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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습작소 05화

갤러리 관리인

이야기

by 정민쓰








※도슨트(Docent) : 미술관이나 박물관 따위에서 관람객에게 전시와 관련한 설명을 해 주는 안내인.

















안녕하세요. 갤러리 '네드'입니다.



이곳은 비록 아주 짧은 역사를 가진 갤러리이지만 제가 직접 모은 귀중한 그림들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저는 관리인이지만 특별한 관람객들인 여러분에게만큼은 직접 도슨팅을 제공해 드리고자 지금 이 자리에 서 있습니다. 여러분을 만나 뵙게 되어 너무 기쁩니다. 애당초 여러분의 기여가 없었다면 이 갤러리는 개관할 수도 없었을 테니까요. 정말 뵙고 싶었습니다.



보시다시피 제가 모종의 사정으로 인해 몸상태가 썩 좋지 않습니다. 거동이 힘들어 여러분들에게 한 분 한 분씩 도슨트서비스를 제공드리기는 어운 문제가 있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예약한 날짜가 모두 달랐다 보니... 여러분의 예약시기를 한 번에 맞출 수 있는 오늘까지 꽤 오랜 시간을 기다렸답니다. 덕분에 모두 함께 갤러리를 둘러볼 수 있겠네요.



자. 그럼. 세 분 모두 이 쪽에 나란히 서주시겠어요? 이쪽이요.

음... 여자분이 남자분들 뒤에 서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좋아요. 감사합니다.



이름표를 하나씩 나눠드리겠습니다. 불편하시더라도 갤러리 내에서 인원 식별을 위해, 이름표를 받으시면 가슴 쪽에 착용부탁드립니다. 착용과 동시에 여러분의 성함이 이름표에 나타날 것입니다. 갤러리에 관람객은 여러분들 뿐이긴 합니다만, 그래도 규칙이니까요.


제 호칭이요? 전 그저 관리인일 뿐입니다. 다만 갤러리의 관계자들은 저를 '레반'이라는 이름으로 부릅니다. 여러분이 편하신 대로 불러주세요.



그럼 바로 이 쪽 방향으로 이동하며 관람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차례대로 작품들에 대한 설명과 얽혀 있는 이야기들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입구 쪽 안내문에 적혀있다시피 이 박물관의 모든 작품들은 화가의 이름을 공개하지 않습니다. 예술가를 인지하고 작품을 본다는 것만으로도 작품감상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저의 철학 때문이죠.








자. 세 분. 이쪽에 서서 작품을 봐주시겠습니까?

이 작품은 한 청년과 아낙네가 나무 밑에서 평화롭게 껴안고 누워있는 모습을 표현한 작품입니다. 사랑스러운 분위기의 작품이죠? 이 작품의 제목은 <상사병>입니다.




그림 속에 누워있는 이 청년은 과수원에서 성실하게 일하던 평범한 청년입니다.

순수하고 물정 모르는 시골청년이, 매일같이 반복되던 농촌의 일상에서 우연히 시골에 놀러 오게 된 도시여자와 눈이 맞아 꿈만 같은 며칠을 보낸다.... 영화 같은 이야기죠? 작품의 후일담에 따르면 이 남자는 본인의 과수원에 함부로 들어와 사과를 따먹던 여자를 보고 처음엔 사랑이 아닌 분노를 느꼈다고 했습니다. 남의 농작물을 함부로 건드리다니요. 여성에게 화를 내려고 다가가던 남자는 화들짝 놀랐습니다.


그녀의 발치에 뱀이 기어가고 있었거든요. 시골의 풀밭에는 독사들이 많아 항상 조심해야 하는 법입니다. 청년은 여자의 손을 잡고 자신 쪽으로 급히 끌어당겼습니다. 균형을 잃은 둘은 넘어졌고, 그 장면이 바로 이 작품 속 모습입니다.




시골에서 태어나 시골에서만 살아온 청년은 이내 도시에서 온 이 여성에게 전례 없던 강렬함과 사랑을 느끼게 되었다고 합니다. 여자도 마찬가지였고요. 이 둘은 사랑에 빠졌고, 여자가 갑자기 도시로 돌아가기 전까지 행복한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아무런 기별 없이 사라진 여자에 대해 청년은 큰 의문을 갖지 않았습니다. 우둔하고 물색없는 이 청년은 당연히 다시 여자와 만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한 순간의 치기 어린 풋사랑은 도시에선 꽤 흔한 일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둘의 영원 같았던 약속과는 달리 여자는 도시로 돌아간 이후 청년에게 단 한 번의 연락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추억을 곱씹으며 작품 속의 저 사과나무 아래에서 그녀를 그리워하던 남자는 점점 몸과 마음이 메말라갔죠. 처음 겪어보는 마음의 격동에 남자는 술독에 빠져 그 여자를 강하게 원망하기도 했다고 하네요. 이때쯤 의 눈은 사랑과 그리움, 원망이 뒤섞여 사람의 그것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심지어 어떤 날 지나가는 어떤 여성을 자신이 그리워하는 여성으로 착각하고 못된 짓을 하려다 마을 사람들에게 붙잡혀 몰매를 맞는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네 뭐.... 이 이후로는 영 좋지 않은 이야기들이니 이 작품의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죠. 다음 작품으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네? 그 이후엔 어떻게 됐는지 궁금하신가요?

