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이곳에서 지낸 지도 벌써 적지 않은 시간이 지났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땐 살려달라며 울고불고 소리를 질렀었다.
지금 그때를 생각하니 조금 민망하지만, 생전 처음 보는 이상한 물체와 그 안에서 나온 기형적인 생김새의 무언가들에게 붙잡혀서 낯선 공간에 왔다면 누구나 울고불고 소리치지 않았을까.
그날 나는 비행기를 타고 내 스무 번째 아내와 함께 이주할 새 집을 알아보고자 인근 행성으로 가고 있었다.
난 꽤 이름난 공학 엔지니어였다. 그것도 항공기를 설계하는. 비행기는 나에게 가장 친숙한 교통수단이었다. 당시 일정 상 비행기 탈 일이 많았다. 학회에도 참석해야 했고, 스무 번째 신혼집도 알아봐야만 했다.
뭐, 800년 전쯤에는 비행기가 행성 내에서만 비행할 수 있었고, 땅으로만 다니는 기차라는 것도 있었다. 그때는 행성 반대편에 있다는 이유로 야구경기 하나 제대로 보러 가지 못했다니.... 지금은 역사 교과서에나 나올만한 이야기다. 그때의 기술력이었다면 몇 시간 뒤 시작하는 옆 대륙의 야구경기도 보러 가지 못했을 테고, 열여덟 번째 아내도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아 일곱 번째 아내도 마찬가지다. 비록 그녀와는 축구를 보러 갔을 때 만나게 됐지만.
아내가 많다는 건 꽤나 피곤한 일이었다. 그녀들의 간단한 안부전화만 스무 통을 받는다고 생각하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그러고 보니 그다음 주에는 스무 번째 아내에 대한 환영식을 하기로 했었는데.
난 비행기야말로 문명이 만들어 낸 최고의 기술집약체라고 생각했었다. 내가 설계를 주도한 비행기들에 대해서도 큰 자부심이 있었다. 항법장치가 고장 났다는 승무원들끼리의 속삭임을 들었을 땐 자그마한 기능결함일 줄 알았다. 옆에 앉은 아내의 손을 꼭 잡은 채 금방 기체가 제 컨디션을 되찾고 순항할 것이라 믿었었다. 엄청난 흔들림에 정신을 잃고 눈을 뜨자 보인 풍경은 아주 낯설었고, 난 한참을 헤매며 걸어 다니다 이 녀석들에게 잡혀오게 되었다.
이곳의 생태는 상당히 생경하다.
낯선 질감과 자재의 건축물들, 기묘한 식물들. 태양과 달이 뜨는 주기조차도.
난 몇 번이나 이들에게 날 풀어달라고 소리치며 저항했지만, 그때마다 날 가둔 이 녀석들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나를 제압했다. 뿌리치려 해도 이 녀석들은 기괴하게 꺾인 관절들을 들이밀며 나를 간단히 깔아뭉개 버렸다. 내가 하는 말을 알아듣지도 못하는 녀석들이라 생각하니, 날 제압하여 누르는 이 녀석들의 체중 이상으로 답답한 마음이 들었다. 사람을 죽인 강력범죄자에게도 이 따위 대우는 하지 않을 거라고. 후안무치한 놈들 같으니.
난 내 아내가 어떻게 되었는지가 궁금했다. 이곳에 처음 왔을 때는 그 사실을 인정할 수 없어 울부짖었지만. 이제는 뾰족한 도형 같던 상실감의 모서리들은 동그랗게 무뎌졌다. 아마도 그녀는 죽었겠지.
내 스무 번째 아내. 얼굴조차 기억날 듯 말 듯하다. 이 녀석들이 나에게 수시로 주입하는 실험약물 때문일 것이다. 날이 갈수록 뒤죽박죽해지는 기억들 속에서 점점 뚜렷해지는 기억은 내 직업뿐이다. 기억의 부스러기가 조각조각 떠오르긴 하지만 방향을 잘 못 끼운 퍼즐조각처럼 무언가 불쾌하고 기괴하다. 다만 그 부스러기가 다소 무겁게 내 가슴속을 할퀴는 그 느낌은 어쩐지 죄책감과 닮았다.
난 시간이 꽤 많이 흐르자, 이곳에서 벗어나는 일은 기적과 같을 것임을 본능적으로 인지할 수 있었다. 이 괴상한 생김새의 녀석들에게 도망칠 수 없다면, 이들에게 친숙해지는 방식을 선택해야만 했다. 이 괴물들의 말을 알아듣기 위해 반복되는 그들의 말소리에도 귀를 기울였다. 반복되는 발음들은 외워가고 그들의 표정과 행동, 어조와 연관 지으며 대략적으로 그들의 말을 알아들으려 노력해 갔다.
