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아빠
새아빠는 내게 두 번째 아빠였다.
엄마는 내가 초등학교 입학 전 이혼을 하셨고, 외할머니, 동생과 네 식구가 살던 집에 새아빠가 들어와 살며 다섯 식구가 되었다.
법적으로 엄마의 남편이나 나의 아빠는 아니었다. 엄마와 14년째 함께 사는 사실혼 관계였다.
나의 친아빠를 떠올리면 세네 살 즈음의 한 가지 기억밖에 없었다.
드라마에서 자주 보듯이 아빠와 손을 잡고 다른 한 손엔 알록달록한 풍선을 들고 놀이공원을 가거나 외식을 했던 기억이면 좋겠지만,
내가 기억하는 건 외할머니가 소리를 지르고 내가 목놓아 울고 있다 보면 동네 사람들이 전부 우리 집으로 뛰어와 엄마를 두들겨 패는 친아빠를 뜯어말리던 장면뿐이었다. 친아빠는 나의 외할머니 그러니까 장모가 보는 앞에서 엄마를 혼절할 때까지 때렸다. 그 기억이 다였다.
새아빠는 같이 살게 되면서 본인을 '아빠'라고 불러달라고 했지만, 나는 초등학교 졸업 때까지 '아저씨'라 불렀다. 그리고는 미국에 갔다는 친아빠에게 매일 편지를 썼다. 이혼이라는 것을 몰랐던 나는 새로 이사 간 집을 친아빠가 몰라서 찾아오지 못할까 봐 노심초사하며 늘 편지의 말미에 또박또박 집주소를 정확히 적었다.
내가 편지를 쓰면 외할머니가 부쳐주시겠노라 했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친아빠에게 보내지기는커녕 아무에게도 닿지 못하는 어린아이의 편지는 외할머니의 눈물유발만 하고 난 뒤 어디론가 사라질 뿐이었다.
자라는 동안 새아빠는 나에게 정말 잘해주셨다.
갖고 싶은 게 있으면 엄마 몰래 뭐든지 사주셨고 동생보다 나를 더 예뻐하셨다.
그런데 아무리 잘해줘도 다른 사람에게 아빠라고 부르는 것이 영 쉽지가 않았고 , 새아빠에게는 남에게 말할 수 없는 극도로 싫은 면이 있었다.
나는 그런 이유로 방황하는 청소년기를 보냈고 내가 삐뚤어진걸 모두 새아빠 탓으로 돌렸다.
내 마음을 몰라주고 나보다 새아빠를 더 생각하는 것 같은 엄마도 같이 미웠다.
그러다 청소년기의 사악함이 서서히 사그라드는 나이가 왔고
그냥 적당히 공부해서 그저 그런 대학에 들어갔고
대학생이 되고 나서 남자친구도 생기면서 오직 '나' 만을 위한 시간이 많아졌다.
가족에게서 관심이 점점 멀어졌다. 아니, 일부러 성인이 된 걸 핑계로 가족의 일원이 아닌 양 행동을 했다.
오히려 가족에게서 적당한 거리가 생기면서 자연스럽게 새아빠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여섯 살부터 같이 살았던 새아빠는 스무 살 쯤이 되어서야 비로소 나에게 진짜 아빠가 되었다.
어처구니없게도 새아빠의 바람을 눈치챈 건 바로 나였다.
그날 이후로 나는 자는 척을 하며 방에서 숨죽이고 있다가 새아빠가 나가시기가 무섭게 무선 전화기부터 확인하기 시작했다.
세 번, 네 번.. 같은 번호임을 확인하고 확신을 했다.
이제 엄마에게 알리는 일만 남았다.
혹시 내가 오해해서 그 불똥이 나에게 튀면 어떻게 하나 하는 생각은 없어진 지 오래였다.
어느 날 엄마와 단둘이 있게 되는 타이밍이 찾아왔다.
어색하게 쇼파 주위를 빙빙 돌면서 뜸을 들이다가 엄마 옆으로 다가가 앉은 뒤 조심스럽게 얘기를 꺼냈다.
"엄마, 내가 처음으로 엄마한테 심각한 얘기를 해야 할게 생겼어."
다짜고짜 전화번호부터 내밀 순 없었다. 엄마가 최대한 충격을 덜 받도록 찬찬히 그간의 수집 과정을 얘기해야만 했다. 말하는 동안 엄마의 감정동요를 살피느라 살짝 현기증 오는 것도 같았다.
그런데 엄마의 반응이 생각과 너무 달랐다.
얼굴이 점점 달아오르고 눈에 핏줄이 선채로 당장 새아빠에게 전화라도 걸 줄 알았는데 이상하리만치 무표정으로 내 얘기를 담담하게 듣고만 있는 것이었다.
입술을 바들바들 떨고 있는 건 오히려 고자질쟁이인 나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엄마는 반대로 나를 보며 내가 받았을 충격과 그간의 심적고통을 생각해서 애써 평정심을 유지하려 했거나, 차마 딸 앞에서 부들부들 거리는 모습을 보이기 싫어 억지로 감정을 누르고 있던 것이 아니었나 싶다.
고자질의 마지막에 드디어 그 비밀 악보 속 전화번호를 건넸다.
엄마는 그 번호를 덤덤히 수첩에 옮겨 적었고 나에게 혼자만 알고 있으라는 당부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