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밥 May 15. 2024

만화영화 <홍길동>의  기억  그리고 추억

그 시절의 추억 그리고 영화, 애니메이션 <홍길동>


홍길동 (1967)


처음 본 영화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대답하기 쉬울 것 같지 않다. 오래된 기억을 되살려내기도 쉽지 않을뿐더러 자신의 의지가 반영되기에는 어린 나이일 테니까 말이다. 대부분 어릴 때 어른들 따라가서 보는 게 첫 번째 감상 영화가 될 것 같아서다. 어른 손에 이끌려가서 본 영화가 아니라 자신이 보고 싶어 한 영화였다면 기억에 남기 쉽지 않을까 싶긴 한데... 거침없이 나의 첫 영화라고 얘기하는 게 생각할수록 쉽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서 곰곰이 따져볼 시간을 가져보았다.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에 본 영화는 내 기억이 아니라 어른들의 기억에 따른 것이 많아서 제목조차 기억 못 하는 게 대부분이다. 꽤 유명한 영화가 아닌 바에야 이슈로 삼기도 쉽지 않으니 관심 밖으로 밀려나기 때문 아닐까. 초등학교 가기 전에 본 영화 중 제목을 분명하게 기억하는 영화는 단 두 편이다. 신성일, 고은아 주연 영화 <소령 강재구 (1966)>와 신동우 원작 만화영화 <홍길동 (1967)>이 바로 그것이다. 그중에서도 너무나 보고 싶어서 조르고 졸라서 갔다고 침 튀겨가며 주장해 왔던 영화는 <홍길동>이다. 그런데 세월이 갈수록 과연 그랬을까 라는 의심이 슬그머니 들었다. 그 이후로 본 적이 없긴 하지만 생각나는 장면이 거의 없다시피 하니 말이다. “기억은 뇌가 쓴 소설”일 수도 있다는 뇌과학의 해석이 그런 생각을 부추긴 점도 있다. 언제 봤는지 분명히 알고 있다고 생각해 왔는데 그게 아니란 사실을 알고 충격 먹은(?) 경험도 있어서다.


왜 <홍길동>을 오로지 나의 의지로 봤다고 기억하게 되었을까?    

  





우리나라 최초의 장편 애니메이션 <홍길동>이 복원되었다는 기사를 접했을 때 너무나 기뻤다.


나의 잠든 기억을 깨울 기회가 왔다.
생각나는 장면은 얼마나 될까?
지금 봐도 재미있을까?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기억이 거의 없음에도 불구하고 추억의 영화라고 꼽으라면 첫 번째라고 생각해 왔던 영화니 더욱더 그랬다. 생각은 그랬지만 복원된 <홍길동>이 영화제에서 공개되고, DVD로 출시되었다는데도 보지를 못했다. 아니 차라리 보지 않았다고 하는 게 솔직한 표현이다. 애써 보겠다는 열의가 부족해서 생긴 일이니까. 몇 년 전에 한국영상자료원에서 <홍길동>을 우리나라 버전으로 재차 복원한 영상을 공개했을 때에야 보게 되었다. 처음 봤던 때를 자랑하던 자부심은 어디 갖다 버린 건지 부끄러울 따름이었다.


어쨌든 수십 년 동안 내 인생의 첫 번째 영화라고 주장해 왔던 <홍길동>을 본 것이다. 대형 스크린을 갖춘 영화관에서 보진 못했지만 120인치 정도 되는 스크린으로 보았으니 나름 격식은 갖추고 본 셈이다. 우선은 반가운 마음에 보듬고 쓰다듬고 싶은 마음으로 지켜보겠다는 생각이 가득했다. 영화가 시작되자 노래가 들려왔다. 노래 분위기가 북한의 노래 같다는 느낌인 데다 가사건 멜로디건 한 소절도 알지 못하는 노래였다. 캐릭터들의 말투는 그런대로 익숙한 느낌은 있지만 <홍길동>의 기억 때문이 아니라 예전 영화나 TV에서 접했던 경험 때문이었다. 그림체는 상당히 투박해 보여서 50년이 넘은 작품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면 살짝 당황스러웠을 것 같았다. 다시 만난 <홍길동>을 보기 시작하면서 여러 모로 낯선 느낌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렇게 지켜보는 와중에 드디어 눈에 다가오는 것이 있었다. 익숙하다기보다는 결코 낯선 느낌이 아니어서였다. 기억이 실오라기만큼이나마 남아있는 증거라고 주장하고 싶은 장면이 나타난 것이다. 만화영화 <홍길동>하면 기억처럼 떠올랐던 것은 달밤, 관모를 쓴 아버지, 초립을 쓴 아들이 보이는 그런 그림이었다. 흐릿하게나마 <홍길동>에서 비롯된 내 기억이라고 믿어왔던 유일한 그림이었다. 그 그림과 비슷한 이미지가 눈앞에 펼쳐진 것이다.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하고, 라는 대사가 나오는 바로 그 장면이었다.


