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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퍼플수니 Jun 04. 2024

제6화. 보라색 좋아한다고 나에게 싸이코라 한 선생님.


16.


어린 시절 오래된 잔상처럼 남은 한 가지 기억.



그 기억 속 나는 넓은 교실 바퀴가 달린 화이트보드 앞 바닥에 7살 친구들과 옹기종기 모여 앉아있었다. 그 앞에 유치원 이름이 자수 놓여진 예쁜 꽃무늬 레이스 앞치마를 입은 선생님도 서있었다. 그 선생님은 피아노로 내가 좋아하는 '가을길'이라는 동요를 그렇게 잘 치셨다. 선생님덕에 내 꿈이 한 때는 피아노 예쁘게 치는 유치원선생님이였을 정도로. 모든 아이들이 선생님의 사랑을 독차지하기 위해 선생님 앞에서는 늘 저마다 모범적인 모습으로 바르게 앉아있었다.


"좋아하는 색깔로 자신의 성격을 알 수 있대요. 우리 친구들은 무슨 색을 가장 좋아하나요?"


90년대 유행했던 댕그란 큰 안경알이 특징인 안경을 쓴 선생님이 아이들의 참여를 이끌어내기 위해 솔톤으로 밝게 말씀하셨다. 선생님의 질문이 끝나자마자 무질서하게 저마다 자신이 좋아하는 색깔을 말했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소리지르며 분홍색과 파란색을 말했다. 나를 제외하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색은 보라색이기에 나는 오른팔을 번쩍 들고 "보라색이요!!!"하고 큰소리로 말했다. 뭔가 오묘하고 신비로운 느낌이 좋아서 몽상가적인 나에게 많은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게 하는 색이기에 지금까지도 보라색은 My all time favorite color이다.


내 대답을 들은 선생님은 알수 없는 미소를 띠며 말씀하셨다.


"보라색 좋아하면 싸이코인데?"


어렸던 나는 그 말이 무슨 말인지 몰랐다. 그래서 "그게 뭐예요?"하고 물으니 선생님이 또 웃으면서 대답하셨다. 


"정신병자라고."


나는 이 말을 초등학생이 되어서야 이해했다. 난 그 선생님을 엄청 좋아했는데, 선생님은 왜 그런 말을 하셨을까? 배신감이 느껴졌지만 이미 유치원을 졸업한 후라 물어보지 못했다. 나중에 커서 성인이 된 후 엄마에게 지나가는 말로 이 이야기를 했었다. 엄마는 길길이 뛰며 왜 그때 말하지 않았냐고 말했지만 그때의 나는 싸이코가 뭔지 정신병자가 뭔지 이해하지 못했다.


아직도 그 선생님 이름도 또렷하게 기억난다. O성숙선생님. 이름은 성숙인데 성숙하지 못한 선생님의 그 말씀이 내가 가장 좋아하는 보라색을 볼 때마다 30년이 지난 지금도 문득문득 떠오른다.


'내가 정말 정신병자라서 우울증에 걸린 건가..?' 하고.






17.


그 후로 30년이 지난 얼마 전, 어머님이 친구분들과 어딜 다녀오셨다며 카톡으로 묶음사진을 왕창 보내주셨는데 그 관광지의 테마는 보라색인지 어머님이 찍으신 사진 곳곳에 보라색이 그득했다. 


[제가 보라색을 좋아해서 그런지 너무 예뻐요! 어머님 덕에 제가 집에 가만히 앉아 눈호강을 다하네요ㅎ]


답장을 보내자마자 1이 없어지고 바로 어머님의 답장이 왔다.


[글쿠나. 미인이 보라색 좋아한다했는데. 역시!]


어머님의 답장에 달갑지 않던 7살의 기억이 떠올라 마음이 뭉클해졌다. 보라색을 좋아하면서 처음 듣는 말이었고 어머님의 따뜻한 답장 하나가 며칠동안 내 마음을 뜨끈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어머님 덕에 기분 좋은 한 주를 보내고, 어젠 병원 상담일이라 아이를 등원시키고 바쁘게 외출채비를 했다. 내가 좋아하는 연보라색 데님스커트를 입고 화장대 앞에 섰다. 의도하고 입은 건 아니었지만 머릿속에 어머님의 '미인은 보라색 좋아한다했는데. 역시!'라는 말이 다시 맴돌았다. 거울 앞 나의 모습은 최근 약 10킬로가 넘게 빠졌지만 아직도 배에 그득한 뱃살들에 거울 앞에 선 내 모습이 부끄러워 잠시 고민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살 빠졌는데 헐렁한 옷을 입긴 싫어 그대로 집을 나섰다.


