웰컴 투 시월드
영원히 오지 않을 것 같던 우탄이의 전역 날이 되었다. 그 말인즉 우리는 곧 Y군의 사택을 비우고 새로운 집을 찾아 이사를 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우탄이는 사전취업을 한 상태라 전역 후 3개월 간의 신입 연수를 받고 발령지가 정해질 예정이었다. 우리는 연수 기간 동안 서울에 있는 남편의 본가에 머무르며 이사할 집을 알아보기로 했다.
어머님이 먼저 집이 정해질 때까지 들어와 있으면 어떻겠냐고 여쭤보셨고, 나와 우탄이 모두 감사히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엄마를 포함한 주변 사람들은 시댁에 들어가 산다는 말에 걱정했지만 나는 전혀 걱정되지 않았다. 오히려 어머님, 아버님이 힘들지 않으셨을까..?
시댁에 들어가던 날, 도착한 우리를 보고 놀라던 어머님의 표정이 잊히지 않는다. 당분간 지낼 간단한 짐만 가지고 올 거라 생각하고 계셨는데 우리가 대단한 짐을 가지고 나타났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영화 번역 작업을 위한 데스크톱, 숭이의 간이침대, 아기 매트, 기저귀와 장난감이 들어있는 수납장들까지...
이렇게 저렇게 늘어난 짐을 차 두 대에 가득 싣고 왔으니 놀라실 수밖에!
다행히 집이 넓은 편이었고 어머님, 아버님이 많이 배려해 주신 덕분에 우리 세 식구는 가장 안쪽 큰 방과 그 앞의 짧은 복도(?)를 쓰게 되었다. 방에는 큰 침대 옆에 아기 침대를 놓고 생활하고 복도의 붙박이 화장대에 데스크톱을 놓고 밤마다 번역 작업을 했다.
우탄이는 주중에 합숙 연수를 갔다가 주말에만 돌아왔지만 나는 시댁에서 꿀 같은 시간을 보냈다. 외딴곳에서 말 그대로 독박육아를 해야 했는데 이제는 집안일도, 육아도 도와주는 손들이 생겼기 때문이다.
어머님은 아침마다 내가 잠에서 깬 숭이를 안고 거실로 나오면 나는 들어가 쉬라고 하시고 아이를 봐주셨다. 낮에는 숭이를 돌보고 밤에는 번역 작업을 하느라 늘 잠이 부족했던 내게 가장 절실한 도움이었다.
그리고 숭이가 열경련을 일으킨 날 내가 놀라서 아무것도 못하고 있을 때 지나가던 경찰에게 부탁해 경찰차로 같이 병원에 가주시기도 했다.
아버님은 늘 그랬듯 내 끼니를 챙겨 주셨다. 아침잠을 보충하고 나오면 식탁에는 아침밥이 준비되어 있었고 때로는 점심에 먹을 것까지 해놓고 출근하셨다. 그리고 한 번도 잘 먹었냐, 이건 왜 안 먹었냐 묻지 않으시고 같이 먹자고 하지도 않으셨다. 그저 잘 먹는 메뉴가 있으면 며칠씩 같은 메뉴를 해주셨다.
시동생에게도 고마운 기억이 많은데 그중 돌사진 촬영 날 메이크업을 맘에 쏙 들게 해 줬던 것과 본인이 숭이를 봐줄 테니 손목 치료를 받고 오라고 먼저 말해준 것이 특히 생각난다. 첫 조카를 순수하게 예뻐해 주고 지친 나를 걱정해 주던 마음이 참 고마웠다.
시댁에 있을 때 좋았던 다른 한 가지는 서울 시내를 마음껏 누비고 다녔던 것이다. 점심을 먹고 나면 숭이를 유모차에 태우고 집을 나서 주변의 박물관에도 들어가 보고, 유명한 빵집에서 빵도 사 오고, 단지 내 놀이터에 앉아 사람들과 이야기도 하면서 숨통이 트였다. 무작정 집을 나서서 매일 다른 곳을 돌아다니며 동네 구경을 하는 게 무척이나 즐거웠다.
때로는 어머님과 근처 맛집에서 맛있는 식사를 하거나 여기저기 놀러 다니기도 했다. 물론 모든 게 잘 맞는 건 아니었지만 내가 불편한 만큼 다른 가족들도 불편한 걸 참고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같은 노력을 해주신 가족들이 너무나 감사했다.
사람들의 걱정과 달리 나에게 시월드는 숭이가 태어나고 처음으로 맘 편히 쉴 수 있는 곳이었다. (우리 모두 시댁에 지내는 동안 살이 많이 올랐다.) 아이 하나를 키우려면 마을까지는 아니어도 가족들이 곁에 있으면 좋다는 걸 몸소 느꼈다.
숭이가 가족들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세상 가장 행복한 돌쟁이가 되었을 때, 나와 우탄이는 본격적으로 이사할 집을 알아보러 다니기 시작했다.
-- 다음편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