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 그땐 내가 미안했어
우탄이의 신입 연수 일정이 반 정도 지나갔을 때 우리는 다음 거주지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아직 정확한 발령지는 정해지지 않았지만 수도권일 확률이 높아 우선 서울을 중심으로 집을 보러 다녔다. 신혼집이 사택이었기에 우리로서는 처음 스스로 집을 구하는 것이었다. 우리가 고려했던 집들은 다음과 같다.
1. 돈암동 대단지 아파트 20평대 (전세)
어머님의 추천으로 시댁과 멀지 않은 동네의 대단지 아파트를 보러 가게 됐다. 입구부터 시작되는 가파른 언덕과 엄청난 단지의 크기에 입이 떡 벌어졌다. 부동산에서는 20평대 매물 세 군데를 보여줬는데, 다음 집으로 갈 때마다 엘레베이터를 타고 주차장으로 내려가 다시 계단을 오르는 복잡한 모험을 해야 했다.
워낙 높은 곳에 있어서 웬만하면 앞이 뻥 뚫린 뷰라는 점과 단지 내에 어린이집, 유치원, 초등학교가 있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30% 정도의 호감을 가지고 부동산에 돌아갔더니 사장님 자리의 전화가 울렸다. 사장님이 정신없이 짧은 통화를 끝내자 곧바로 다음 전화가 걸려오기를 서너 번, 뭔가 조급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눈코뜰 새 없이 바쁜 사장님에게 빨리 결론을 지어드려야 할 것 같았고 계속해서 걸려오는 전화에 우리 집을 뺏길 것만 같았다. 우탄이와 내가 결심의 눈빛을 주고받은 그 순간, 어머님이 잠깐 나오라고 우리를 불러내셨다.
어머님이 해주신 얘기는 간단했다. 이 집이 베스트는 아니다, 지금 꼭 계약할 필요는 없다. 이 단순한 사실을 생초보인 우리는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머님과 바깥바람 덕분에 정신을 차리고 사장님께 명함을 받아 부동산을 나왔다.
교훈: 처음 집을 구하러 다닐 때는 꼭 유경험자와 함께 갈 것, 그 자리에서 계약하지 말 것
2. 마장동 구축아파트 18평 (매매)
우탄이는 첫 집을 보고 생각이 많아진 듯 하더니, 이참에 집을 사는 건 어떠냐고 물었다. 당시의 재테크의 '재' 자도 몰랐던 나는 '빚까지 내서 집을 산다고?' 라는 생각을 가지고 예산에 맞는 집을 보러 갔다. 우리가 보러 간 곳은 마장동의 18평 아파트였다.
단지가 크지 않아서 매물로 나와 있던 1층 집 하나만 보게 되었는데, 30년 된 아파트를 저녁에 보러 가니 왠지 어둡고 으스스하게 느껴졌다. 게다가 구축 아파트의 18평 구조는 너무 답답하게 느껴졌다. 집을 보고 나와서 나는 "저렇게 좁고 낡은 집을 빚으로 사서 평생 살고 싶지 않다"고 말했고 우탄이도 알겠다고 했다. (여보, 그땐 내가 미안했어... 그 집 지금 매매가가 그때의 1.5배가 됐더라...)
26살의 나는 집을 거주지 이상으로 생각하지 못했다. 당장 우리가 생활하기에 편리한 것만이 기준이었기에 그 이상의 가치를 판단하지 못했던 것이다.
투자의 관점에서 마장동 구축아파트는 역세권, 평지, 재건축 가능성까지 갖춘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는데 말이다. 그리고 숭이가 어릴 때라 입학 전까지 6년 정도 살다가 매도하고 시세 차익으로 초등학교가 가까운 곳으로 옮겼으면 가장 좋은 시나리오였을 것이다.
하지만 재테크는 부부의 합의가 필수이고, 그때 우탄이가 자기 뜻대로 밀어붙였더라면 그 집에 생활하는 동안 나의 불만이 커져갔을 것이다. 그리고 이 때 매매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훗날 무주택자로서 청약에 성공했으니 전화위복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마장동 근처를 지날 때마다 나는 여전히 우탄이에게 심심한 사과를 전한다. 쏘리!
교훈: 집은 낮과 밤에 한 번씩 보러 갈 것, 집을 거주지와 자산이라는 두 가지 관점에서 볼 것
3. 상왕십리 2층짜리 상가주택 (전세)
마장동 아파트를 보여주신 부동산 사장님께 며칠 뒤 연락이 왔다. 상왕십리 쪽에 단독주택이 있는데 우리 예산에 맞다고 보러 오라는 것이었다. 나는 사정이 있어 못 가고 우탄이와 어머님이 그 집을 보러 갔다. 우탄이는 주택을 돌아보며 실시간으로 나에게 집 상태를 설명했는데 꽤나 들뜬 목소리였다. 남다른 선택을 즐기는 친구라 흔하지 않은 집 구조가 맘에 들었던 모양이다.
나중에 어머님께 들어보니 그 집은 상가 옆에 붙어있는 복층 건물이었고, 내부는 나쁘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뒷문으로 나가면 바로 가파른 절벽이 있어 아이를 키우기에 위험할 것 같아 우탄이를 말렸다고 하셨다. (어머님 덕분에 여러 고비를 넘겼다.)
교훈: (다시 한 번 강조) 처음 집을 구하러 다닐 때는 꼭 유경험자와 함께 갈 것
4. 분당 야탑동 구축아파트 15평 (전세)
그러는 동안 우탄이의 발령지가 분당으로 정해졌다. 우리는 회사가 있는 야탑역에서 도보 10분 거리의 구축아파트 15평을 보러 갔다. 옛날에 유행하던 거실 겸 안방 하나, 작은 방 하나, 화장실 하나로 이루어진 구조였다. 전에 살던 사람들이 청약에 당첨돼 일찍 나간 상태라 집이 비어있었고, 세입자임에도 불구하고 그 분들이 셀프로 페인트칠에 문고리까지 바꿔 놓아 전체적인 분위기가 세련된 느낌이 들었다.
집의 생김새가 마음에 들자 다른 모든 것들이 긍정적으로 보였다. 1층이라 아이 키우기 좋고, 남편 회사와도 가깝고, 근처에 어린이집도 많고, 자연 환경도 좋고, 등등... 그렇게 콩깍지가 씐 상태로 우리는 전세 계약을 하게 된다.
교훈: 집의 메이크업이 아닌 민낯을 보려 노력할 것!!!
사진으로 알 수 있듯이 우리는 선택지 중 가장 작고 구조도 가장 안 좋은 집을 골라 그 곳에서 2년 간 전세로 살았다.
예쁘장한 이 집에서의 생활이 어땠는지는 다음주 금요일에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