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뒤따라 시장가는 꼬마처럼, 욜랑과 함께 마무트 가길 좋아하는 나.
마무트(mammouth ; 아주 큰 코끼리)는 시내 외곽에 소재하는 엄청난 규모로, 온갖 물품이 대량으로 유통된다.
인접국가에서 생산된 난생처음 보는 신기한 농산물을 구경하는 동안은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완전히 잊어버릴 정도.
금요일 오후 마트.
처음 발견한 것은 엄청나게 큰 풋고추!
유난히 기분이 좋았던 것은 부산 국제 시장에서 즐겨 사먹던 그 고추튀김, 오래전부터 먹고 싶었던 터였다.
정신없이 계속 고추를 담아대는 나를 보며, 식자재 지출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큰 손인 욜랑도 결국,
“고추 너무 많이 담은 것 같은데?”
“내일 점심에 고추튀김해서 단골들과 함께 먹어요.”
“그렇게나 많이? 어떻게 다 요리하려고?”
“이 정도야.”
문제없다는 듯이 내가 어깨를 들썩했더니, 포기한 눈치다.
그 당시 한국유학생은 논문이 통과되고 나면, 집으로 초대해서 한국 음식을 함께 먹는 것이 마치 관례행사(?)처럼.
카페에서 이런 의례적인 파티가 적절치 않은 것 같아, 뭉개고 생략한 나.
대신 나의 실질적인 이웃인, 하루 종일 카페에 머무는 단골들에게 한국음식을 맛보이기로 마음속으로 결심했던 이유다.
그동안 논문 쓰면서 받은 스트레스를 뿔난 고슴도치처럼, 달리 갈 곳 없는 국제 민초들을 홀대하던, 내 모습이 떠올라 미안한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마치 카페의 붙박이 의자처럼, 죽치는 외국인 실업자와 노숙자를 차가운 눈빛으로 무시(?)했던, 미운 오리새끼 같았던 모습을 지우고 싶었던 것일지도.
오늘은 경마 경기가 있는, 토요일.
프랑스는 경마경기가 일주일에 4번씩 열린다.
따라서 토요일 오전의 카페는 경마하러 온 손님이 대부분.
경마 잡지에서 각 말들의 정보를 통하여, 예상 순위별로 1등에서 5등까지 색인한 종이를, 카페 안에 비치된 기기에 통과시키는 방법이다.
점심 식사를 준비하기에는 좀 이른 오전 10시.
재료는 아침에 이미 다듬어서 준비해둔 상태로, 마땅히 할 일이 없던 나.
논문통과 된 후, 책 대신에 그저 무위도식하고픈 자투리 시간이다.
별다른 생각 없이 손님들이 말에 관한 정보를 분석하는 것을 옆에 서서, 그냥 구경하고 있었다.
그런 내 모습을 본 욜랑이 30프랑을 주면서, 사람 좋은 미소로 한 게임 해보라고 넌지시 권유했다.
평소에도 귀가 여린 내가 단숨에 다섯 마리의 말을 선택했다.
곧바로, 아무런 사전 정보 없이 선택했음을 후회하며, 다시 다른 말들을 수정 선택했던 것은 갑자기 돈을 벌고 싶은 욕심이 생겼던 것이다.
드디어 점심 준비 시간.
오늘 메뉴는 고추튀김, 오징어순대, 김밥 세 가지다.
주 재료인 다진 소고기, 돼지고기, 양파, 당근을 고추 속에 넣고, 밀가루 반죽에 적신 후, 빵가루에 굴려서 기름에 튀긴, 고추 튀김!
오징어 내장을 제거한 몸통 속에다가 불린 찹쌀, 잘게 다진 오징어 다리, 다진 양파를 넣고 봉합하여 찜통에서 익힌, 오징어순대!
전기밥솥에서 갓 지은 밥을 퍼내어 식초 물을 뿌려서 식힌 뒤, 미리 준비해둔 색깔별 야채와 계란을 넣고 김으로 싼, 김밥!
메뉴가 한 가지인 평소 토요일과 달리, 오늘은 특별히 다양하다.
드디어 점심시간.
그 시간에 카페에 있던 사람들은 전부, 점심 테이블에 앉았다.
다들, 호기심과 기대로!
