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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습작소 06화

노장

이야기

by 정민쓰








- 썩 꺼져!!!




난 기어코 해맑은 표정의 아이들을 울려버렸다.

허겁지겁 도망가는 꼬맹이들은 주머니에서 물건이 떨어지는 것도 모를 정도로 겁에 질린 모습이었다.


멍청한 놈들. 다음번엔 물을 한 바가지 쏟아부어주마.




난 아이들이 흘리고 간 물건들을 집어 집 안 거실 한구석에 있는 플라스틱 통 앞으로 갔다.

그리고 그것들을 이미 그 안에 한가득 쌓여있는 아이들의 물건들 위로 대충 던져 넣었다.










내가 홀로 살고 있는 단독주택은 교외지와의 경계선, 마을의 중심지와는 살짝 떨어진 후미진 곳에 있다. 노인 혼자 살기에는 다소 큰 2층집이다.




마을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작은 산지마을이지만 역사가 깊고, 재정적으로도 제법 풍족한 마을이었다. 다소 토속적인 마을 모습과는 달리 제법 현대적인 인프라도 구축하고 있었다. 물론 그것은 약 사십 년 전 마을 전체가 휘말렸던 최악의 사건이 있기 전까지였지만.




그 일이 일어났을 때는 아직도 내 기억에 선명하다. 이 마을에 이상한 힘이라도 있는 건지, 그 일이 일어난 직후에도 마을사람들은 하나같이 숯검댕이에 범벅이 된 모습을 한 채 웃음을 잃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멍청한 모습들이 아닐 수 없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희망의 눈을 하고서 그들은 정부의 지원을 받아가며 지금의 마을을 재건하는 데 성공했다. 나도 오랜 시간에 걸쳐 조악하지만 지금의 집을 최대한 이전과 비슷한 형태로 복원할 수 있었다.










우리 집 주변의 풍경은 본 마을과는 다소 이질적이다. 집으로 들어오는 진입로는 관리를 하지 않아 자연상태 그대로 자라난 잡초들이 무성하다. 이건 굳이 찾아오지 않으면 누군가 내 집까지 도달할 일은 없다는 뜻이었다.

아까 전 꼬마 아이들이 신나서 내 집 주변에 모여있다는 건 굳이 내 집을 목적지로 삼아 탐험놀이의 유희대상으로 삼았다는 게 분명했다. 그리고 그 사실이야말로 나를 가장 불쾌하게 만들었다.




난 아이들이 싫다. 정말로 싫다. 아이 특유의 그 높은 목소리는 거슬릴 정도로 시끄럽기에 내 고막과 신경을 긁어댄다. 그 작은 손발들도 나약함을 숨길 생각도 없는 듯, 똑 부러질 것 같이 위태로워 보였기에 그저 생존에 도태된 한심함으로만 느껴졌다. 어디 그뿐인가, 성장기의 넘치는 에너지를 주체 못 하고 여기저기 뛰어다니는 꼴은 보기만 해도 울화가 치밀었다.




내 속도 모르는지 언젠가부터 내 집이 유원지의 유령의 집이라도 된 것처럼, 그리고 내가 그곳에 출몰하는 할아버지 귀신이라도 된 것처럼, 철없는 아이들이 살금살금 집 주변에서 배회하는 것을 쫓아내는 게 내 일과 중 하나가 되었다. 저번엔 외출을 한 사이에 집으로 들어가려는 듯 1층의 창문 근처를 서성거리는 꼬마들을 본 적도 있다. 아이들을 붙잡고 추궁해 보니 글쎄, 또래들 사이에서 칩거 중인 마귀할아버지 집에 보물상자가 있다는 소문이 퍼졌다는 것이다.




아이들의 시선에서는 그 말을 듣고 격노하며 썩 꺼지라 외치던 내 얼굴이 정말로 마귀할아버지 같았을까. 나이에 비해 꽤나 커다란 몸을 가진 나에게 아이들은 정말 마귀할아버지를 공략한다는 도전의식을 불태우고 있는 걸까.



내 집에 외부인이 들어오는 건 상상도 하고 싶지 않다. 특히 나 조차도 절대 들어가고 싶지 않은 2층방은. 그곳엔 정말로 마귀할아버지의 보물상자가 있으니까.