저 남자는 그렇게 가슴 아픈 날들을 보내던 어느 날, 드디어 그녀의 편지를 한 통 받게 되었다고 해요. 그리고 그는 편지를 읽고 행복한 추억이 가득했던 사과나무 앞으로 갑니다. 사과나무의 성체는 5미터에서 6미터까지도 자라거든요. 목을 매달기에 충분한 높이였을 겁니다.




여담이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저 과수원은 마을의 땅으로 귀속되었다고 합니다. 그 이후 한동안은 이 사건을 불경스럽게 여긴 마을 사람들이 횃불처럼 새빨간 조명을 들고 과수원 입구를 위협적으로 지키고 있기 때문에 외부인들이 근처에 출입조차 못했다고 하네요.









다음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이전 작품과 반대로 현대적인 느낌이 강하게 느껴집니다. 화려하고 도발적인 색채들은 마치 도시의 야경을 표현한 듯 보이죠. 하지만 아름다운 야경의 느낌보다는 다소 색정적이고 관능적인 느낌을 풍기고 있습니다. 이 작품의 배경을 자세히 보면 도시의 마천루들이 그려놓은 인공적인 능선이 보인답니다. 저 꺾인 선의 굴곡들이 꽤나 교태스럽지 않나요?

하하. 저를 너무 그런 눈으로 쳐다보지 마세요... 이건 제 개인적인 감상이니까요...

참고로 작품의 제목은 <도살>입니다. 살벌하죠?




작품의 왼쪽 편에 두 명의 사람이 보이실 겁니다. 도시의 불빛 속에 있는 둘의 모습이 어때 보이시죠? 맞습니다. 예리한 안목을 지니셨군요.

말씀처럼 마치 한쪽에게 다른 한쪽 사람이 우측 방향으로 끌려가는 것 같아 보이죠? 정확해요. 끌려가는 사람의 모습을 보세요.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후드는 군데군데 피로 추정되는 붉은색을 띠고 있습니다. 그 모습은 마치 이 사람도 도시의 불빛들 중 하나일 뿐인 것 같은 착각을 들게 합니다. 이 사람이 끌려가는 방향을 보시겠어요? 붉은색과 대비되는 그림 우측의 진한 초록색이 돋보이죠. 네. 맞아요 그 초록색의 형태... 보시다시피 십자가입니다. 초록색 십자가.... 작품의 좌우의 풍경이 꽤나 묘한 대비감을 주죠.




이 작품에 대한 이야기는 어떤 남자로부터 시작됩니다. 난봉꾼이었던 이 남자는 아내가 있음에도 매일 다른 여성들과 몸을 섞으며 자신의 색욕을 주체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아름다운 아내가 있지만 그녀는 그저 남자의 사회적인 과시용에 불과했던 거죠. 매일 같은 남편의 외도를 아내는 그저 방관했습니다. 남자의 지독하고 폭력적인 성적취향을 자신이 감당하고 싶지도 않았으며, 남편의 재력이 실제로 자신에게 도움도 되었으니까요. 듣기만 해도 숨 막히는 둘의 부부관계는 매일같이 싸움의 연속이었습니다. 하지만 대외적으로는 아주 아름답고 완벽한 재력가 부부의 모습을 연기했죠.




둘의 다툼은 하루가 다르게 거칠어졌고, 남편의 폭력적인 모습도 점점 그 정도가 심해지게 됩니다. 그래서 아내는 결국 남편의 재산을 일부 빼돌린 후 조용한 시골로 도망을 갑니다. 물론 며칠 지나지 않아 금방 붙잡혀 다시 집으로 끌려왔지만요.




아내는 남편에게 감금당하다시피 집에 억류됩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자신의 몸 컨디션이 평소와 다른 것 같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 느낌이 무엇 때문인지 직감적으로 알게 된 아내는 문득 자기 자신이 너무 부끄럽고 수치스러워졌다고 합니다. 아마 자신의 지난날들이 장면 떠올랐겠죠? 부의 유혹에 인간 이하의 남편과 올렸던 결혼식, 시골로 도망가서 우연히 들어간 과수원, 그리고 혐오스러운 남편처럼 자신 또한 저질러 버린 외도와 임신. 이 모든 장면들이 두터운 교살용 밧줄처럼 그녀를 숨 막히게 옭아맸을 겁니다.




괴로움 속에 머리를 싸매던 아내는 결국 다짐을 굳힌 듯, 비장한 표정으로 누군가에게 사과의 마음을 담은 편지를 한 통 써 보내게 됩니다. 그리고 아내는 더 늦기 전에 남편에게 모든 걸 고백했어요. 그 이후의 상황은 바로 이 작품 속의 모습입니다. 초록색 십자가를 향해 끌려가는 모습이요.

