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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사자잠을 잔다 (2/2)

by 녹음노동자 Mar 23. 2025

*최대한 사건은 살리고 작품과 인물을 특정하는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않기 위해 작품과 인물에 대한 설명을 최대한 삼갑니다. 글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드려 죄송합니다.*


<우리 모두 드라마를 만드는 한 팀>

 드라마에서 제작피디라고 하는 사람들은 촬영현장에서 연출부와 함께 드라마 제작에 큰 축을 담당하는 촬영현장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포지션이다. 그들은 제작라인이고 그들의 말은 윗사람들에게 쉽게 흘러들어 간다. 스텝들은 출세를 위해서 그들과 친하게 지낼 필요가 있다. 드라마를 만든다고 하는 것은 멋진 일이지만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정치적인 일들이 많다. 드라마에는 많은 스텝들이 있지만 대부분의 스텝은 화면에 나오는 것들을 챙기는 사람들이다. 귀에 들리는 것을 신경 쓰는 사람은 녹음팀 외에는 잘 없다. 그래서 잘 신경 쓰지 못하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 현장에서 발생하는 사운드 문제를 제작팀에 이야기하고 도움을 요구해도 회의적인 반응이 나온다. 한 번은 여의도의 거리에서 촬영을 하는데 음악소리가 너무 커서 제작팀에서 음악을 끄고 갈 수 있는지 확인해 달라는 요구를 했다. 내가 부탁했던 제작피디는 평소에도 투덜이로 불만을 입에 달고 사는 친구인데 부탁을 하면서도 속으로는 아차 싶었다. 제작피디는 “안 될 것 같은데... ” 하면서 음악이 들리는 음식점으로 투덜투덜 향했다. 제작피디는 곧 돌아와서 “안 된데요. 어쩔 수 없습니다” 대답을 해 주었다. 나는 그 말을 속으로 믿지 않았다. 곧 헤드폰으로 소리를 듣고 있는 감독님이 와서 나에게 “음악 소리 괜찮아요?” 물었다. 다시 다른 제작피디가 음식점으로 달려가서 음악소리를 멈추었다. 나는 씁쓸함을 느낀다. 다음에도 비슷한 경우가 생겼다. 나는 레스토랑 촬영을 하면서 큰 제빙기의 소리를 해결해 줄 제작팀을 찾았다. 투털이 제작피디가 옆에 있었지만 나는 그녀에게 부탁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주변에 제작피디 인턴으로 들어온 친구가 보였다. 나는 그 친구에서 제빙기를 꺼 달라는 부탁을 했다. 인턴은 “해보겠습니다!” 하고 달려갔다. 나는 똑같은 일에 두 가지의 전혀 다른 반응을 보았다. 인턴으로 온 친구의 말이 나는 감사하게 느껴졌다. 물론 그 친구는 일을 잘 해결해 주었다. 드라마를 만들기 위해서 수많은 팀이 있고 우리의 일은 서로에게 얽혀 있는 경우가 많다. 다들 특정한 이유로 일들을 서로에게 미루는 경우가 있지만 우리는 같은 드라마를 찍고 있는 팀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드라마를 찍는데 배려는 중요한 덕목이다.


<배우들의 리허설>

 드라마에서 주연남자 배우는 나와 나이가 같았는데 특히 매너가 좋았다. 같은 나이이지만 더 성숙하고 형처럼 느껴졌다. 하루는 주연여자배우가 주변 사람들에게 오해를 사서 비난받고 있는 상황을 남자배우가 멀리서 지켜보고 있는 장면을 찍고 있었다. 남자 배우는 자신의 컷이 있을 때 나와서 연기를 해도 되었지만 앞에서 연기자들이 연기를 하기 쉽도록 계속해서 직접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주연남자배우가 연기를 할 때 앞에서 연기를 하던 사람들은 다 사라지고 연출부가 대사를 대신 읽어주었다. 안타깝게도 연출부는 대사를 잘 읽지 못했다. 남자 배우는 중간에 컷을 끊었다. “뭐 하냐? 다들” 평소 화를 내지 않는 남자 배우는 정말 화가 나 있었다. 그제야 분위기를 파악한 배우들이 모여서 다시 연기를 했다. 사실 나도 남자배우가 화를 내는 게 당연하다 생각했다. 다들 너무 했다. 역시 상대방에 대한 배려가 없어서 일어난 상황이다. 다들 오로지 “나” “내 연기” 밖에 없었다.


