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부> 그래, 진정한 인생은 후반전부터
‘합법적 백수’인 내가 요즘 삼시 세끼 챙겨 먹는 것 이외에 늘 마음이 쏠려 있는 곳 하나가 있다.
특별히 해야 할 일이 없을 때도 문득, 길을 걷다가도 문득, TV를 보다가도 문득, 뒹굴뒹굴 누워 있다가도 문득… 항상 노트북을 켜고 싶은 충동에 휩싸인다. 무언가 '적을 거리'가 떠 올랐기 때문이다.
그렇다. 요즘 내가 꽂혀 있는 그것은 바로 ‘글쓰기’이다.
몇 달 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한 ‘글쓰기’의 매력에 최근 푹 빠져 있다.
‘썼다 지웠다…’
故 김광석의 명곡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에서 “… 하얗게 밝아 온 유리창에 썼다 지운다 널 사랑해…”
내가 좋아하는 구절이다. 그런데, 내가 요즘 글이란 걸 써 보면서 가장 많이 하는 행동이고, 화려하고 아름답진 않지만, 작고 소담한 창조물을 만들어 내기 위해 내가 ‘작은 몸부림’ 치는 행위이다. 할수록 매력 있는 행위이다.
사실 나는 학창 시절부터 크게 글쓰기에 흥미를 가졌던 적은 없었다. 아주 형편없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썩 잘 쓰는 글 솜씨를 가진 것도 아니었던 것 같다. 뭐라고 할까? 그냥 평범한 학생이 무난하게 ‘글짓기’ 하고, 가끔 교내 ‘장려상’ 정도 타는 수준이라고 할까? 내가 어릴 때는 ‘글짓기’라는 표현을 많이 썼던 것 같다. 지금은 물론 다른 표현을 쓰겠지만…
대학을 다니고, 회사를 다니면서 쓴 ‘글’이라고는 ‘리포트’나 ‘문서’, ‘보고서’ 정도 밖에는 없었다. 소위 진정한 ‘글’이라고 하는 것을 진지하게 써 본 적은 없었던 것 같다.
한 때 유행 했었고, 나도 푹 빠져 무지하게 노력했던 개념 하나…’MECE (Mutually Exclusive Collectively Exhaustive, 상호배제와 전체포괄)’ 정도가 기억날 뿐이다.
이 개념은 간단히 말해 “논리 전개가 상호 중복됨이 없어야 하는 동시에, 전체적으로 누락됨이 없어야 한다.”는 것으로 컨설팅으로 유명한 맥킨지에서 소개하고, 유행시켰던 개념이다. 그 시절 우리는 ‘보고서’ 작성을 위해 수 없이 많은 ‘결혼한 여인, 미씨’를 외쳐대곤 했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퇴직 후 갑자기 ‘글을 쓰고 싶다’는 욕망이 솟구쳐 올랐다.
솔직히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추측해 보자면 오랜 직장생활 동안 마음속에 쌓아 놓은 ‘퇴적물’들이 너무 많아 이 ‘퇴적물’들을 ‘나’를 벗어난 바깥세상에다 쏟아 내고 싶은 욕구가 ‘글을 쓰고 싶다’라는 자극으로 치환된 것이 아닌가 싶다.
막상 글을 써보려 하니 기본적으로 아는 지식이 너무나도 빈약해서 우선 글을 쓰는 것과 관련한 책들을 구입하여 탐독하였다. 다들 나름의 우연한 계기, 훌륭한 의미, 각고의 노력 등을 제시하고 계셨는데, 몇 가지 내 마음에 와닿는 포인트를 발견할 수 있었다.
첫째, 내가 쓰고자 하는 글은 글의 분류상 소위 ‘수필’이나 ‘에세이’에 가까운 것이라는 점이다.
나의 생각을 다양한 기법과 방법으로 표현해 낼 수 있겠지만, 초보자이고, 그냥 우선 내 마음에 있는 것들을 있는 그대로 쏟아 내고 싶다는 것이 지금 내가 가진 욕구이기 때문에 ‘수필’이나 ‘에세이’로 시작하는 게 맞는 것 같았다.
일본의 유명 광고회사 카피라이터에서 작가로 전환한 다나카 히로노부는 ‘수필/에세이’를 “사상(事象)과 심상(心象)이 교차하는 곳에 생긴 문장”이라 정의하였다. 참 맛깔스러운 정의인 것 같다. 또한, 그는 “자기가 쓰고 싶은 것을 쓰면 된다.”라고 하는 상당히 파격의 조언을 들려주고 있어 초보자인 나에게 큰 힘을 주었던 것 같다.
둘째, 너무 주저하지 말고 우선 시작하라는 것이다.
나는 처음에 그렇게 생각했었다. 혹시라도 나 이외에 누군가 한 명, 설령 아내라 하더라도, 내 글을 보게 된다면 내 글이 최소한의 예의가 있어야 되지 않을까? 그래서 무언가 기본적인 것은 학습을 하고 글을 써야 되는 게 도리가 아닐까?라고… 그런데, 많은 분들이 너무 고민만 하지 말고 우선 시작해 보라 하는 공통적 의견을 제시하고 있어, 마침내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것 같다.
셋째, 많은 분들이 한결같이 ‘글쓰기’는 “인생을 바꾸는 힘을 가지고 있다.”라고 하였다. 실제 그들도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직업’이나 ‘신분’도 바뀌었고, 생활 전반은 물론, 사상이나 가치관, 인생관도 바뀌었다고 하였다.
솔직히 시작하는 지금은 잘 모르겠다. 이 말의 정확한 의미를… 실제 나에게도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인지도…하지만 이 말은 내가 앞으로 지치지 않고 ‘글쓰기’를 해 나가는 데 있어 큰 힘이 될 것이라는 것을 믿는다.
‘글을 쓴다는 것'…
막상 시작해 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열 배는 어려운 작업인 것 같다. 머릿속에서는 제법 지적(知的)이고, 체계적이고, 세련되게 정리된 듯 한 내용을 내가 아는 ‘어휘’의 범위에서 ‘글’로 표현해 보면 그 느낌이나 맛을 전혀 느낄 수가 없다. 끊임없는 갈증에 시달리는 것이다. ‘썼다 지웠다…’의 무한 반복, 영원한 ‘뫼비우스의 띠’와 같은 작업이다.
하지만, 나의 생각이 눈앞에 ‘활자’로 정리되는 모습을 보는 것만큼 ‘희열’을 느끼는 일도 없을 것 같다. 다나카 히로노부는 ‘내’가 바로 ‘제1의 독자’라 했던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글을 쓴다는 것’…
물질적으로는 크게 사치스럽지 않으면서도, 정신적으로는 충분히 사치스럽고 풍요한 멋진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