해야 했으니 실행하기가 더 망설여졌다. 그런데도 나는 내 인생 최고의 사치를 감행하기로 결심했다. 바로 책 쓰기 과정에 등록하기로 한 것이다. 한 번 등록하면 평생 재수강이 가능하다는 말에 돈을 지불할 용기가 생겼다. 결제만 한다고 끝이 아니었다. 매주 이틀은 시간을 내야 하니 평생 계속 시간을 투자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생각을 살짝 바꾸어 보면 상황을 달리 볼 힘이 생긴다 했던가. 매주 시간을 투자하는 것이 아니라 매주 혜택을 보게 된다고 바꾸어 생각하니 사치가 아니라 그야말로 현명한 선택이었다는 느낌이다.
특별한 날 누군가의 선물을 기다리지 않게 되었다. 누군가에게 받지 못해 서운해하거나, 그저 그런 하루라고 불평하는 대신 내가 나에게 줄 선물을 준비한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내가 내 삶을 사랑하고 아껴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히 행복한 인생 아니겠는가. 비싼 물건이 아니어도 좋다. 한 송이 꽃, 향이 좋은 커피 한 잔, 마음이 편안한 시간 한 토막. 내가 나를 기쁘게 할 줄 아는 사람으로 사는 일, 그것이야말로 어른이 되어 얻은 가장 큰 자유이자 행복이다. 돈의 많고 적음보다 중요한 것은 마음의 방향이다. 누군가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나답게 살기 위해 마음을 쓰는 일. 그 마음이 쌓여 내 안의 행복의 임계치를 채운다.
행복은 멀리 있지 않다. 나를 위한 작고 확실한 사치를 행복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그 마음가짐에 있다. 부러워만 보이던 남편과 멋지게 사는 옥이 언니, 행복해 보이던 선배 선생님처럼 나도 이제 나를 위한 사치를 당연하듯 누리며 살게 되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