비극적인 이야기죠..... 그럼 이제 다음 작품 보실까요?




아. 알겠습니다. 이후 이야기도 말씀드릴게요. 어린애들 마냥 너무 재촉하지 마세요. 듣기 싫으니까요.


안타깝게도 이후의 이야기는 해피엔딩은 아닙니다. 애당초 즐거운 이야기도 아니었지만요. 안타깝게도 아내분은 결국 수술 후유증으로 생을 달리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흠. 글쎄요. 남편이라는 작자는 이후 어떻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네요. 어떤 삶을 살았으려나요. 자신의 폭력성과 성적인 욕구도 주체하지 못하는 인간은 발정 난 수퇘지랑 다를 게 없잖아요? 이런 자의 말로는 뻔할 테죠. 그래도 이 작자는 와중에도 돈은 많았다고 하니 잘 먹고 잘 살았으려나요. 제 개인적인 바람으로는... 그의 남은 생은 불행했기를 바랄 뿐입니다.












이어서 이 세 번째 작품을 보시죠. 한 여성의 이야기를 담은 작품입니다만...

이 작품은 이전 작품들에 비해 제법 표현적입니다. 어떠신가요? 이 작품을 딱 보니 어떤 느낌이 먼저 떠오르시나요? 그렇죠. 으스스하죠.

작품에 대한 제 첫 느낌도 그랬습니다. 다소 형이상학적인 화풍이기에 처음부터 작품의 표현과 의도를 바로 알아채기는 힘듭니다만, 저는 왜인지 으스스함을 넘어 뼛속까지 스미는 공포를 느꼈습니다.




이 쪽을 잘 보세요. 이 작품 중앙에 있는 강낭콩 같은 모양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리고 분홍색의 주머니는? 작품 중앙의 분홍색에서부터 시작하여 하단부로 갈수록 색채가 점점 붉은색으로 그라데이션 됩니다. 다소 난해하죠?




이 작품의 제목은 <양막>입니다.










자. 관람은 여기서 끝입니다. 네. 어떤 게 궁금하시죠? 고작 세 가지 작품밖에 없는 게 의문이신가요? 물론 근처에 관람객이 항상 붐비고 전시작도 많은 갤러리들도 있습니다. 처음 말씀드렸다시피 그곳들에 비해 제 갤러리는 창립역사가 압도적으로 짧은지라.... 그래도 제 갤러리의 작품들의 작품성과 심오함이 타 갤러리보다 훨씬 우위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여러분들의 눈에는 더욱 그랬을 거라고 믿습니다. 심지어 여러분이 직접 이곳을 선택하여 오신 거잖아요? 불편감이 있으시다면 유감스럽군요. 왜 그렇게들 뻔뻔하신 건가요?




출구는 저 쪽입니다. 왼쪽 문으로 나가시면 됩니다. 오른쪽 문은 열리지 않습니다. 큰 갤러리에는 오른쪽 문도 개방하지만 저희 갤러리 '네드'에서는 왼쪽 문만 사용합니다. 다들 아쉬우신가요? 이제 곧 폐관시간이라 나가주셔야 해요.


저도 아쉽긴 합니다. 자, 차례대로 저에게 이름표를 반납해 주세요. 네. 그냥 주시면 됩니다. 앞에 분부터... 그다음 뒤에 계신 분... 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감사합니다. 다들 이런 이름이셨군요. 정말 궁금했어요. 아무리 개차반 같은 인간들 일지언정 그래도 제 부모님들이니까요. 이름이라도 알고 싶었거든요. 저도 여러분과 이렇게 헤어지는 게 아쉬우니 몇 가지만 말씀드리고 폐관하는 걸로 하죠. 어때요?




회수한 여러분의 이름표는 각각 세 작품의 하단에 붙일 예정입니다. 해당 작품들의 화가이름이거든요. 관람하며 기억이 나셨을진 모르겠지만, 세 작품의 화가는 각각 여러분들입니다.


제가 이곳에 온 이후부터 매일같이 하루하루를 세었어요. 여러분들이 모두 뒈지기만을 기다리면서요. 이제야 모두 죽어서 여기에 모였는데 저야말로 헤어지는 게 아쉽단 말이에요. 그래도 제 부모들이 어떤 이름인지, 어떤 낯짝인지 보게 되어 속은 후련합니다. 어머니의 뱃속에 있던 저를 <도살>하셨을 때, 지금 거기 서 있는 당신. 당신이 느꼈을 후련함처럼요. 네 당신이요. 그럼 당신 이야기지 누구 이야기겠어요. 당신이 제일 늦게 죽어버리는 바람에 우리들의 만남도 이렇게 늦어진 거라고요. 명예와 성욕에 미친 수퇘지인 당신 때문에.




아무튼 이제 정말 폐관시간입니다. 그러니 모두, 이제 슬슬 출구쪽으로 가서 왼쪽 문의 지옥불로 떨어져 버리시면 됩니다.




잘 가세요. 그리고 더욱 고통받으시길. 갤러리는 이만 폐관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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