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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LLY Aug 30. 2024

새아빠가 바람을 피웠다 #3

늦은 밤 엄마를 찾아온 밀고자

혼자만 알고 있는 비밀이 무색하게 그날 이후로 식구들이 잠든 시간이면 두 분은 자주 다퉜다.


난 전화번호를 전달한 죄책감에 시달렸고, 새아빠랑 눈도 마주치지 않게 되는 날이 계속되었다.

나를 마주하지 않는 건 새아빠도 마찬가지였다.

새아빠가 슬슬 미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가장 큰 싸움이 있던 날 급기야 새아빠는 짐을 싸서 집을 나가버렸다.


나 때문에 엄마가 괴로워한다는 자책감과 새아빠에 대한 원망을 욱여 담아 매일밤 새아빠를 저주하는 일기를 썼다가 지우기를 반복했다. 그냥 모른 척하고 있을걸 하는 후회도 들었다.


나로 인해 벌어진 일이라는 책망 때문이었을까

난 엄마에게 빙의되어 남자에게 배신당한 여자의 감정을 매일 경험하고 있었다.

그때부터는 밤마다 친구들을 만나러 나가는 일도 거의 하지 않았다.


새아빠가 가출하고 며칠이 지나서였다.


새벽 2시가 넘은 시간에 집 초인종이 울렸다.

식구들 중 나만 깨어있던 터라 놀란마음에 달려 나가 인터폰을 확인해 보니 웬 아저씨가 현관 앞에 서있는 게 아닌가.


지금 여자뿐인 이 집에 더군다나 이 시간에 무슨 일인가 싶어서 누구신지 여러 번 물었는데, 아저씨는 본인을 밝히지 않고 계속 엄마의 성함을 대며 이 OO 사모님을 만나러 왔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난 누구인지 정확히 말씀하시라며 남자에게 화를 냈다.


겁 많은 강아지가 크게 짖는다고 했다. 늙은 할머니, 어린 동생, 남편이 떠나간 침대 위에 상처로 몸져누운 엄마를 대신해 새벽에 우리 집 문 앞에 서있는 남자에게 겁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오로지 나뿐이었다.


스피커 소리에 놀란 엄마가 방에서 나와 그 영문모를 아저씨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긴가민가 한 표정을 짓더니 옷을 대충 챙겨 입고 나갈 채비를 했다.

나도 얼른 옷을 주워 입고 나왔다.

그 시간에 엄마 혼자 저 아저씨에게 내보낼 순 없었다.

같이 따라가겠다며 현관 앞에서 실랑이를 했지만, 엄마는 기어코 괜찮다며 보호자를 자처하는 나를 뒤로 하고 혼자 아저씨를 만나러 밖으로 나갔다.


엄마가 나간 지 벌써 한 시간이 지났다. 불안해서 더는 안될 것 같아 나가서 한번 찾아봐야겠다 마음먹고 신발을 막 신으려는 차에 엄마가 들어왔다.

그제야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누구야? 그 사람? 누구냐니까!”


그런데 돌아온 엄마의 표정이 이상했다.

마치 영혼이 빠져나간 사람 같았다.

그 아저씨가 누구였냐는 내 질문에 엄마는 아무 대답도 없이 방에 들어가 문을 잠가버렸다.


다음날 아침 일찍 엄마와 외할머니가 대화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래도 엄마는 외할머니가 일어나실 때까지 잠을 못 이루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 아저씨가 누구인지 미치게 궁금해서 나 역시 잠을 설친 상황이었다. 대화에 행여 내가 방해라도 될까 봐 조심조심 쇼파 끝에 앉았다.

그리곤 지난밤의 전말을 듣게 되었다.






새벽에 찾아온 정체 모를 아저씨는 새아빠와 동업을 하는 분이었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우리 부모님은 여자종업원이 많이 있는 술집을 하셨었다.

사장이었던 엄마는 장사가 좀 잘되자 늘 여자사장의 보조역할을 하는 듯한 새아빠에게 '사장님' 소리를 듣게 해주고 싶어서 새아빠 명의로 가게를 차려주고 싶어 했다.

적당한 가게를 찾던 중에 규모는 제법 컸지만 초보 사장님이라 경험이 없어 슬슬 말아먹고 있던 어젯밤 그 아저씨의 가게가 눈에 들었다. 물장사에 노련한 새아빠와의 동업을 제안하면서 새아빠와 엄마는 다른 지역에서 각각 가게를 운영하게 되었다.

엄마는 계약하던 날 단 한번 인사만 나눴던 동업자 아저씨를 어젯밤 한 번에 알아보지 못한 것이었다.


그렇게 새아빠는 비록 반쪽짜리 동업가게이긴 했지만 사장님이 되었고,

다행히 동업 후 장사가 잘되어 새아빠는 그 시절 부의 상징 같았던 반짝반짝한 신형 그랜져를 타고 지갑엔 늘 현금을 가득 가지고 다니며 골프채를 잡기도 했었다.

우리 가정에게 최고 부흥기였던 시기였다.

엄마는 엄마대로 여기저기 아파트를 사러 다녔다.


새아빠의 가게가 생각보다 잘 되자, 엄마는 본인 가게를 곧 정리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평생 못해 본 남편이 벌어다 주는 돈 쓰는 거. 나도 이제 좀 그런 거 해보면서 살아보려고. 이젠 지치기도 했고. “


이 말을 하는 엄마의 얼굴은 길고 고단했던 여정을 모두 마친 순례자 같았다.


하지만 평범한 50대 주부로 귀환을 준비하던 엄마의 파라다이스는 새아빠에게 가게를 차려준지 1년도 되지 않아 끝나버렸다.


심야에 우리 집 문을 두드렸던 동업자 아저씨는 며칠 전 내가 했던 고자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한 밀고를 하고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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