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으로 돌아가고 싶다.
“가서, 뭐라 할 낀데?”
“생각보다 빨리 왔네. 영영 안 올 것처럼, 쌩~ 가더니만.”
부모님이 안 계신 집은 제 역할을 다한 온기 사라진 새 둥지.
지친 영육이나마 잠깐 쉴 수 있는, 한적한 시골 정류장 같을까?
다만, 큰 양푼에다가 따뜻한 밥과 콩나물 무침, 고추장, 참기름 넣고 쓱쓱 비벼서, 얼큰한 해물 된장국 곁들여서, 배부르게 먹고 싶을 뿐이다.
그리 먹고 나면, 왠지 기운이 펄펄 날 것 같은 간절함으로.
어떻게 논문을 써야 할지 도대체 감이 잡히지 않아, 어디든지 도망치고 싶다.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하지만, 주변엔 아무도.
나에게 도움 줄 만한 사람, ‘프랑스 불문학사’를 갖다 준 제주도에서 온 그 유학생은, 지난해 겨울 파리 뒷골목에서 무참하게 강도에게 살해됐다.
TV와 신문에서 그 끔찍한 소식을 보는 며칠 동안, 멍~했던 나.
지금은 논문 중압감이 무인도에 홀로 버려진 것 같은 절망감으로 변질되어, 마치 거센 파도처럼 하얀 이빨을 드러내며, 나에게 달려드는 것 같다.
시간도 가파른 가속도로 욱죄여오는 오후.
엄청난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채로, 강변 벤치에 우두커니 홀로 앉아있다.
사람이라곤 없는 한적한 평일 오후, 강에는 평화롭게 헤엄치는 백조 무리뿐.
강 속으로 갑자기 들어가고 싶은 강렬한 충동이 회오리처럼 일어난다!
계속 짓누르는 중압감을 강물에 내던져버리고, 순백색 날개로 유유히 헤엄치는 백조로 태어나고 싶은 몽상도, 나를 유혹한다.
섬 아이 놀이터였던 강과 바다에서, 여름 내내 개 헤엄치며 놀았던 덕분으로, 한 시간 넘게는 돌처럼 가라앉지 않고 떠있을 수준인 나.
강물은 빠르지 않지만, 깊이는 가늠되지 않는다.
극심한 우울증으로 강물에 빠져 자살한 버지니아 울프의 실루엣이 지나가고, 제주도 청년 살해 기사의 헤드라인도 깃발처럼 펄럭인다.
나의 기사 헤드라인은 어떻게 장식될까?
한국유학생의 사고사? 자살?
이건 아무래도 국제 망신이다!
열렬한 애국자는 아니지만, 그래도 나라 먹칠까지야.
불현듯, 가방에 들어있는 담배와 라이터가 떠올랐다.
욜랑이 함께 피우기를 권유하며 준 입셍로랑 고급담배들.
그녀는 상대가 자신의 호의를 거절하면, 곧바로 기분이 언짢아진다는 것을 체득한 나는,
“다음에 피울게요, 피우고 싶은 맘이 드는 날.”
칼처럼 아예 거절하는 대신, 감사 인사와 함께 받아둔 담배를 고스란히 모아두었던 것이다.
매일 만나는 도서관 동지인 한국 유학생, 나만큼이나 가난한 철학전공자에게 주려고 챙겨 왔지만, 그를 못 만남으로서 가방에 그대로 있던 담배.
내 손에 쥔 입셍로랑 담배 케이스는 아주 고급스러운 이미지다.
한번 사용하고 버리기에는, 너무나 아까울 정도로.
난생처음으로 담배에 불을 붙였다!
별다른 주저함 없이, 욜랑에게 말했던 “피우고 싶은 그날”인양.
휘감아 욱죄여오는 자살충동에서 벗어날 수 있는 탈출구라면, 무엇이든지!
깊은 들숨으로 들이마신 후, 날숨으로 뿜어낸 담배 연기는 탄식처럼 번지고.
한 모금으로 3분의 1밖에 안 남았을 정도로, 깊이 들이마셨다.
다른 담배보다 1.5배나 더 긴 입셍로랑 담배인데도.
연거푸 2개비를 피우자 머리가 핑~돌더니, 거의 꼬꾸라질 것 같았다.
“그래도 자살하는 것보다, 100배나 낫지 않나?”
일탈 와중에도 당위성을 찾아내고서는, 또 다독이기까지.
6월 말까지 논문은 통과해야 한다.
지도 교수는 9월부터 미국대학의 교환교수로 간다고 발표.
그전에 논문이 통과하지 못하면, 꼼짝없이 1년을 더 기다려야 하는 처지다.
나의 독수리타법으로 손으로 써둔 자료를 컴퓨터에 입력하는 작업이 마치 시간 도둑처럼 느껴지던, 긴 여름방학 코앞.