<비눗방울 씬>

 드라마는 거의 막바지를 향해 갔다. 극에서 일어나는 모든 갈등이 해소되고 남자배우, 여자 배우는 새로운 가정을 이루고 한가롭게 일상을 즐기는 장면을 찍고 있었다. 선유도 감독님은 조금 더 장면을 화사하게 만들기 위해서 비눗방울을 날리기로 했다. 하지만 바람 때문에 비눗방울이 화면에 잘 들어오지도 않고 방향도 컷마다 바뀌어서 문제를 만들었다. 감독님은 심각했지만 대부분의 스텝들은 빨리 이동해서 다음 씬으로 넘어가자 하는 태도로 나왔다. 몇몇 스텝들은 빨리 일을 끝내고 집에 가고 싶은 마음뿐 처음부터 작품에 대한 어떠한 애정도 없었기에 그런 말을 하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선유도 감독님은 이 장면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기에 평소와는 달리 물러서지 않았다. 나는 속으로 감독을 응원했다. 감독님은 계속 몇몇 스텝들을 설득하려 애를 썼지만 전혀 이해하려 들지 않았다. 오전 8시에 모여서 엔딩 한 씬을 찍는데 오후 3시가 되어서 끝이 났다. 이미 오전에 끝날 것으로 예상되었던 씬인데 말이다. 나는 멀리서 선유도 감독님을 지켜보았다. 감독님은 전혀 결과물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하지만 더 시간을 쓸 수 없고 다른 장소로 넘어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에 거기서 마무리되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너무 외롭고 안쓰러워 보였다. 하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미안해요 감독님>