나는 한 달에 한 번꼴로 마을을 방문했다. '방문'이라고 말하기엔 마을의 외곽을 따라 조금만 걸어가면 되지만 이미 내 마음은 이 마을의 일원이기를 포기한 이방인이기에 '방문'이라는 게 가장 적절한 표현일 것 같다.




오늘도 난 한 달 치의 식료품을 사러 늘 가던 식료품가게로 향했다. 이곳의 사람들은 쓸데없이 밝고 다정하다. 나를 마주치는 사람마다 내게 이름을 부르며 반갑게 인사했다. 난 미간을 찌푸린 채 그들을 째려봤다. 전혀 개의치 않고 계속 실실 웃는 마을사람들은 배알도 없는 게 분명하다. 식료품가게 근처에 있는 동네술집은 대낮부터 장사를 하고 있다. 대낮부터 술을 마시는 인간들이라니. 구역질과 혐오감이 올라온다. 정말이지 이곳에 오는 일은 지금의 내 삶에서는 최악의 월례행사가 아닐 수 없다.




식료품가게의 직원들과 다른 손님들도 살가운 태도로 나를 향해 반갑게 인사치레를 했다. 난 물론 쳐다도 보지 않았지만 물건들을 바리바리 들고 계산대에 섰을 때는 결국 역정을 내고 말았다. 여자점원이 계산을 하며 날 보고 잘 지내냐고 물어볼 때는 정말로 참지 못하고 '나한테 신경 꺼라'는 말로 그녀에게 일갈하고야 만 것이다. 한 달에 한 번씩 얼굴을 직접 마주해야 하는 이 점원이야말로 나에겐 가장 거북한 존재일 수 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난 정기적으로 그녀를 만나야만 했다. 그래. 난 식자재를 사야만 했으니까.




정말이지 나한테 반갑게 인사나 할 기력으로 본인들 자녀나 잘 관리했으면 좋겠다. 어린애들은 정말 질색이라니까. 난 방금도 내 집 주변에 무단침입한 네 놈들의 자식들을 울리고 오는 길이라고. 그리고 저기 가게밖 그늘에 모여 환히 웃으며 떠들고 있는 노인네들. 너희들의 남편도, 아내도, 자식들도 내가 죽인 거라고. 사십 년 전에.




정말로, 정말이지, 지긋지긋한 마을이다.

그리고 나는 그런 마을의 소방관이었다. 사십 년 전에.











지나간 세월을 돌아보면 내가 흘린 미련들로 폭이 좁은 길이 지금 내가 서 있는 발밑까지 이어져있다. 그 길에 한가득 떨어져 있는 것은 나의 죄책감들, 그리고 자신이 강하다고 착각해 왔던 내 우매함의 편린들이다.




언젠가부터 나의 시간은 멈췄다. 더 이상 나는 앞으로 나아가기를 그만두었고 그로 인해 더 이상 길을 만들어나가지 않게 됐다. 그저 나는 이곳에 멈춰 서서 걸어온 길을 향해 돌아선 채 이 길을 파수하고 있을 뿐. 나는 끔찍한 인간이고 이 길은 그런 내가 걸어온 끔찍한 길이다.




내가 이 마을에서, 내 집에서 혼자 같은 자리를 지켜온 지는 아주 오래되었다.

내가 이 지긋지긋하고 끔찍한 곳을 벗어나지 못하는지, 아직도 이곳을 떠날 수 없는지 나도 잘 모르겠다. 심지어 지난해 내가 가지고 있던 모든 훈장과 표창장들을 깡그리 태워버림으로써 이제 내 과거를 품고 있는 물건도 전혀 남아있지 않다. 집의 2층 방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마트에서 식료품을 사 오는 일은 그동안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항상 똑같은 식재료들과 똑같은 동선. 하지만 오늘만큼은 달랐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들고 있는 봉투 안에서 식료품들 사이에 술병이 흔들리는 게 느껴졌다. 오늘따라 외면과 회피로 점철되어 마음속에 잠복하고 있던 죄책감이 가슴을 옥죄어 왔다. 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아닌 조금은 다른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마을 외곽의 호숫가. 이곳에서 술을 마시며 혼자 누워 하늘을 올려다보니 옛 날 생각이 떠올랐다. 흩날리던 머릿결, 새된 목소리, 작은 손과 원피스.


