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업이 끝난, 오후 6시.
강의 시간 중, 나는 여전히 ‘이해와 몰이해’라는 벽을 넘나 든다.
파도타기 같은 강의가 끝날 즈음엔, 거의 매번 탈진되는 느낌이지만.
그래도 강의 있는 날이 기다려지는 것은 이자벨을 만나는 기쁨으로.
평소답지 않게 그녀가,
“함께 레스토랑에 가서, 저녁 먹어.”
프랑스 레스토랑은 비싼 탓에 한 번도, 가 본 적 없는 나.
상대적으로 저렴한 중국 식당이나 베트남 식당도, 여전히 부담된다.
지난번 성탄 때, 이자벨이 초대했으니, 이번에는 내 차례인 셈.
‘어떻게 하나?’하고 망설이다가,
“이번에 이사한 집에 가서, 함께 저녁 먹을까? 내 방 구경도 하고, 어때?
“그렇게 해”
“뭘 좋아하는데?”
“육류는 별로고. 대신 생선 요리는 잘 먹어.”
“그럼, 생선 튀김해서 먹을까?”
“좋아.”
카페 안에 들어서자마자, 불편한 기색이 역력해지는 이자벨.
비 오는 날씨 때문인지, 붙박이 고객인 노숙자들이 유난히 많았던 탓이다.
그들은 반색하는 것도 모자라, 눈치 없이 이자벨에게 악수까지 청했으니!
위층에 있는 카페식구전용 식탁으로 장소를 옮겼는데도, 불편심이 다 가시지 않았던지…….
갑자기, 간단한 것을 먹자고 제안하는 그녀.
“그럼, 크로크 무슈 먹을까?”
“만들 줄 알아?”
“응. 욜랑에게서 배웠어. 오늘처럼 비 오는 저녁이면, 가끔 해 먹어.”
크로크 무슈를 먹은 후에는, 나의 작은 방에서 함께 차를 마시며, 김영임의 ‘한 오백 년’을 들었다.
어머니가 불현듯 떠오를 때, 눈물을 쏟으며 듣는 나의 사모곡인.
“노래 말 뜻은 몰라도, 강한 전율로 팔에 소름 돋았어!”
옷소매를 걷어 올린 후, 팔을 보여주는 그녀에게.
“혹시, 너 전생에 한국 여인이었나?”
“얼랄라 아~그랬나 봐!~”
두 눈을 감은 채로 한참이나 더 듣고 난 뒤에야, 비로소 평소 모습인 그녀.
“베이비시터 그만두었어. 종합대학 사서로 출근해. 오늘은 사무실 가서 종강 처리 했고. 강의는 안 들어도 되는데, 너랑 레스토랑 가서 저녁 먹으려고.”
자신의 성향대로 취업에 성공한 그녀의 기쁨이, 나의 슬픔이 되는 순간.
더 이상 강의실에서 그녀를 못 만난다는 상실감이 더 컸던 것이다.
다음날 아침.
등교 준비로 필요한 책들을 가방에 챙겨 넣는 순간.
책갈피 같은 낯선 종이와 메모지에는 ‘행복하길 바라는 이자벨’.
그 낯선 종이를 욜랑에게 보여주며, “이게 뭔데요?”
놀란 목소리로 그녀가 “이자벨이 사인한 이천 프랑 수표네!”
‘이천 프랑 수표’란 말에 충격받은 내 머릿속에서, 튀어나온 계산기.
‘이자벨이 먹은 크로크 무슈, 1개 값?’
맙소사!
크로크 무슈 1개에 삼십만 원이나?‘
욜랑이 구체적으로 들려준 프랑스 은행 정보.
은행에서 발행한 수표책에 필요한 금액을 적고 사인한 후, 현금처럼 사용한단다.
지금, 한국 신용카드보다, 더 신속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던 프랑스수표!
