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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난사람 May 31. 2024

두 번째 집: Y군의 구축아파트 (1)

살림을 차린다는 것

출처-네이버 국어사전


사택이 배정된 후 우리는 진짜 살림을 차리게 되었다.

처음 봤을 때 사택의 상태는 상사가 다음날 여기로 이사온다는 말에 부하직원이 급하게 준비를 했나 싶을 정도로 좋지 않았다. 페인트칠은 끝마무리 없이 삐죽삐죽 튀어나와 있었고, 알 수 없는 모양의 시트지가 부엌을 장식하고 있었다.


그리고 의욕이 넘쳤던 새댁(=나)은 셀프 인테리어를 감행했다. 일하느라 힘든 우탄이를 더 고생시키기는 싫어서 (또는 걸리적거려서) 우탄이의 당직날 혼자 페인팅을 했다.


우선 끝이 삐져나오지 않게 테이핑 작업을 하고 페인트칠을 시작했다.

그런데 한 번, 두 번, 세 번을 덧칠했는데도 결이 사라지지 않았다. 어어..? 하지만 이미 밤이 된 지 오래고 내 팔에 힘은 남아있지 않았다. 그리고 뭐, 제법 괜찮은 것 같기도 했다.

그렇게 우리 집 안방에는 얼룩덜룩한 민트색 포인트 벽이 생겼다!

문제의 포인트 벽. 지금 봐도 괜찮은 것 같은데?

안방은 네 면 중 한 면만 채색이 되었고 페인트는 두 통이나 남았지만 덕분에 나는 셀프 인테리어를 깔끔하게 포기했다. 부엌의 보기 싫은 시트지도 그냥 안고 가기로 했고, 여기저기 페인트가 튄 바닥이며 문고리도 흐린 눈으로 넘어가기로 했다.




전략을 변경한다.

집의 베이스를 바꾸는 게 어렵다면 맘에 드는 물건들을 채워 넣자!


우리는 그동안 독립을 하면 사고 싶었던 물건들을 하나둘씩 사들였다. 그중 기억에 남는 물건 세 가지는 커피머신, 코타츠, 로잉머신이다.


1. 커피머신

반자동이 아닌 자동머신을 산 게 신의 한 수였다. 무조건 편하게!

카페에서 일을 하면서 그 자리에서 원두를 갈아 에스프레소머신으로 내려먹는 맛과 재미를 알아버린 나는 신혼여행 중 이탈리아에서 사 온 모카포트가 더 이상 성에 차지 않았다. 그래서 오랜 서치 끝에 가성비 자동 커피머신을 구매했다. 집에서도 맛있는 커피를 내려 마실 수 있다는 건 밖에 나가기 힘든 상황-마감에 치일 때나 임신, 육아 중-에 아주 큰 위안이 되었다. 커피머신은 위 세 가지 물건 중 유일하게 성공한 물건이다.


2. 코타츠

작고 소중한 우리의 코타츠..

일본 만화책을 보면 겨울에 코타츠에 들어가 귤을 까먹는 장면이 꼭 있었다. 밖이 아무리 추워도 코타츠만 있으면 온 집안에 따끈할 것만 같았다. 강추위로 유명한 Y군에서는 필수템이라며 우리는 일본에서 코타츠를 직구했다. 그해 겨울, 코타츠 안에서 귤 몇 박스를 비워내며 우리는 로망을 실현했다. 그러나 날이 풀리자 코타츠는 애물단지가 되어버렸다. 그냥 상으로 쓰기에는 담요를 빼도 전선과 틈 때문에 영 불편했고 결국 코타츠는 다음 겨울을 우리 집에서 맞이하지 못했다..


3. 로잉머신

새거나 다름없는 상태에서 중고거래했던 로잉머신

마지막은 가장 어이없는 물건, 로잉머신이다. 남자들은 왜 집에 운동기구를 두고 싶어 할까? 운동을 하고 싶은 건 아닌 것 같은데.. 우리 집 우탄이도 처음부터 아령을 사고 문틀철봉을 설치했더랬다. 그러던 어느 날 미드 '하우스 오브 카드'의 주인공이 집에서 로잉머신을 하는 장면에 꽂혀서 급기야 로잉머신을 주문했다. 그러고는 하루이틀 하더니 흥미를 잃어버렸다.. ^^

아령은 안 보이는 데 치워놓으면 되고 철봉에는 옷걸이에 빨래라도 널지, 커다란 로잉머신은 정말로 정말로 참을 수가 없었다. 3개월 간의 짧은 만남 후 로잉머신은 중고거래를 통해 제 주인을 찾아갔다.

차에 다 들어가지도 않아 트렁크를 연 채 집으로 돌아가는 구매자를 보며 저 집 와이프에게 내 짐을 토스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 외에도 작게는 샤워 가운부터 오렌지 주스 메이커, 샌드위치 메이커, 턴테이블, 각종 게임기까지 많은 로망들이 현실세계로 왔다가 떠나갔다. 금전적으로는 손해를 봤지만 이런 과정을 통해 서로의 취향과 성향을 더욱 잘 알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무조건 쓰기 편하고 관리하기 편한 클래식한 물건을 선호하는 반면, 우탄이는 새로운 것들을 써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잘 안 맞다 싶으면 빠르게 포기하고 중고거래로 처분도 잘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부분을 알고 나니 우탄이가 고가의 기계를 산다고 할 때도 '한번 써보고 알아서 잘 팔겠지' 생각하며 지켜보게 되었다. 그리고 어떤 때는 뭔가를 사고 싶을 때 오래 고민하는 것보다 빨리 사서 써보고 빨리 손절하는 게 나을 때도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살림을 차린다는 건 신혼부부가 집을 꾸미고 채워가며 서로를 더욱 알게 되는 과정인 것 같다. 절대 양보할 수 없을 것 같던 부분도 타협을 하게 되고, 만족 또는 후회를 겪으면서 '둘'의 기준을 세워 가는 과정 말이다. '이런 생각을 하는 인간이 있다니!' 하는 순간을 여러 번 겪으며 서로에 대한 데이터를 쌓다 보면 어느새 조금씩 닮아가는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9년을 함께 살았음에도 우리는 여전히 다음 집을 어떻게 채울지에 대해 동상이몽을 하고 있다. 하지만 여태껏 그랬듯, 조금씩 설득하고 양보하며 우리만의 공간을 만들어갈 생각에 벌써부터 설레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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