술기운에 뾰족하지만 포근한 기억이 나를 감싸오자 저절로 눈꺼풀이 감겼다. 하늘의 별들이 호수표면으로 쏟아져 내 눈을 간지럽혀 대는 바람에 나는 완전히 눈을 감아버렸다. 꿈속에 아지랑이처럼 일렁거리는 것은 뛰노는 작은 아기천사들과 호숫가에서 물을 마시는 일각수. 마을사람들의 눈이 아프도록 밝은 웃음. 마치 지금이 지나면 다시는 누리지 못할 것처럼 당장에 꽉 움켜잡고만 싶은 나만의 강렬한 천국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잠들어 있었을까,

다시 눈을 떴을 땐 사십 년 전의 지옥이 눈앞에 펼쳐져있었다.









불지옥이었다. 지금 저 멀리 마을 쪽이 무지막지한 붉은빛으로 일렁이고 있는 모습은 분명 사십 년 전불지옥과 똑같았다.



사십 년 전 요절한 아내의 고향인 이곳에 어린 딸아이를 데리고 정착했었다. 마을의 젊은 소방관이었던 나는 마을에서 가장 사교적이고 대담한 사내였었다. 세상 무서운 줄 모르던 내가 그날 술집에서 대낮부터 진탕 퍼마시고 잠들지 않았더라면. 난 한 명이라도 더 구해낼 수 있었을 것이다. 내 동료들도 마을사람들도, 집에서 혼자 날 기다리고 있던 딸아이도.










난 가게에서 사 온 모든 물건들을 자리에 내팽개치고 마을을 향해 달려갔다. 머리가 멍한 건 술기운 탓인지 마을에 가까워질수록 흘러나오고 있는 이 매캐한 연기 때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마을에 도착하니 마을의 한쪽 끝에서부터 엄청난 불꽃들이 띠를 두른 듯 외곽을 따라 타오르고 있었다. 마치 화염이 마을의 가장자리를 따라 둥근 원을 그려 마을에 뜨거운 포옹을 하려는 것 같았다. 늙어버린 몸의 관절이 삐걱였지만 난 화재현장까지 뛰어갔다.




벨트처럼 이어진 화재현장의 끝 쪽에서 젊은 소방관들과 마을 사람들이 진화에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다행히도 이 마을은 사십 년 전의 지옥으로 인해 화재에 대한 대비가 매우 잘 되어있었다. 마을의 사람들은 너도나도 집 밖에 나와 힘을 합쳐 제법 능숙하게 불을 끄고 있었다. 그들은 마을 중심부까지 확신이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막고 있었음에도 외곽을 따라 번지고 있는 불이 옮겨 붙는 속도는 무시무시했다. 이곳은 산이 둘러싸고 있다. 이 정도 규모의 불은 머지않아 마을 밖에서 소방지원이 올 테지만 이미 꼬리를 물고 번져가는 반대편의 외곽은 당장 지원이 부족할게 분명했다.




나는 달려갔다. 일부 젊은 소방대원이 내 뒤에서 날 앞질러달려가는 걸 보니 세월이 야속했다. 난 오랫동안 나의 길에서 멈춰 있었지만 이들은 한창 자신의 길을 나아가는 중이었겠지. 숨이 차오르며 입안에 비릿한 피 맛은 씁쓸함의 맛과 비슷했다. 두 가지의 맛이 입안에 번지는 걸 느끼며 불길을 옆에 끼고 달려갔다.




마을의 소방관들은 많지 않다. 일부는 발화지역부터 시작하여 진화에 힘을 쓰고 있고, 일부는 지금 내가 달려가는 길을 따라 사람들을 건물 안에서 꺼내는데 총력을 다하고 있다. 나는 불길이 옮겨가고 있는 집들 사이를 뛰어다니며 아직 집안에 남아있을 사람들을 찾아다녔다. 그때였다.




-레오 아저씨!!!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였다.













나는 뒤를 돌아봤다. 아까 낮에 내 식료품들을 계산해 주던 젊은 여자. 자신의 아이가 보이지 않는다고 나를 붙잡고 울부짖고 있었다. 그녀를 따라 다른 사람들도 나더러 자신의 아이들도 보이지 않는다고 울고 있는 것이었다. 정말 이래서 애들은 질색이다.




그때였다. 최악의 상황이 머릿속에 떠오른 나는 불현듯 머리에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을 느꼈다. 불길은 분명 외곽지역을 따라 번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 끝에 있는 집은. 잡초가 무성하여 불이 옮겨붙기에도 최적의 장소인 그 집은.


분명 내 집이었다.