대학 자료실 문 닫기 20분 전.
여러 자료를 취합해서, 논문 목차별로 저장해야 하는 오후 5시 40분.
급박한 마음에서, 옆에 앉은 아랍 학생에게 각 폴더의 자료를 디스켓에 전부 저장해 달라고 부탁했다.
주저 없이 승낙한 대로, 주저 없이 전부 삭제해 버리는 참사를 일으킨 그!
그에게 부탁한 이유는 프랑스에서 어깨너머로 배운 나의 컴퓨터 실력은, 누군가의 도움으로 확인 작업을 해야만 비로소 안심되는 수준이었던 것이다.
쥐뿔도 모르는 그 녀석이 저지른 대형사고 뒷수습은, 오직 내 몫으로!
나의 전후사정을 다 들은 지도교수는 처리해야 할 행정적 업무 때문에 자신도 곧바로 떠날 수 없는 처지로서, 8 월 30일에야 출국한다고 했다.
그는 점잖은 태도로 학생들을 배려한다는 정평에 어긋나지 않게, 고맙게도 정해진 논문 심사일정을 2개월 뒤인 출국 전날로, 날짜 변경을 해주었다.
대책 없는 오지랖으로 사고 친, 이름도 모르는 녀석을 수없이 원망하며, 거의 뜬 눈으로 밤샘 작업을 했다.
논문은 통과됐다, 어제.
19세기 시인 보들레르 시에서 영감 받은 주제는, ‘이중적인 청원’.
학장으로 승진한 지도교수는 미국 교환 교수로 떠날 것이다, 오늘.
연달아 드러나는 걸림돌에 뒤뚱대는 우여곡절 끝에 겨우내, 통과된 논문!
날아갈 정도로 가볍고도 기쁠 줄 알았는데, 오히려 허탈감으로 자꾸 가라앉는 느낌이다.
갑자기 목표가 없어진 나는 무료하기까지.
이 무료함에서 벗어나려고, 욜랑 언니인 할머니 침대 곁으로 다가서며,
“목욕시켜 드릴까요?”
“너무, 고마운 일이기는 헌데. 내가 좀 무거워야지!”
“힘이 장산걸요. 염려하지 마세요.”
꼼꼼하게 씻겨드린 후, 무사히 침대에 눕혀드렸다.
그리고 돌아서는 순간, 가슴이 둘로 갈라지는 진통을 느낀 것이 전부다.
연달아 나를 부르는 욜랑의 고함 소리!
마치 찢어지는 것 같은 가슴 진통과 함께 갈라진 가슴속에서 나온 나.
누워있는 나를 한 순간 내려다본 후, 강력한 힘에 이끌려서 어디론가 날아가고 있다.
빛의 속도로 떠나가는 나에게서, 점점 멀어지는 욜랑의 목소리.
그 끝을 가늠할 수 없는 터널 속에서, 광속으로 저 멀리로 날아가던 나.
드디어 멈춘 그곳에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푸른 바닷가의 아름다운 해변.
누군가 금방 창조한 것 같은 순결한 자연 모습!
그 아름다움에 도취된 황홀감에 빠져드는 순간, 얼굴 위로 쏟아지는 물세례.
“아이! 차가워!”
방해꾼에게 구시렁대며 뜬 눈, 연달아 물을 퍼붓고 있는 욜랑.
눈 뜬 나를 보더니, 울부짖던 것을 멈추며 껴안고는 볼을 비비며,
“살아났구나, 가엾은 내 딸!”
낯선 프랑스 일상도 점점 더 힘에 부치던 그 시기.
더욱이 논문 쓰는 기간 6개월 동안은 하루에 2시간도 채 못 잤다.
한국에서 출국할 즈음, 몸무게 56kg.
프랑스 바게트 빵 맛에 중독(?)되어, 하루에 1개씩 먹었더니 곧바로 62kg.
낯선 선창 위에서 거대한 날개를 끌며, 생존하느라 사투하며 뒤뚱댄 알바트로스처럼, 나날이 수척해졌다.
설상가상으로 논문과 씨름하는 동안에 더욱 쑥 내려가더니, 결국 44kg!
무려 90kg가 넘는 거동 불편한 할머니를 목욕시킨 후, 일어난 심정마비!
의식을 돼 찾은 후에야, 뒤늦게 도착한 911 아저씨는
“다행이네요. 건강에 좀 더 유의하셔야겠네요.”
직업적이고도 의례적인(?) 인사를 남기고 떠나간 뒤.
“죽을 날이 아닌가 보네, 오늘은!” 중얼거리며,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며,
결국 툭 내뱉은 말,
“도대체, 불문학 석사학위가 뭐 길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