이 녀석들은 보면 볼수록 굉장히 이형적인 생김새다. 완전히 다른 생김새의 존재를 직시하는 일이 생각보다 힘들다는 것은 겪어보지 않으면 모를 것이다. 정말 너무 징그러운 탓에 이 녀석들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던 나는 그마저도 적응이 되기 시작하자, 그들의 모습을 조금씩 분석하기 시작했다.
그 이후부터 이 녀석들이 나에게 약물투여를 하려 내 방 안에 들어올 때, 저항 대신 이 녀석들을 빤히 바라보았다. 들이미는 주삿바늘을 잡고 있는 손가락. 이 행성의 녀석들은 신부를 열명밖에 두지 못하는 것일까? 반지를 낄 손가락이 두 손을 합쳐도 그만큼 밖에 없으니. 무엇보다 내 기준에서 가장 징그러운 건 이 녀석들의 팔이다. 관절이 저런 방향으로 꺾이는 것이 아무리 봐도 적응이 되지 않는다. 심지어 팔도 두 개밖에 없다. 아니지. 팔 뿐만이 아니지. 다리도, 눈도, 귀도, 콧구멍도 전부 다 두 개밖에 없다.
이런 곳에 갇혀 항상 똑같은 일과를 몇 년째 강제당한다면 그 누구든 정신이 성할 리가 없다. 특히 강제적으로 이 외계인 놈들이 주사하는 약물은 내 머릿속의 기억을 마구 헤집고 마음대로 재조립한다. 투명한 물에 잉크를 푸는 것처럼, 실타래같이 미세하게 퍼져나가는 약물은 어느덧 형체 없이 내 기억 속에 완벽하게 녹아들어, 물의 색을 바꾸어갔다.
다만 불행 중 다행일까. 이 녀석들이 주사하는 약물을 정기적으로 맞아가며 조금씩 이 놈들이 하는 이야기들이 조금씩 또렷하게 들려왔다. 완전히 이해하긴 힘들었지만 대충 파편처럼 이해가능한 단어들을 끼워 맞추며 문장들을 유추할 수 있었다. 내가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한 것을 여기 녀석들이 눈치를 챈 것 같다. 그들은 더욱 적극적으로 나에게 말을 걸어오기 시작했다. 그 녀석들이 종종 나에게 들이미는 것은 몇 가지 아주 얇은 종이에 적힌 글들이었다. 종종 내가 제작했던 비행기의 모형을 보여주기도 했다. 분명 내 지휘하에서 제작된 비행기였다. 이 녀석들이 내 비행기들을 어떻게 알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그나저나 이것들을 들이밀며 이 녀석들이 뭐라고 했더라. '자극', '반응', '상기'?
난 드디어 이 녀석들의 속셈을 완전히 깨닫게 되었다. 이 이상한 곳은 이 외계인들이 약물을 주입하며 나를 그들과 똑같이 만드는 공장임을. 하지만 어리석게도 깨달았을 때는 늦었다. 내 손발이 언제부턴지 저 녀석들과 똑같이 변해있었다. 각각 두 개뿐이 없는 손발.
뿐만 아니라 이 낯선 행성에서 있었을 리 없는 기억들이 떠오르고 있다. 난 드디어 미쳐가는 것 같다. 그 이상한 주사는 나를 이곳의 인류로 변태 시키고 있었다. 그와 함께 너무나도 끔찍한 감정들이 오랜만에 만난 앙숙처럼 나를 조롱하며 떠오른다.
죄책감.
이 녀석들이 들이미는 종이들에 적힌 글도 이제 절반 이상 이해할 수 있었다.
'항법장치를 개발', '800개의 항로', '참사', '해외투자', '열아홉'.... 대체 무슨 내용일까. 몇몇 단어들은 내 이야기 같기도 했다. 특히 '참사'라는 단어 앞 쪽에 '스무 번째 비행기'라는 건 무슨 뜻일까. 무엇보다 이곳의 녀석들이 내 정보를 알고 있을리가 없을텐데.
내 정신이 잠식되어 가는 속도를 봤을 때, 더 이상은 이 녀석들의 약물주사를 허용해선 안될 것 같다. 다음 주사 때는 반드시 이 놈들의 목덜미를 이를 물어뜯고 탈출하리라. 온전히 괴물이 되기 전에 어디로든 도망칠 것이다. 난 경계심을 없애기 위해 다음 주사까지는 저항의 반응을 숨기고 녀석들이 원하는 반응만을 해주기로 했다. 그리고 지금 창살밖에서 비행기추락의 비극이 보도된 신문지와 내가 스무 번째로 만든 비행기모형을 보여주고 있는 녀석을 향해 나는 바보같이 웃어 보였다.
꼭 정신병에라도 걸린 사람같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