난 미친 듯이 내 집을 향하여 내달렸다. 마을 사람들 몇 명이 내 뒤에서 허겁지겁 나를 쫓아오는 것 같았지만 그런 것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나뭇가지에 얼굴이 베이고 옷이 찢어졌다. 온몸의 늙은 뼈와 근육이 비명을 지르는 게 느껴졌다. 난 몇 번이나 넘어져서 뒹굴었고 내 몸에서 무언가 부러지는 듯한 기분 나쁜 소리를 분명 들었지만 고통을 느낄 겨를도 없었다. 드디어 내 집 앞에 도착했을 때 내가 마주한 것은 사십 년 전 그날과 똑같이 화염에 휩싸인 집과, 마찬가지로 그때와 다를 바 없이 뒤늦게 도착한 내 모습이었다.










집에 들어가야 한다. 그 망할 꼬맹이 놈들이 내 집에 들어와 있다면 그들을 구해내야만 한다. 다행히 집 앞에는 꼬맹이들이 또 나타나면 바로 물을 끼얹어버리기 위해 물을 가득 길어놓은 바가지가 있었다. 나는 그것을 정수리부터 내 온몸에 부어버린 후, 달려오느라 찢어져버린 바지 밑단을 길게 찢어 손수건처럼 내 코와 입가를 막았다. 그리고 그나마 불길이 덜 한 집 뒤편 1층 창문 쪽으로 갔다. 창문은 역시나 이미 활짝 열려있었다.




나는 창문을 통해 집안으로 들어왔다. 매캐한 연기. 화재현장은 영화와 다르다. 화재로 인한 연기는 직접 들이마실 경우 불과 몇 초만에 바로 사망에 이른다. 아이들은 반드시 살려야 했다. 나는 내가 아직도 이 지긋지긋한 마을의 한 귀퉁이를 지키고 있는 이유를 되새겼다.


1층에는 아이들이 보이지 않았다. 젠장. 분명 2층이다. 다행히 아직 불길은 1층에 머무르고 있지만 2층까지 불길이 번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기적적으로 아직은 불이 옮겨가지 않은 계단으로 향하며 , 나는 거실 귀퉁이에 녹아 있는 플라스틱 통과 그 안에서 흘러나온 수많은 아이들의 분실물들이 불타고 있는 걸 보았다.



안돼. 아이들에게 돌려줘야 하는데. 아직 돌려주지 못했는데.











2층에 도달함과 동시에 내가 방금 올라온 계단도 순식간에 불길에 휩싸였다. 2층은 그야말로 지옥이었다. 밑에서부터 올라오는 연기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고 실시간으로 1층에서 나를 추격해 오는 불길의 열기로 내 살들이 불길에 타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아이들이 있을 방은 분명 그 방이 분명했다.




마을아이들이 그동안 내 집에 몰래 들어오고 싶어 했던 이유이자 그 철없고 터무니없던 망상은 어느 정도 사실이었다. 정말로 2층에는 내 보물상자가 있었다.


내 딸아이의 방. 지난 대화재 이후 내 투박한 솜씨로 재현한 죽은 딸아이의 방.


나는 2층 방 앞에 서서 도저히 들어 올려지지 않는 발을 모든 힘을 다해 들어 올렸다. 문을 발로 차서 열었다. 방안에 있던 겁에 질린 꼬마아이들 세 명이 눈물범벅이 되어 방에 들어온 나를 바라봤다.








'기어코 내 보물상자를 열어봤군.' 나는 방 전면, 창문 바로 아래에 열려있는 묵직한 나무상자를 보며 생각했다. 아이들이 콜록거렸다. 난 세 아이를 끌어안았다. 불바다가 된 마을보다 뜨거운 건 지금 내 품에 안겨있는 세명의 아이들의 맥동 중인 생명. 이 역시 내 보물들이었다. 사실 난 내가 이 마을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이 아이들은, 내 미련이고 그날 구하지 못한 내 딸아이였다.








아이들 특유의 높은 목소리는 너무나도 사랑스럽고, 이 고사리같이 작은 손발들은 얼마나 사랑스러운가. 그 손발로 뛰어노는 그 모습들은 어떻고. 당장에라도 부러질 것 같이 작은 생명들은 위태로워서, 정말 금방에라도 날아가거나 스러질 것만 같아 더욱 아름답고 지켜주고 싶은 것이었다.




