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 속 출근길을 해 봤어

5월 9일 출근길

by 박유재

붉은 망토를 두른 사제의 얼굴이 나타난다. 사제의 얼굴은 검고 차갑다. 사제의 앞으로 갑옷을 입은 병사들이 양옆으로 도열해 있다. 가운데에는 말에 탄 반라에 가까운 여인이 몸을 앞으로 기울인 채 지친 모습으로 다가온다. 한 병사가 여인을 거칠게 땅으로 끌어내린다. 병사는 화염으로 둘러싸인 제단으로 여인을 끌고 가고 여인은 제단에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아 기도한다.

"엘께서 내 눈을 어루만져 두려움을 거둬 주시고, "

여인의 등에 선홍의 글씨가 나타난다. 여인은 일어나 제단의 중앙으로 걸어간다.

"이로써 반드시 일어날 일들을 알게 하시나니, "

여인의 얼굴은 서서히 밝아지며 상스러운 웃음소리를 내고 생기 있는 모습으로 변해간다.


성스러운 성의 실내로 병사들이 방패를 들고 조심스럽게 들어온다. 한가운데에는 비검이 꽂혀 있다. 검은 손잡이 위로 해골문양이 새겨졌고 양날은 두껍고 날카롭다.

"첫째 날에 오래되고 잊혀진 것들이 돌아와, "

갑자기 천정이 무너지며 빛이 쏟아진다. 빛이 번쩍이는 가운데 화려한 갑옷으로 중무장한 오딘이 나타나며 빛이 사라진다.

"세상을 피로 물들이고, 기쁨의 노래를 멈추게 하리라."

병사들이 오딘에게 달려들고 오딘도 마주 달려오며 검을 뽑는다. 비검은 바닥을 가르며 불꽃을 일으키고 오딘은 한 바퀴 현란하게 몸을 회전하며 비검으로 병사들을 가격한다.

......


어제 사거리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길 건너 정차한 버스 옆면에 RA***II 게임광고가 커다랗게 붙어 있었다.

광고판 한가운데에 서양인으로 보이는 남자의 얼굴이 큼직하게 보였다. 더벅머리는 목 아래까지 구불텅하게 내려왔고 콧수염과 턱수염이 두텁게 자라 있었다. 광대뼈 아래 볼은 옴팍 들어가 얼굴은 메말랐고 눈빛은 눈물을 머금은 듯 침울해 보였다.

'낯이 익은데…?'

자세히 보니 우리나라 연예인이었다.


오늘도 출근을 한다.

골목길을 나서 사거리로 방향을 틀었다. 저 멀리 사거리 신호등이 녹색이다.

내 앞에 걸어가던 한 젊은 여자가 뛰기 시작했다.

'아침 시작부터 뛰어야 하나…'

평소 걸음으로 걸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신호등 아래 숫자가 나타나더니 바뀌기 시작했다.

'24, 23, 22, 21, …'

숫자는 생각보다 빠르게 줄어들었고 거리는 가까워지지 않았다.

'18, 17, 16, …'

여자는 뛰어가서 사거리를 건너더니 시야에서 사라졌다.

'12, 11, 10, 9, …'

사거리를 십여 미터 앞두고 숫자가 사라지며 신호등이 바뀌었다.

사거리가 한눈에 들어올 정도로 다가섰을 때 신호등이 바뀌길 기다렸다는 듯이 움직이는 OOO번 버스가 보였다.

'낭패로군!'


골목길을 나서 사거리로 방향을 틀었다. 저 멀리 사거리 신호등이 녹색이다.

나는 허리를 숙여 몸을 웅크렸다가 뛰어오른다. 옆쪽 가로변 아파트의 3층을 넘어 4층까지 몸이 솟구쳤다.

“어어어 어어어어.”

이런 내 능력이 아직은 낯설다. 4층의 창문 안에서 한 여인이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보더니 몸을 숨겼다. 나도 놀람과 동시에 미안하다는 듯 두 손을 절레절레 흔들며 지나갔다. 앞으로 시선을 돌리고 몸이 빠르게 내려감을 느끼며 팔을 휘저었다. 땅에 닿는 순간 무릎을 꿇으며 사뿐히 내려앉았다.

다시 한번 뛰어올랐다. 왼쪽의 야트막한 집들의 지붕들이 눈 아래로 어찔하게 보였다.

"야호!"

다시 착지하니까 사거리가 바로 앞이었다. 갑자기 나타난 내 모습에 바로 옆 사람이 움칫하며 놀라더니 의아한 눈초리로 나를 쳐다봤다. 나는 태연하게 사거리를 건너간다.

유치한 상상에 머리를 세차게 흔들고 실소를 머금었다. 사거리 신호등은 그때까지 바뀌지 않고 있었다.


버스를 타고 한 정거장을 지나갔다. 오른쪽 창문 너머로 두터운 녹지 한가운데에서 일을 하는 사람이 보였다. 일꾼은 번들거리는 앞치마를 무릎 아래까지 두르고 있었다. 색 바랜 짙은 점퍼를 단단히 여미고 챙이 넓은 모자를 썼다. 얼굴에는 마스크를 쓰고 선글라스 보안경을 착용했다. 보안경이 햇빛을 반사하며 번쩍거렸다. 어깨에는 금속성의 장비를 메고 장비와 연결된 긴 장대를 두 손으로 잡은 후 바닥을 휘젓고 있었다.

“겡엥엥엥 엥엥엥엥.”

가볍게 탈탈거리는 엔진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벌써 제초 시기로군.'

일꾼의 복장과 움직임이 가상 속 인물처럼 느껴졌다.

외계의 황량한 대지와 혼탁한 대기 속에서 뭔가를 탐색하는… 긴장감이 느껴지는…

또 허튼 상상이 떠올랐다. 큭큭.


돌곶이역 버스정류장에 내려 지하철역으로 걸어갔다. 길 건너 버스의 광고 문구가 커다랗게 눈에 들어왔다.

'갤** AI IS HE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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