“수표가 든 가방 찾아주세요”라며 줄곧 칭얼댄 청원기도를 그날부터 중단한 것은, 자신이 필요한 물건 구입하기를 포기하고, 수표를 경찰서에 갖다 주는 그런 사람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는 슬픈 확신에서다.
예전 근무하던 회사에서 공적인 회장 비서 업무 이외에도, 계열사 비상자금을 긴급 이동시키는 은행업무로, 자주 은행을 드나들었던 나.
그 당시의 한국에는 개인에게 발급되는 수표책은 존재하지 않았고, 은행발행전용인 수표 뒷면에도 수표사용자가 이서(주민번호와 연락처, 성명과 사인) 한 후에 자신의 계좌에 입금하는, 수표 사용자의 추적이 가능한 시스템.
입금시킨 수표도 최소 1일 후에야 현금으로 인출 가능하다는 것이 내 상식의 전부였고, 더욱이 프랑스은행 시스템에 문외한이었던 탓에, 수표가 든 가방의 귀환을 오매불망 기다렸던 것이다.
가끔씩, 파리 한국대사관에 전화로 징징 매달리는 참 우둔했던 나.
한국에서 체득된 일상의 잣대로 프랑스를 재단할 할수록, 낯설고 다양한 사회적 제도 앞에서, 수 없이 뒤뚱대며 표류하던 글바트로스!
8월의 비 오는 오후.
얼마 전, 집 근처에 새로 오픈한 프랑스 세프가 상주하는 빵 가게.
빵 맛이 아주 좋다.
특히, 내가 좋아하는 크로와상은 프랑스에서 먹던 맛과 거의 동일하다!
군침 돌게 진열된 ‘크로크 무슈 1개 값인 오천오백 원이나!’
‘너무 비싸지 않나?’
결국, 크로와상과 호밀 빵만 샀다, 너무 비싸다는 이유로.
크로크 무슈는 따뜻할 때에 먹어야 제 맛이란 이유로, 해물파전처럼.
프랑스에서 비 오는 날이면, 해물 듬뿍 넣은 해물파전이 먹고 싶더니.
한국에서 비 오는 오늘, 크로크 무슈가 먹고 싶어지는 청개구리 입맛?
광산에서 광부들이 식어서 굳어진 샌드위치를 난로에 올려놓아 데워서 먹으면서 유래한 크로크 무슈(croque; 바삭한 - monsieur; 아저씨)를 만들었다.
금방 간 토마토 주스와 올리브를 곁들여서, 맛있게 먹는 와중에도.
“크로크 무슈 1개에 오천오백 원은 너무 비싸지~암~!”
혼잣말로 중얼중얼하다가, 갑자기 떠오르는 이자벨.
초보자가 만든 크로크 무슈를 1개 먹고, 이천프랑을 지불한 그녀가.
책 속에서 수표를 발견한 뒤, ‘고맙다’는 말과 함께 다소 겸연쩍은 목소리로,
“너도 쓸데가 많지 않나?”
“그렇기는 해.”
“그러니까 다음부터, 나에게 주지 마.”
“너에게 ‘주는(donner)’ 것 아니야. 너랑 ‘나눌(partager)’뿐이지. 오직 신(Dieu)만이 인간에게 주는(donner) 것 아닐까? 오직, 네가 행복하기를 바라는 맘으로, 나누는 거야.”
착한 사마리아인처럼 나를 곧잘 챙겨주던 그녀,
말없이 책 속에 수표를 가끔 꽂아두던 속내 깊은 그녀,
상대방의 민망한 입장까지 배려하는 마음결이 섬세한 그녀,
영혼이 삭막해질 때에는 수도원으로 개인 피정 가는 그녀,
나보다 어린데도 영성적으로 더 성숙한 그녀는,
척박한 내 영혼의 들판에 핀 향기롭고 단아한 한 송이 치자 꽃!
크로크 무슈(croque-monsieur) 1개 값으로, 이천프랑 지불한 그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