난 들어차는 연기와 불길을 느끼며 마지막 선택을 해야 했다. 이곳은 2층이다. 분명히 희미하지만 창문을 통해 불길의 포악한 음성을 뚫고 창 너머 아래쪽에서 마을 사람들의 외침이 들린다. 모든 틈 사이로 무자비하게 들이치기 시작하는 연기가 점점 심해지는 것으로 보아 이제 시간이 없었다. 판단을 해야 했다.



난 이제 여기서 죽는다. 그리고 아이들을 살린다. 사십 년 전 내 손으로 조악하게 다시 쌓아 올린 이 집은 2층일지언정 그렇게 높지 않다. 떨어져도 골절에 그칠 수 있겠지. 운 좋으면 밑에 있는 마을사람들이 받아줄 수도 있을 것이다. 더 이상 생각할 시간 없이 연기가 기어올라오는 창문을 향해, 아이들을 차례대로 창 밖을 향해 던지듯이 내보냈다.




마지막 아이를 내보내기 전, 난 잠깐 아이를 끌어안은 찰나에 딸아이를 안고 있는 기분을 느꼈다.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는 내 손은 약지손가락이 끔찍한 각도로 꺾여있었다. 아까 집으로 뛰어오는 길에 다친 것 같았다. 상처를 인지하자 밀려오는 고통에도 난 미간에 주름하나 잡지 않았다. 겁에 질린 아이를 보며 이 빌어먹을 마을사람들처럼 똑같이 환히 웃어 보였다. 그 아름다운 웃음들도 내가 이 마을을 떠날 수 없는 이유 중 하나였다. 더 오래도록 그 웃음을 보고 싶었는데.


'이제 정말 마지막이야'.


내 품에서 다시 한번 사랑스러운 아이를 창 밖에 떠나보내며 난 언제나처럼 사랑을 담아 마귀할아버지답게 조용히 말했다.



-내 집에서 썩 꺼져.










정신이 혼미해진 나는 목숨이 끊어지기 전 몇 초 동안 수많은 생각을 했다. 내 눈앞에 보이는 활짝 열린 보물상자, 그 안에서 꺼내어진 딸아이를 안고 있는 아내의 사진과 물건들. 그리고 지금은 볼 수 없는 예전 마을사람들과, 함께 웃고 있는 옛 동료의 사진들. 이제야 난 조금은 떳떳하게 그들을 마주하고 사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사진 속에서 내 옆에 어깨동무를 하고 있는 남자들은 마을에서 내 또래였던 동료이자 친구들이었다. 단 한 번도 잊은 적이 없다. 이 녀석은 자신의 딸내미가 아내 소유의 식료품점을 물려받길 원했었지.



-'네 아이는 잘 지내고 있다.

오늘도 나에게 계산을 해주더군.

너를 닮았는지 썩 미인은 아니야.

그나저나 네 딸, 자식교육은 좀 잘 시켜야겠어.


네 장난꾸러기 손녀가 틈만 나면 우리 집에 들어오려고 했다고. 그 녀석을 방금 내가 구했다니까.

그리고 네 아내는 이제는 꼬부랑할머니가 됐다.

가게 앞에서 신나게 떠들고 있더군.


지금도 여전해, 모두가 지켜낸 마을사람들의 웃음은.

여전히, 정말 여전히 아름다워.'




이상한 힘이 있는 듯 긍정과 아름다움이 가득한 이 마을. 내가 사랑하는 이 마을. 동그란 모양의 마을 지도에 한 점을 찍고 있던 내 집은 마지막 불꽃을 머금고 나와 함께 사라지고 있었다. 내 미련들도 같이.










이 마을이 가진 이상한 힘은 이따위 화염으로도 태워버릴 수 없을 것이다.

이 마을 사람들의 길은 끝나지 않는다, 이 마을사람들은 이후로도 언제나 환히 웃을 테고, 그들의 사랑스러운 아이들이 새로운 길을 이어갈 것이다.


그리고 그 사실을 다시금 확인한 나는 드디어 멈춰있던 길목에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내가 걸어온 길에 흩뿌려진 내 미련의 편린들도, 이제는 오늘 술을 마시며 보았던 호숫가 표면에 펼쳐진 달빛 부스러기처럼 빛났다. 내 길 끝에서 저 멀리 날 기다리고 있는 사십 년 전 마을사람들과 동료, 젊은 아내, 그리고 딸아이를 향해 걸어가며 난 환히 웃어 보였다. 이 마을사람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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