때마침 남편이 내 차를 끌고 지방출장을 가는 바람에 몇 년만에 버스를 타게 되었다. 이놈의 신도시는 교통인프라가 별로라 버스를 타고 싶다고 해도 탈 수 있는게 아니였지만, 운 좋게 배차시간이랑 맞아떨어져 정말인지 오랜만에 버스를 탔다. 오랜만에 탔음에도 매일 타던 그 시절처럼 자연스럽게 뒷문 바로 뒤에 있는 자리 착석해 창밖을 바라보았다. 묵은 감성이 올라오려는 찰나 6월의 따뜻한 햇살이 내 자리 창문을 두드렸다. 햇살은 안그래도 배차시간 맞추겠다고 뛰어 덥혀진 내 몸을 관통하듯 내리쬐었고 괜히 내 연보라색 데님 롱스커트를 덖어대듯 부채질하며 생각했다. '6월에 입기엔 좀 더운 옷인가?' 하며.


상담 후 속이 후련하고 기분이 상쾌해진 용돈카드로 아이가 하원하면 달콤한 도너츠를 간식으로 줘야지 하는 마음에 던킨에 들렸다. 내가 딸랑거리는 출입문을 열고 들어가자 인상 좋은 주인 노부부가 기분 좋게 인사로 맞아주셨고 도너츠를 고르는 동안에도 기분 좋은 시선으로 도너츠를 고르는 나를 지켜보는 느낌이 들었다. 따뜻한 시선에 '기분이 이렇게 좋지?' 하며 나도 모르게 흥얼거리며 아이가 좋아할 만한 도너츠를 골라 계산대에 가져갔다. 할인카드 있으시냐, 해피포인트는 적립하시냐라는 질문에 멋쩍게 없다고 웃으며 대답하니 계산대 옆에 서서 포장을 도와주시던 주인 할머니가 말씀하셨다.


"아이고.. 보라색 치마가 은은하게 너무 잘 어울려요."


부끄러운 마음에 감사하다고 말하며 머리를 긁적이자 주인 할아버지가 만담 하듯 할머니 말씀에 이어 말씀하셨다.


"안 그래도 나도 그 말을 하고 싶었는데 뺏겼네요. 허허. 보라색이 원래 참 예쁜 색이거든요. 나도 보라색을 참 좋아하고 예뻐해서 입으면 난.. 거.. 참.. 어찌나 안 어울리던지.."


주인 할아버지 말씀에 어쩔 줄 몰라 말없이 웃는데 이번에는 옆에서 유산지에 도너츠를 포장하며 주인 할머니가 할아버지 말씀을 이어받았다.


"그니까요. 원래 보라색이 어울리기 쉽지가 않은데.. 고객님이랑 그 연한 보라색치마가 참 잘 어울리네요. 고와요. 예뻐요. 예뻐."


보라색을 좋아한다는 이유로 말 같지도 않은 이상한 소리를 들었던 나의 어린 시절에 나도 모르게 큰 상처가 있었는지 두 분의 따뜻한 말씀에 뭔가 마음이 치유되는 느낌이 들었다. 보라색을 좋아하면서 이렇게 좋은 말들을 들을 날이 오다니. 감사한 마음에 소심한 나지만 용기 내 평소보다 크게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많이 파세요." 말하고 뒤돌아 나오는데 복도식 매장 앞 유리창에 내 모습이 비쳤다. 자신감 없이 구부정한 모습으로 걸어 나오는 내 모습. '이게 평소의 내 모습이겠지.' 생각하니 조금은 슬펐다. 하지만 방금 전 예쁘다는 소리 때문인지 없던 자신감이 생기는 기분이 들었다. 뒤에서 나를 바라보고 계실지 아닐지 알 수 없지만 괜스레 허리를 쭉 펴고 자세를 고쳐 잡았다. 그렇게 도너츠 가게를 나와 그 옆에 있는 다른 매장 유리창에 비친 내 모습을 보는데... 당당하게 허리를 펴고 걷는 내 모습이 자신감이 있어 보여서 그런지 괜스레 예뻐 보였다.


I am 퍼플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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