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 많은 딸아이'의 아침에서 시작된 질문
오늘 아침, 보슬보슬 비 내리는 선화예중 앞. 딸아이의 등굣길을 함께했습니다. 국제화방에서 산 야외 이젤, 화판, 접이식 의자, 각종 화구들이 양손과 어깨를 가득 채운 채, 조용히 교문으로 들어가는 아이의 뒷모습. 그 모습은 오래전 저의 예고 시절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예술을 배운다는 건, 단지 기술을 익히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이해하고 표현하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술인의 길은 언제나 '짐'으로 가득합니다. 물리적 짐은 물론이고, 제도적 무관심, 사회적 배제, 법적 공백이라는 무형의 무게도 함께 짊어져야 했습니다. 그 무게는 아직도 줄지 않았고, 여전히 많은 아이들이 그 짐을 지고 자라납니다.
헌법 제22조 2항은 특별히 명시했습니다.
“저작자, 발명가, 과학기술자와 예술가의 권리는 법률로써 보호한다.”
하지만 이 조항은 현실에서 선언에 그쳤습니다. 창작자는 여전히 무단 사용, 무단 편집, 악의적 왜곡 등 예술가는 수많은 위험에 노출되어 있으며, 때로는 너무 자주, 존재 자체의 존엄성조차 보호받고 있지 못합니다. 표현의 자유는 있지만, 존재의 존엄을 지켜줄 실효적 장치는 부족합니다.
예술인은 단지 감정 표현자가 아닙니다. 그들은 사회의 감수성을 형성하고, 공공의 기억을 기록하며, 민주주의의 건강을 반영하는 거울입니다. 이들을 보호하는 법은 단지 예술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 공동체의 문화적 생존을 위한 장치입니다.
의료인은 의료법, 언론인은 언론법, 노동자는 노동법으로 보호받습니다. 그런데 왜 예술인은 예외입니까? 왜 예술인은 늘 ‘감수성’으로만 존재해야 합니까?
갤러리케이 사건 이후, 저는 수많은 작가들과 함께 이름을 되찾는 투쟁과 예술가 권익보호를 위한 활동을 벌였습니다. 기자회견장에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예술인의 권리는 사치가 아니라 생존의 최소한이다.”
“국가는 헌법으로 보장했지만, 현장은 그것을 지키지 않았다.”
예술인은 헌법이 보호하겠다고 약속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지금 그들은 보호받지 못하고, 기억되지 못한 채 사라지고 있습니다.
최근 논의 중인 ‘통신비밀보호법 개정안’, 이른바 몰래녹음금지법은 예술인의 존엄과도 직결된 문제입니다. 감정이 곧 창작의 재료인 이들에게, 대화가 몰래 녹음되고 맥락 없이 유포되며, 그들이 만든 말이 ‘증거’로 왜곡되는 현실은 창작 자체를 위협합니다.
“기술보다 중요한 건 신뢰입니다.”
녹음은 기록이 될 수도 있지만, 관계를 해치는 무기일 수도 있습니다. 독일과 일본은 당사자 간 녹음조차도 불법입니다. 미국은 주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마찬가지로 대부분 당연히 그러합니다. 한국도 이제 선진국가 반열에 서서 신뢰 사회로 나아가야 합니다. 통신비밀보호법(몰래녹음금지법)의 개정이 더디게 진행중이라면, 예술인권리보장법 개정과 함께 예술인 대상 통화녹음 방지 특례 조항 도입 검토를 제안합니다.
AI·플랫폼 시대에 적합한 저작자 중심 보호 시스템은 매우 미흡한 상태입니다. 다음과 같은 제도적 개혁이 시급합니다:
창작자 이력 포함 블록체인 메타데이터 시스템 구축
AI 협업 콘텐츠의 창작자 명시 의무화
저작자 중심 노출 알고리즘 적용
저작권자 표기 의무화
공공 발주 콘텐츠의 저작자 명시 의무화
문화예술교육 내 창작자 권리 교육 의무화
이 모든 조치는 단지 '예술인'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사회의 기억을 지키고, 신뢰와 존엄을 회복하는 작업입니다.
우리는 지금 '익숙한 관료주의'가 아닌, 혁신이 필요합니다. '실행력 있는 개혁형 리더십'이 필요한 시기입니다. 내부 출신 장관이 내부에서는 편할지는 몰라도, 문화정책을 위한 근본적 변화를 이끌 수는 없습니다. 노조와의 협력은 반드시 필요하지만, 관료리더십으로는 문화강국 시대를 열기 어렵습니다.
기술보다 신뢰, 감시보다 존중, 통제보다 표현의 자유가 앞서는 사회. 그것이 예술인이 바라는 세상입니다.
이들이 존중받을 수 있도록 헌법의 약속을 현실화하자는 것입니다.
기억되지 못한 창작자는 잊힌 권리이고, 침묵당한 예술은 꺼진 민주주의입니다.
‘짐 많은 아이’의 뒷모습에서 시작된 질문이, 이제는 짐을 덜어주는 제도와 법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우리는 예술인을 보호함으로써, 결국 우리 자신의 감각과 품격을 지키게 됩니다.
예술인을 위한 법은 곧, 더 인간다운 사회를 위한 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