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기임대를 하려다 남의 집에 살게 되었다
2015년 여름, 25살의 나와 우탄이는 결혼(식)을 했다. 우리의 모든 결혼 준비 과정이 그랬듯 신혼집도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생각이었다. (내가 생각해도 정말 대책없는 놈들이었다.) 사실 아예 대책이 없었던 건 아니고 우탄이의 직장에서 사택을 제공해줄 예정이기는 했다. 문제는 빈 사택이 생길 때까지 얼마나 기다려야 할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대기자 명단에 올리기 위해 혼인신고도 빨리 하고 기다리고 있었건만, 결혼식이 끝나고 나서도 우리가 들어갈 집은 나오지 않았다.
방법은 두 가지가 있었다. 친정에 다시 들어가 살거나 우탄이의 근무지인 Y군에 단기임대를 구해 같이 살다가 사택으로 이사한다.
선택은 어렵지 않았다. 애초에 떨어져 있기 싫어서 선택한 결혼이었다. 우리는 Y군의 숙박시설을 검색해 단기임대를 할 수 있는지 알아보려 전화를 돌리기 시작했다. 딱 한 곳에서 단기임대를 해주겠다고 했다. '역시 우리는 운이 좋아'라고 생각하며 짐을 싸서 Y군으로 내려갔다.
펜션 주인아주머니는 본인 아버님 댁을 잠시 빌려주겠다며 한 주택으로 우리를 데려갔다. '집으로'나 '리틀 포레스트' 같은 영화에서 보던 시골의 단독주택이었다. 침대, TV, 냉장고, 가스레인지 등 살림살이가 다 있었고, 월세도 비싸지 않았다. 우리는 그렇게 첫 신혼집으로 처음 보는 할아버지의 집에 월세로 살게 되었다.
동네에 익숙해지기 위해 나와 우탄이는 아침저녁으로 산책을 다녔다. 걸어서 갈만한 곳에 빵집, 카페, 식당도 있었고, 차를 타고 조금만 가면 도서관과 하나로 마트도 있었다. 처음 며칠은 그렇게 집 밖을 탐색하고 집 안을 정리하느라 정신 없이 지나갔다.
그런데 곧 이 집의 치명적인 단점이 드러났다. 바로 프라이버시가 없다는 것이었다. 조리대 위쪽에 작은 창문이 나 있었는데, 낮에 요리를 하고 있으면 옆집 할머니와 눈이 마주쳤다. 눈맞춤에서 끝나지 않고 할머니는 나를 '아줌마'라고 부르며 이것저것 여쭤보셨다. (아줌마라고 처음 불려봐서 꽤나 당황스러웠다.) 내향형 인간인 나에게 참으로 불편한 시간이었다.
그리고 주인 할아버지도 예고 없이 집에 들르곤 하셨다. 남편이 일하러 가고 나 혼자 있는 집 문을 쿵쿵 두드리는 소리에 깜짝깜짝 놀랐고, 할아버지가 들어왔다 가시면 맨발로 들어오셨는데도 발자국이 남아 닦아내야 했던 기억이 난다.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동네에서 혼자 보낼 시간이 너무 길다는 것도 문제였다. 커피도 직접 내려 마셔 보고, 영화도 찾아서 봐 보고, 심즈 게임도 해 봤지만 여전히 남아있는 시간에 우울해져 갔다.
Y군에 내려온 지 한 달이 다 되어갈 무렵, 이렇게 계속 혼자 지내다가는 우울에 잡아먹힐 것 같아 카페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1시부터 6시까지 동네 프랜차이즈 카페에서 사람들과 이야기도 하고, 적당한 노동도 하니 몸도 마음도 안정을 되찾았다. 나는 늘 혼자 있는 시간이 더 중요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적당한 사회적 활동이 필요하다는 걸 깨닫게 된 계기였다.
그렇게 Y군에서의 생활이 3개월 차에 접어들었을 때쯤 빈 사택이 생겼다는 연락을 받았다. 펜션 주인아주머니께 곧 방을 빼겠다고 연락을 드렸고 그 과정에서 그분이 집주인 할아버지와 가족 관계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럼 그 할아버지는 누구셨을까?
첫 번째 집은 "처음으로 내가 선택한 집"이었다.
독립은 내가 살 집을 선택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익숙하고 편안한 서울의 친정집이 아닌 낯선 동네에 있는 남의 집을 선택한 순간, 나는 진정한 독립을 했다.
그리고 그 선택은 이후 나의 인생에 큰 나비효과를 가져왔다.
혼자 있는 시간 동안 영화를 찾아보다 영화 번역에 관심이 생겨 프리랜서 영화 번역을 하게 되었고, 그래서 경력 단절의 부담 없이 임신을 하고 숭이를 만났으니 말이다. 비효율적이고 무모해 보이는 선택이 분명한데 내 마음이 확실하게 그것을 원한다면, 지금까지와는 다른 가치가 중요해졌다는 뜻일지 모른다.
나에게는 그게 '새로운 가족을 꾸리는 일'이었고, 지금까지도 변함이 없다. 그래서 그때의 대책없는 우리들이 자랑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