모처럼 다 함께 큰 소리로 웃고 떠들며, 연신 나에게 ‘엄지 척’사인을 보내며 맛있게 잘 먹는 모습에서, 덩달아 기분 좋았던 토요일 점심파티.
그 중에서도 가장 인기가 좋았던 고추튀김은 그다지 맵지 않아서 다들 잘 먹었고, 바삭한 맛은 내 입맛에도 잘 맞았다.
거의 매일 출근(?)하는 필립 어머니 꼴레트가 마지막 1개까지 싹쓸이하면서,
“난생처음이야, 이런 맛은! 너무 맛있어. 세상에 5개나 먹었네!”
마치 사실 증명이라도 하듯이 고추 꼭지를 들어 보여주는 데도, 평소처럼 그렇게 얄밉지는 않을 만큼, 오래간만에 너그러웠던 나.
욜량이 내 옆구리를 쿡 찌를 때에 웃었던 것은, 꼭지가 없는 고추가 더 많은 것을 우리 둘 다 알고 있었던 것이다.
맛있는 요리에 만족한다는 의미로, 기어코 200프랑을 준 건축가도.
음식은 호불호가 있기 마련인데도, 예외로 전부가 흡족한 덕분에 국경이 전혀 문제되지 않는, 점심 식탁에 마주앉은 한식구들이었다, 그 토요일은!
오후 5시.
TV앞에 모여 앉아서 달리는 말들을 보는 우리들.
내가 찜한 대로 말 3마리가 들어왔다고 소리친 필립의 큰 목소리!
갑자기 욜랑이 나를 얼싸안았고, 까페는 갑자기 엄청 시끌벅적해졌다.
난생처음 해본 경마로 수익이 생긴 날, 다들 기뻐하는 데도 불구하고, 진작 장본인 나는 감사하기보다는 오히려 아쉬워했다.
처음 선택했던 번호를 바꾼 이유는 갑자기 큰 돈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불현 듯 일어남으로서 번호를 수정한 그 결과로, 5마리 전부 승리하는 엄청난 금액의 행운을 그만 놓쳐버렸던 것이다.
그토록 바라던 나만의 독립된 공간인 스튜디오로 이사 가는 꿈, ‘국제상업학교(l'école commerce internationale)’의 3년간 거액 등록금, 컴퓨터, 생활비까지 해결될 수 있는 ‘엄청난 기적’이, 눈앞에서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그 학교(l'école)에서 보내 온 입학 서류 보다가 “어머나, 세상에!”를 연발했던 것은, 내가 1년 대학(l'unversité) 등록금으로 지불하는 67,000원 보다, 거의 100배나 비쌌던 것이다.
등록금이 비싼 대신에 졸업 전 국제기업에서 실무경험을 익힘으로서, 대부분 취업과 연계되는 탄탄한 미래가 보장되는 시스템이다.
입학 조건은 석사 이상이면 입학시험 대신, 제2외국어로 영어나 일본어 소통 능력으로 평가한다고 서술.
조선회사 비서로 오래 근무한 덕분으로, 일본어는 바이어들이 재일 동포 딸로 오해할 정도였고, 아시안게임의 통역제의를 받은 적도 있었던 터라, 일본어 소통은 통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또, 영어는 일상어 중에서 거의 1000단어 정도가 프랑스어와 동일하게 표기하며 발음만 다르게 할 뿐이고, 호랑이 영어선생님에게 특별한 귀여움을 받을 정도였으니, 크게 문제되지 않을 것 같았지만.
학교(l'école)입구에서 나를 가로 막는 장애물은 엄청난 등록금!
경마로 얻은 수익으로라도, 국제무역학교로 진학함으로서 진로를 바꾸고 싶었던 이유는 유학생 대부분은 귀국 후, 가르칠 대학이 정해진 느낌을 암암리에 풍겼기 때문이다.
다른 진로인 ‘국제상업학교’에 진학하고 싶다던 그 꿈은, 욕심쟁이 변덕으로 큰 행운을 걷어찬 아쉬운 날, 토요일.
그나마 말 3마리는 운 좋게 들어와 짭짤하게 생긴 수익!
욜랑에게는 새 TV를, 나에게는 비싼 플레이드판 보들레르 전집과 불어판 대형 성서를 선물했다.
한동안 아이처럼 기뻐하는 욜랑을 보면서, 모처럼 편안했던 나.
표류하던 시절에 가장 많이 웃은 날, 난생처음으로 경마한 토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