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19일 남편이 중국 쑤저우 (소주시:苏州市)로 주재원 근무를 갔다. 거의 석 달만에 중국 노동절을 맞아 일주일 휴가를 왔다. 어버이날도 다가오고 홀로 계신친정어머니를 뵈러 강원도 정선으로 향했다. 정선은행정구역상으로는 정선군이지만 생활권은 영월군이다. 늘 장릉 근처에서 지인들을 만났지만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서 장릉을 둘러보는 것은 20년 만이다. 마치 20년 만의 방문을 환영하는 듯 하늘은 파랗고 소나무는 푸르렀으며 바람마저 시원했다.
억울하게 왕위에서 쫓겨난 비운의 국왕 단종(端宗).
어머니인 현덕왕후는 단종을 낳은 지 3일 만에 세상을 떠나고 아버지인 문종마저 37세에 일찍 세상을 떠났다. 1452년 12세의 어린 나이에 조선의 6대 국왕의 자리에 올랐으나 삼촌인 수양대군(세조)이 계유정난을 일으켜 왕이 된 지 2년 만인 1455년 상왕(현재의 왕보다 이전의 왕이 살아 있을 때 이전 왕을 부르는 호칭)으로 물러났다. 1456년 단종 복위 계획을 세웠으나 신하 김질의 밀고로 실패했다. 이때 처형되거나 자결한 신하를 사육신 (死六臣 : 박팽년·성삼문·이개·하위지·유성원·유응부)이라고 하고 세조 즉위 후 벼슬을 하지 않고 평생 단종을 모신 신하를 생육신(生六臣 : 김시습, 원호, 이맹전, 조려, 성담수, 남효온)이라고 한다.
조선왕릉 중 유일하게 강원도에 있는 장릉.
1457년 단종의 장인 송현수 등의 단종복위 도모를 이유로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등되고 강원도 영월로 유배를 가게 된다. 단종은 삼면은 강으로 둘러 쌓이고 남쪽은 절벽으로 막힌 청령포에서 귀양살이를 시작했지만 큰 홍수로 인해 읍내 관풍헌으로 거쳐를 옮겨 귀양살이를 이어 나갔다. 그러나 유배된 지 4개월 만에 결국 사약을 받고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단종의 시신을 거두는 사람에게는 큰 벌이 내려질 수 있어 아무도 나서지 못했으나 영월의 하급 관리였던 엄홍도가 위험을 무릅쓰고 강변에 버려진 단종의 시신을 거두어 산자락에 묻었다. 1698년 숙종 때 왕으로 복위되면서 '단종'이라 부르게 되었고 능의 이름을 '장릉'으로 했다. 이런 엄홍도의 충절을 후세에 알리기 위해 영조 2년 엄홍도정여각을 세웠다. 장릉 말고도 40기의 조선왕릉이 그 의미를 인정받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조선왕릉은 서울, 경기지역에 대부분 조성되어 있지만 장릉만이 유일하게 강원특별자치도 영월에 있다.
<엄홍도정여각 앞에서 설명을 읽고 있는 남편 뒷모습>
단종을 지키는 소나무 호위무사들.
장릉에는 유난히 소나무가 많다. 단종의 왕비인 정순왕후 송 씨의 무덤이 있는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사릉에서 옮겨 심은 정령송(精靈松)을 비롯해 많은 소나무가 주위를 둘러싸고 있다. 장릉 주위의 소나무들은 특이한 모습을 하고 있다. 어찌 보면 단종의 죽음을 슬퍼하며 능을 향해 절을 하듯 굽어 있는 듯 보이기도 하고 어찌 보면 능을 감싸 안아 보호하는 모습 같기도 하다. 능으로 가는 길도 소나무 숲을 지나야 하지만 능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장릉 전체를 소나무가 감싸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 모습이 너무나 푸근해 보여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단종의 넋이 조금이나마 위로되길 마음속으로 빌어 보았다.
<단종 능에서 내려다본 장릉 풍경>
잠시 휴식을 마치고 다시 친정으로 출발.
단종의 능에서 참배를 마치고 내려와 소나무 그늘에 앉아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땀을 식혔다. 장릉은 어릴 적 소풍 단골 장소였다. 넓은 잔디밭과 소나무가 많이 심어져 있어 소나무 그늘아래 돗자리를 펴고 도시락을 먹으며 쉴 수도 있고 벤치도 많이 있어 조용히 산책을 하거나 쉬어 가기에 좋은 장소이다. 매년 4월이면 단종과 충신들의 넋을 기리는 축제이자 영월의 대표적인 문화제인 '단종문화제'가 열린다. 단종국장, 단종제향, 정순왕후 선발대회, 칡 줄 다리기와 다양한 체험행사와 공연 등을 즐길 수 있다.
영월 시내 꽃집에 들러 아들이 본인 용돈으로 외할머니께 드린다고 카네이션 꽃바구니를 샀다. 엄마는 선물보다 꽃을 더 좋아하신다. 오랜만에 찾아가는 딸과 사위, 손자를 보고 좋아하실 엄마 얼굴을 떠올리며 친정으로 출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