 선유도 감독님은 촬영을 종료하고 집으로 가려는 나를 붙잡았다. 감독님은 면담을 하자고 연출봉고로 나를 데려갔다. 나는 뭐지? “심각한 건가요?” 물었다. 감독님은 아니라고 말했다. 감독님은 나에게 선물 봉투를 건넸다. “내일 회식 오실 거죠?” 우리는 촬영이 종료되는 강원도 바닷가에서 가벼운 회식이 예정되어 있었다. 나는 얼버무렸다. 갈 마음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집으로 돌아와서 나는 선물을 열어보았다. 와인하고 잔이 들어있었는데 잔에는 작품의 제목과 내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아무튼 참 섬세하고 좋은 사람이다, 내 마음은 정말 인간적으로 친해지고 싶었는데 그 많은 기간을 촬영하고도 우리는 조금도 친해지지 못했다. 감독님에게 편한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나는 강원도로 마지막 촬영을 하러 갈 준비를 하였다. 촬영은 바닷가에서 시작했다. 쉬는 시간에는 내 모니터 뒤에 있는 친구들과 사진을 찍었다. 우린 이 현장의 이방인들이다. 하지만 나와 같은 길을 가지는 마. 어디 가서 미운털 박히지 말고 너무 애쓰지 말고 살아. 사실은 이 좁아터진 현장에서 편이 갈린 다는 것 자체가 부끄러운 행동이니까 말이야. 내가 작품을 마칠 수 있었던 건 너희들 덕분이야. 진심으로 고마워. 맹세코 나는 항상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했어. 촬영이 종료되고 숙소 근처에서 회식이 준비되어 있었다. 나는 고민을 하다 회식에 참석했다. 구석에 앉아서 친한 스텝들과 조용히 술을 마셨다. 그래도 입에 술이 들어가니 기분이 금세 좋아졌다. 같은 테이블에 버스기장님도 같이 앉았는데 버스기장님은 “정말 싸가지가 없는 녹음기사가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오해했다” 는 말을 했다. 나는 누가 그런 뒤에서 그런 음흉한 말들을 하고 다니는지 쉽게 알고 있었다. 모든 촬영이 끝이 났기에 지난 일들을 웃으며 이야기했다. 나를 보기 싫어하는 스텝들은 내 웃음소리가 듣기 싫은지 금방 사라졌다. 나는 혼자 앉아 있는 선유도 감독님에게 다가갔다. “감독님 잔 한번 받아야죠” 나는 술에 취한 김에 넉살 좋게 감독님 옆에 앉았다. 나는 이미 취기가 올라 있었다. 이미 내가 많이 취했다는 것을 안 선유도 감독님은 잔에 소주를 정말 조금 따랐다. 나는 취한 김에 내 마음을 전달했다. “나는 비눗방울 씬을 찍을 때 감독님이 얼마나 속이 상하고 힘들었는지 안다. 정말 감독님의 실망한 얼굴을 보고 나도 마음이 아팠다. 다른 사람은 잘 모를 수도 있다. 그런데 나는 알고 있다.” 나의 오랜 스텝생활과 다양한 포지션을 경험하면서 나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조금 더 이해할 수가 있었다. 감독님은 내 진심을 아는 건지 눈물을 흘렸다. "더 좋은 스텝들을 만나보세요. 더 다양한 스텝들과 일해 보세요. 좋은 시간이 올 거예요." 감독님은 민망한지 눈물을 닦았다. 감독님이 더 좋은 사람들 스텝들을 만나서 승승장구하기를 바랄 뿐이다. 나는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곧 숙소로 들어갔다. 숙소에서 자는 꿈에서도 나를 싫어하는 스텝들은 나를 괴롭혔다. 그럼에도 오랜만에 너무 달게 잠이 들었다. 노인과 바다의 산티아고 아저씨가 집으로 돌아와 잔 사자잠이 이런 잠일까 싶다. 어쩌면 산티아고 아저씨도 잠을 자면서 상어와 싸우고 있었을까. 촬영은 그렇게 끝이 났다.


<촬영을 마치고>

 나는 치열한 촬영 현장을 떠나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다. 나는 너무 질려서 종방연에 참여하지 않았다. 대신 꿈에서 나는 선유도피디님을 만났다.  뒤돌아 있던 여자가 고개를 돌리는데 선유도 감독이었다. “어? 감독님” “기사님” 선유도 감독은 해맑게 웃으며 나에게 다가왔다. 우리는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데 꿈에서 깨고 말았다. 촬영을 마치고 나는 최대한 단순하게 몇 주를 보내었다. 2주 동안은 누구와도 연락을 하지 않고 집에서 조용히 지냈다. 오늘과 내일, 하루하루가 구분도 잘 가지 않는다. 그렇다고 괴로움과 죄책감도 느끼고 싶지 않다.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했다. 오랜만에 영화관에 영화를 보러 갔다. 존윅은 영화를 보는 내내 시원하게 총을 쏘았다. "팡!! 팡!!" 존윅이 아무런 도덕적 고민을 하지 않고 총을 쏘며 적을 쓰러뜨리는 모습이 정말 통쾌했다. 나는 만족감에 영화관을 나왔다. "와 대단해! 그러니까 이 모든 게 한 강아지의 안타까운 죽음으로 시작된 거잖아!" 영화관을 나와서 집으로 걸어가는데 드라마촬영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나는 조금 떨어져서 그들이 촬영을 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나는 어느새 마음의 상처를 회복하고 즐겁게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기사님" "?" 스텝 중에 나를 알고 있는 친구가 있었다. 나는 정체를 들켜버린 007이 된 느낌을 받았다. 나는 방해가 되는 것 같아 가벼운 인사를 나누고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촬영현장을 지켜보며 나는 깨달았다. "나는 다시 촬영 현장을 그리워하고 있구나" 운이 좋으면 또 드라마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을까. 하지만 더 이상 세상에 나를 찾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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