그럼 그렇지!
<홍길동>에 대한 기억은 한 톨이나마 남아 있었어!


당시 내 의지의 존재를 확인시켜 준 장면을 찾은 것이었다. 기적처럼 반가운 장면이 지나간 이후에는 오만함이 발동하기 시작했는지 이 장면 저 장면 이 대사 저 대사 몽땅 보고 들은 것만 같았다. <홍길동>의 재감상에 대하여 스스로 평가하자면, 감격의 해후로 비롯된 기억의 굴레 속에서 헤매고 다닌 시간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 속에서 나를 찾아내겠다는 발버둥이었던 셈이다.


<홍길동>은 개인적인 의미를 떠나서 지금 봐도 재미있게 볼 수 있는 애니메이션이었다. 우리나라의 첫 장편 애니메이션인 만큼 다양하게 보여주려는 시도들이 눈에 띄었다. 신동우 화백이 만들어 낸 ‘차돌바위’ 캐릭터의 활약과 우리에게 친숙한 동물인 "호랑이"를 신성한 영물로 등장시킨 것은 신박한 아이디어였다. 홍길동이 자신의 부모에게 “이번 일에 곱단이 아가씨의 공이 제일 컸습니다.”라며 곱단을 소개하는 부분도 인상적이었다. 원작 ‘풍운아 홍길동’에서 적지 않게 보여줬던 곱단의 활약 때문이었을 것이다. 당시로선 착하지만 약하게만 보였던 여주인공 역할과는 달랐던 것이다.      





다시 나의 <홍길동> 시절로 돌아가 보겠다. 어떻게 <홍길동>을 보게 되었는지 조그마한 근거라도 찾아보기 위해서다. 영화를 언제 어디서 보았는지는 모르지만, 누구와 보았는지는 알고 있다. 할머니와 같이 본 영화다. 그렇다면 할머니에게서 ‘홍길동’ 이야기를 들었기에 선택하게 된 것일까? 할머니의 옛날이야기 하면 생각나는 건 ‘지성이 감천이’다. 잠들 때만 되면 베갯잇 만지며 할머니를 졸라서 듣고 또 들은 얘기는 ‘지성이 감천이’ 밖에 없었다. 할머니로부터 '홍길동' 얘기를 들었을 리가 없다면,  <홍길동>에 동반하긴 했지만 할머니의 영향은 아닌 것 같다.


그렇다면 <홍길동>을 소개해 줄 수 있는 후보는 좁혀진다.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은 아버지와 사촌 형이다. 두 사람이 후보로 떠오르게 된 이유는 만화책에 있다. 나는 글도 모르면서 날마다 만화책 보려고 졸랐던 아이였다. 아버지는 잡지에 실린 만화를 읽어주었고, 사촌 형은 만화책을 빌려와서 보여주었다. 만약 <홍길동>을 보기 전에 ‘홍길동’을 알았다면 만화책 때문이지 않았을까. 그래서 찾아보니 신동우 화백의 ‘풍운아 홍길동’은 1966년부터 4년 동안 소년조선일보에 연재되었다고 한다. 아버지의 잡지와 사촌 형의 단행본만 기억나니 신문에서 본 건 아닌 것이다. ‘풍운아 홍길동’이 단행본으로 묶여 출간된 해를 보니 영화 <홍길동>보다 뒤인 1969년이었다. 그러니 읽었다고 해도 <홍길동>을 볼 이유는 되지 못한다. 결과적으로 <홍길동>이란 영화를 내가 미치도록 보고 싶어 했을 이유를 찾지 못한 셈이다.


신동우 화백의 홍길동 만화책은 초등학교 시절에 어린이 잡지의 연재만화로도 단행본으로도 보았다. 몇 년 전에 단행본으로 재출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구입해서 보기도 했다. 그 정도로 좋아했던 만화가 '풍운아 홍길동'이었기에 최고의 주인공은 홍길동, 최고의 만화가는 신동우 화백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만화에 흥미를 느끼도록 읽어준 이도 아버지였고, 신동우 화백의 <삼국지>나 만화로 만들어진 역사책 등 만화를 선물해 준 이도 아버지였다. 어린 동생이 만화 좋아하는 게 기특해 보였는지 자주 볼 수 있는 기회를 준 이는 사촌 형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여섯 살짜리 꼬마에게 우리나라 첫 번째 만화영화 <홍길동>을 추천해 준 이가 있었다면 뻔하지 않은가. 같은 집에 살면서 만화를 보여주고 읽어준 가족밖에는.

 

만화영화 <홍길동>은 어린 나에게 만화를 읽어주고 보여준 가족의 선물이었음에 틀림없다. <홍길동>에 대한 기억과 함께 지금은 곁에 없는 어린 시절 가족의 온기가 느껴지는 추억의 소환은 오십여 년 만에 해후하여 너무나 반가웠던 <홍길동>의 선물이었다.



작가의 이전글 나의 첫 번째 영화음악 음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