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적금

by 홍미

할아버지가 건강하셨던 시절엔, 직장인인 손녀만큼이나 바쁜 하루를 보내셨다.

아침 일찍 거실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키고, 베란다에 있는 화분에 물을 주는 것이 첫 일과였다.

출근 준비로 정신없는 손녀에게 아침 뉴스로 확인한 날씨를 알려주는 것도 꽤 중요한 일이었다.


늦은 아침식사를 마치고 나면, 베란다 한쪽에 놓인 의자에 앉아 창문으로 바깥사람들을 구경하곤 하셨다.

그러다 심심하실 때면, 할머니의 잔소리를 뒤로하고 연장과 판자를 꺼내 금방 뚝딱거리며 무언가를 만드셨다.

내 방 화장실 세면대에 탈부착으로 만들어진 작은 선반이 할아버지의 가장 멋진 작품이었다.


딱히 살 것이 없어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할머니와 함께 산책 겸 시장 나들이도 가셨다.

요즘 물가가 올라 다 비싸다고 말씀하시면서도, 할머니가 좋아하는 강냉이는 늘 빠지지 않고 사 오셨다.

그래서 가끔 주말에 늦잠을 자고 있으면, 신발장에서부터 들려오는 비닐봉지 소리에 난 잠이 깼다.

손녀가 좋아하는 시장에서 파는 달달한 떡볶이와 할아버지가 좋아하시는 순대볶음.


이렇게 소소하지만 알찬 일상을 보내신 할아버지에게 가장 행복한 취미는 '손녀 적금 내러 가기'였다.

매년 1년 만기로 적금을 들었는데, 나는 일명 젊은이 답지 않게 자동이체를 이용하지 않았다.

손녀 덕분에 은행도 가고 또 마실도 간다면서, 행복해하셨던 할아버지의 취미를 지켜드리고 싶어서였다.


매달 적금에 넣을 돈을 뽑아 드리면, 돈이 많이 모여서 나중엔 돈방석에 앉으면 어쩌냐는 걱정도 하셨다.

그러면 나는 세상에서 가장 멋진 돈방석에 앉게 해 드릴 테니, 항상 건강만 하시라고 응석을 부리곤 했다.

적금이 만기 되면 다 같이 외식을 하러 가자고 약속했던 오늘, 나는 할머니와 단 둘이 은행에 왔다.


만기 된 적금에 붙은 이자를 가지고 집에 돌아가자, 할아버지는 낮잠도 안 주무시고 우릴 기다리고 계셨다.


'할아버지, 나 이자 엄청 많이 나왔어!'

'그래, 1년 동안 잘 모았네, 이제 또 공책에 적어야지'

'오늘 날짜 적고.. 다음 적금 만기일도 옆에다 적어라..'

'항상 사람이 정직하게 살아야 해, 돈 간수도 잘하고...'


벌써 7년째 적어 온 적금 공책은 할아버지와 나만의 비밀노트 같은 것이었다.

우린 맨날 이 공책에 기록하면서, 다음에 이자를 받으면 무엇을 할지 둘만의 약속에 설레곤 했다.

작년 이맘때, 할아버지와 함께 은행에 갔던 그저 평범했던 그날을 생각하니 또 마음이 시큰거렸다.

최대한 밝게 웃으며, 치료 다 끝나면 가족여행도 가고 외식도 하자고 말씀드렸다.

몸은 예전 같지 않지만, 할아버지는 그 순간 여느 때와 다름없이 밝게 웃으셨다.


혼자 공책을 가지고 방에 돌아와, 밤이 다 가도록 펑펑 울었다.

내년 적금이 만기 되는 날까지만이라도, 할아버지가 우리 옆에 계셨으면 좋겠다고 빌고 또 빌었다.

'정직하게 살아야지, 돈 간수도 잘하고'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자꾸만 귀에 맴도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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