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살 여름
대학교 1학년 여름방학 때였다.
내 남자친구는 당시 군인이라 여름, 겨울이면 긴 훈련에 들어갔다.
눈치 볼 사람도 없는 피 끓는 스무 살은 친구들과 늦은 시간까지 놀기 일쑤였고, 방학 내내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숙취를 잠으로 달래는 날이 대부분이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던 그날.. 매미가 울어대는 소리에 간신히 눈을 떴지만 만사가 귀찮아 멍하니 누워있었다.
중학생인 동생은 아침부터 학원에 갔을 것이고,
할머니는 경로당에, 엄마는 운동을 가셨을 때라 조용해야 할 시간이었다.
어젯밤 무슨 일이 있었더라...
친구 S양과 어젯밤 신나게 놀았던 수다를 떨어야 하는데.. 아직 일어나지 않았겠지?
남자친구 편지를 배달해 주시는 우체국 아저씨가 오실 시간도 아직 멀었다.. 조금 더 잘까, 말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휴대폰을 만지작 대고 있었다.
그 무렵 밖에서는 새아빠가 통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응??...
이상했다.
새아빠는 누군가와 그렇게 자상하게 오래 전화기를 들고 있는 분이 아니었다. 적어도 내가 알기엔..
완벽한 경상도 사나이. 게다가 같은 말도 비꼬듯 하기 일쑤여서 듣는 사람 기분을 상하게 하는 기묘한 대화수법을 가진 분이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이 시간 때쯤.. 내가 잠에서 깰락 말락 하는 비슷한 시간 때에 누군가와 매일 조곤조곤 통화를 하는 것이었다.
더 의아하게 생각했던 건 새아빠와는 어울리지 않는 그 다정한 말투 때문이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 어색한 통화를 잠결에 듣기 시작한 지 한 달 정도 된 것 같았다.
왜 이제야 알아챈 걸까?
여전히 자는 척을 해야 그 대화내용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아서 화장실도 꾹 참고 숨죽여 온 힘을 두 귀에 집중했지만, 내 방문이 굳게 닫혀있어 어떤 내용인지 정확히 들리지 않았다.
단지 알아챌 수 있는 건 부모님 방과 거실을 오가며 통화를 하는 것을 보니 무선 전화기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 그 상대가 여자라는 확신, 처음 들어보는 새아빠의 낯간지러운 웃음뿐이었다.
전화가 끊긴 듯했고, 새아빠가 밖으로 나가시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나는 방에서 잽싸게 나와서 무선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요즘 사람들은 모를 수도 있겠지만, 집집마다 전화기가 있던 당시 우리 집엔 무선+유선 통합 전화기가 있었다. 무선전화기로 내가 상대에게 전화를 걸었을 경우 [재다이얼]이라는 버튼을 누르면, 수화기 안쪽 아날로그 숫자판에 방금 전 걸었던 전화번호가 표시되도록 되어 있었다. 반대로 전화를 받은 경우라면 깜깜이 모르는 수밖에 없다. 걸려오는 전화번호가 뭔지 알턱이 없던 시기이니...
새아빠가 만약 전화를 걸었던 거라면 그 전화번호를 확인해야만 했다.
무슨 중범죄라도 저지르는 듯 무선전화기를 들고, 아무도 없는 집인걸 알면서도 주위를 살폈다.
버튼을 누르려는 손끝이 떨리고 심장이 뛰었다.
몇 초간 심호흡을 하고 [재다이얼] 버튼을 눌렀다.
숫자가 보였다.
02-4**-****
무슨 번호일지, 그게 새아빠와 무슨 상관이 있을지는 나중 문제였다.
그저 마음이 급했다.
빨리 볼펜과 종이를 찾아야 했다.
다급히 동생방으로 뛰어 들어갔더니 피아노 위에 올려져 있는 악보가 눈에 들어왔다.
악보 모퉁이 빈 공간에 떨리는 손으로 그 전화번호를 옮겨 적었다.
혹시 번호를 잘못 적었을까 서너 번 확인을 거치고 나서, 누가 볼세라 그 악보를 다른 피아노책들 사이에 안 보이도록 끼워놓고 다시 숨 고르기를 했다.
아닐 수도 있잖아. 가족 중 누군가가 걸었던 번호 일수도 있고.
그 전화번호는 그로부터 얼마간 나만 아는 비밀의 악보에 숨겨져 있었다.
함부로 엄마와 새아빠 사이를 이간질하게 될까 봐 두려웠다.
확실히 하기 위해 다음에 또 이런 통화가 있을 때 반드시 번호를 또 확인해 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비밀의 악보는 완벽한 장소였다.
동생이 몇 년 동안 묵혀놓아 먼지만 수두룩한 피아노를 갑자기 치겠다고 하는 일은 없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