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 준비로 퇴사를 한 지 벌써 몇 달이 지났다. 일 년 전의 유산 이후 병원만 관두면, 교대 근무를 안 하면 아기가 생길 줄 알았는데 생기지 않으니 답답한 마음에 남편과 용하다는 경주의 한의원을 가보고 그래도 안되면 내년부턴 도시로 병원을 다녀보자고 얘기하고 화천에서 경주까지 왕복 800km를 다녀왔다. 혼자서도 여행길에 신나서 누비던 경주인데 이번 경주 방문은 어쩐지 착잡한 마음이 더 컸다. 출발하기 전에도' 아직 20대인데 굳이 한의원까지..?' 싶었지만 막상 도착한 뒤에는 더 일찍 오지 않은걸 후회했다. 놀랍게도 대부분이 내 또래의 젊은 부부들이었기 때문이다.
주말엔 웨이팅을 하기로 유명한 곳이라 우리는 평일에 진료를 보기로 했다.
전날 도착해 한의원 근처 숙소에서 묵고 월요일 오픈 시간인 아홉시 반에 맞춰서 갔다. 오픈 시간인데 벌써 주차장이 꽉 차있었다. 아홉시 반부터 진료 시작이긴 하나 9시 넘은 시간에는 미리 접수가 가능한 것 같다. 우리를 포함한 대부분이 부부가 함께 대기하고 있었고 한 명이 먼저 앉아있다가 순서가 불리면 차나 근처에서 대기하던 배우자를 불러 같이 들어갔다. 그 때마다 배우자가 늦게오면 올수록 뒷사람의 진료는 늦게오는만큼 밀려서 왜 다른 곳을 가있는건지 의아했는데 곧 깨달았다. 적막한 침묵에 가슴이 답답해져서 나도 그 곳에 있기 힘들었다. 내부를 한가득 메운 너무 침울한 분위기에 사람은 많았지만 왠지 모르게 숙연한 느낌이었다. 나 또한 괜히 위축되어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그 깊은 슬픈 침묵 속에 잠식되어버릴 것 같은 느낌에 남편에게 순서가 다가오면 들어오겠다고 얘기한 후 혼자 밖에서 대기했다.
아홉시 반에 접수하고 내가 진료를 본 시간은 열시 사십분, 그동안 착잡한 마음으로 바깥을 돌아보는데 야외 정원도 깔끔하게 잘 꾸며져있긴 했다. 근데 포트폴리오 같은 걸 들고 있는 젊은 사람들 다수가 마당에 모여서 신나게 웃고 웅성거리면서 곳곳의 바깥 사진을 찍고 있었다. 안 그래도 한의원에 들어설 때부터 위축되어 있는 상태였는데 마치 내가 구경거리가 된 느낌에 수치심이 들었다. 그 사람들이 찍는 사진에 내가 찍힐까 봐 다시 달려들어가 무거운 분위기의 내부에서 대기했다.
대기실에 들어가 또다시 바닥에 시선을 고정하고 진료를 기다리는 동안 그 곳엔 계속 전화벨이 울리고 있었다. 접수대에 있는 사람은 세명인데 모두가 전화를 받고 있는 상황에서도 정말 끝없이 전화벨이 울리고 있었다.
전화기 몇 대가 동시에 울리는 광경을 보고있자니
'나처럼 이렇게 간절한 사람이 많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어쩐지 슬펐다. 사람들 모두가 전화를 받던 와중에도 바로 뒤의 전화기는 수시로 울렸고, 무거운 침묵만 흐르는 대기실과 대비되게 그곳의 기본 배경음처럼 전화벨 소리는 계속 흘렀다. 모두 진료와 함께 계속 밀려들어오는 전화를 받느라 바빠 보였다. 나는 초조한 마음에 손만 뜯다가 대기한지 한 시간이 지나서 진료를 봤다.
들어서자마자 바로 앉아서 내 맥을 짚어보신다. 내게 질문한 건 얼마 없었다. 제일 먼저 생리일을 물으신다. (생리 이전이면 혹시나 임신 가능성이 있으니 생리 이후에 약을 주문해야 하기 때문) 무슨 일을 하냐 물으셔서 간호산데 얼마 전에 퇴사했다, 결혼한 지 얼마나 되었냐 하기에 일 년이라 하니 결혼 이후에 살이 갑자기 쪘다는 말을 하셨다. 식사시간도 불규칙하고 내가 종종 굶다가 폭식하는 것도 아셨다. 그리고 곧장 남편 맥을 짚어보고는 남편은 아무리 많이 먹어도 고작 1,2킬로 찌고 그마저도 다음날이면 빠진다고, 이런 체질의 사람과 똑같이 먹으면 혼자 찐다고 했다. 남편 퇴근이 늘 밤늦은 시간이라 밤에 같이 먹었는데 이제부턴 남편 혼자 먹고, 나는 7시 이후에 아무것도 먹지 않아야 한다고.. 임신하면 살이 10kg 이상은 찔 텐데 그럼 더 힘들어지니 지금부터 관리를 해야 한다고 하셨다. 술도 마시지 말고 밀가루도 먹지말아야하고 특히 내가 맵고 짜고 달고 튀긴 음식도 자주 먹는데 먹지 말고 인스턴트도 피하라고 했다. 살이 잘 찌는데 빠지지도 않고 잘 붓는 체질..이라는 말을 들었다. 감정 기복이 심해서 짜증도 많이 내고, 스트레스도 심하고, 잠도 잘 못 잔다고- 수면 질이 안 좋으니 커피는 냄새도 맡지 말고 입에 대지 말라고 하셨다. 내가 교대 근무를 오래 해온 것도 바로 아셨다.
짧은 시간이었는데 들을수록 맞는 말이라 놀라면서 나왔다. 마치 날 그동안 지켜본 것 처럼 맥을 짚고 나의 모든걸 얘기하셨다. 나온 뒤 접수처에서 생리 시작하고 전화 주면 입금 후 2주 뒤 약이 도착할 거란 안내를 듣고, 바로 밑의 층에서 한방차 시음을 할 수 있었다. 진료비는 없었다.
테이블마다 원장님의 책과 차 안내문이 있다. 곧이어 남편과 나 각각 다른 차를 내어주고 설명해 주신다. 남편 차는 감귤 향이 진한데 여성용 차는 한약 향이 강하다.
임신과 착상에 도움이 된다는 말에 우리도 차를 사서 나왔다. 나왔을 땐 11시였는데, 그 시간엔 사람이 더 바글거리고 있었다.
한의원을 다녀와서 더 착잡한 마음이 들었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화천으로 이사 온 뒤로 나는 정말 철저히 망가져왔기 때문이다. 외로움을 견디다 못해 매번 토할 때까지 자극적인 음식들을 밀어 넣었던 내 모습은 자학이었다. 더는 이래선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잘 웃던 내가 오래 전부턴 웃음도 잃고 하루에도 몇 번씩 우는 게 요즘의 일상이다. 결혼 이후 이렇게까지 망가져버린 내 모습이 믿기지 않는다. 나는 내가 원래의 내 모습을 찾길 바란다.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는 말도 있듯이 일단 지금은.. 우선 내가 몸이든 마음이든 건강해졌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