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컴컴한 방.
한 여자가 삐걱이는 몸을 이끌고 소파에서 일어났다. 권태로움과 의지박약. 이 여자의 삶은 단 몇 글자로 설명이 가능할 정도로 비루하고 초라했다.
너저분한 방바닥. 들러붙은 소파의 얼룩. 널브러진 음식용기와 들끓는 초파리보다도 지저분한 건 이 모든 걸 씻어내려는 듯 과도하게 기지개를 켜는, 여자의 몸에 먼지처럼 켜켜이 쌓여있는 나태함이었다.
강하게 온몸을 쥐어짜며 기지개를 켜자, 뻣뻣하게 굳어있던 그녀의 몸이 두둑 거리는 소리를 내며 비명을 질렀다. 주먹을 쥐고 팔을 쭉 펴니 방 안에 얼마 남지 않은 빛마저 모두 빨아들일 듯 새까만 그녀의 때 낀 손톱이 기지개를 켜는 그녀의 손바닥 중앙을 파고들었다. 몸은 조금 개운해졌지만 기름이 가득 낀 그녀의 두피는 가려움에 벅벅 긁어도 전혀 개운해지지 않았다.
지저분한 행색. 그녀는 언젠가부터 자신의 모습을 마주하고 싶지 않아 거울을 보지 않게 되었다. 아마 제 멋대로 뻗친 머리카락과 해진 옷가지, 새까만 손톱들은 유령과 다를 것 없는 몰골일 것이라 생각하며.
자그마한 집이었다. 그녀의 세상은 오로지.
그녀의 세상은 색깔이 없었다. 그녀가 소파에 앉아 멍하니 들여다보는 꺼진 TV 마저도 빨려 들어갈 듯 까맣고, 화면의 유리곡면은 전자파가 훑었던 시절이 까마득해 보였다. 이상할 정도로 그녀의 방은 햇볕이 들지 않고 늘 어두웠다. 잔뜩 녹슬어 버린 경첩이 위태롭게 붙어있는 현관문. 산화되어 녹슨 경첩의 빛깔은 아이러니하게도 얼핏 화려한 무늬 같아 보이기도 했다. 문의 전면은 건조해져 새빨간 페인트가 쩍쩍 갈라져있었지만 그녀의 세상 속에서 이는 유일하게 색채를 띠고 있는 것이었다.
그녀는 최근에 얼마 남지 않은 자신의 잔고가 그녀의 등을 떠미는 바람에 발코니에서 몸을 던질 뻔했었다. 발코니 창살 바깥의 바로 근처, 실외기와 실외기 받침대 사이에 세로로 끼워져 있는 비디오테이프를 보고 동작을 멈추지 않았더라면 정말로 현관문이 아닌 곳으로 마지막 외출을 할 뻔했다. 여자는 묘한 기분을 느끼며 생각했다.
'비디오테이프? 예전에는 많이 봤었는데. 그나저나 언제부터 이곳에 놓여있던 걸까.'
그녀는 잠깐의 충동으로 하마터면 투신자살할 뻔한 자신을 나무라며 비디오테이프를 응시했다. 눈을 옮겨 발코니 밑을 내려다보자 아득하게 보이는 지면이 빨려드는 느낌을 주어 순간적으로 정말 자신이 낙하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아찔한 느낌을 느끼며 여자는 개똥밭이라도 살아있음이 다행이라 생각하며 중얼거렸다.
'투신해서 죽은 귀신은 지독하다던데.'
그리고 수 일이 지난 어느 날. 문득 건물 밖이 소란스러움을 느낀 그녀는 발코니에 나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수많은 차들, 수많은 사람들이 자그맣게 보였다. 이 동네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드는 일은 좀처럼 없었기에 여자는 아주 흥미롭게 개미행렬을 내려다보는 아이처럼 그들을 구경했다. 한참 동안 밖의 현장을 넋 놓고 구경하던 여자는 현관문 밖도 어느샌가 소란스러워진 것을 깨닫고 잠시 망설이다 거실을 가로질러 현관문의 작은 렌즈로 복도를 내다봤다. 상당 부분 얼룩져있는 렌즈였지만 복도 반대편에 모여있는 사람들을 여자의 망막에 아로새기기엔 충분했다. 쩍쩍 갈라진 현관문의 건조한 페인트가 분진처럼 날려 여자는 작게 콜록거렸다. 오랜만에 많은 사람들을 보게 된 반가움도 잠시, 그녀는 불안감에 몸을 떨었다.
'설마 저 사람들. 여기 들어오려 하는 건가?'
나는 차 안에서 목적지로 가는 내내 투덜거렸다. 대체 왜 이런 곳에서 촬영을 하느냐고.
겁이 많았던 나는 요 며칠 밤을 설친 내 안색은 도저히 사람몰골이라 할 수 없었다. 내게 처음 왔던 제의는 분명 세트장에서의 촬영이었기에 공포영화의 주연이라는 제의에도 승낙한 것이었다. 갑작스러운 로케이션 촬영은 내 기분을 상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촬영장소에 도착하여 밴에서 내린 나의 눈에 을씨년스러운 빌라단지가 보였다. 생기라고 느껴지진 않는 콘크리트 덩어리들의 군집. 감독의 말로는 이 빌라 단지에는 재개발을 반대하며 버티고 있는 세 개 정도의 가구만 있으며 그마저도 사람이 들어와 살고 있진 않을 거라고 했다. 아주 가끔 무단으로 들어가 살고 있는 노숙자들이 있다곤 하지만, 그런 자들도 요즘엔 지역사회에서 엄중히 관리하고 있다니 안심하라나 뭐라나. 하지만 나는 그런 두루뭉술한 설득에 완전히 마음을 놓을 만큼 무던하고 관대한 성격의 남자는 아니었다.
나는 이번 영화의 촬영장이 될 건물을 올려다보며 코웃음 쳤다. 이런 허술한 감독하고 촬영을 해야 하다니. 나는 담배 한 대를 꺼내 어물며 불을 붙이고는 마음속으로 투덜거렸다.
'지역사회에서 엄중히 관리하기는 무슨. 그럼 저기 위층 발코니에서 우릴 구경하고 있는 여자는 뭔데.'
여자아이는 눈을 떴다. 빛이 잘 들지 않는 어둑어둑한 이곳에서 눈을 떴을 때, 부모님이 집에 계시지 않는 상황은 익숙했다. 일주일 내내 맞벌이를 하는 부모님은 아이가 자고 있을 때 아이의 식사만 차려놓고 출퇴근을 했다. 아이의 머릿속에서 부모님의 얼굴이 희미해질 무렵부터 아이는 현실밖의 세상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아이는 비디오테이프로 영화를 보는 것을 좋아했다.
TV 장 밑에 얇은 가로 형태로 놓여있던 비디오플레이어. 집에 있던 단 한 개의 비디오테이프를 플레이어의 날름 거리는 혓바닥에 맞춰 끼우면, 테이프가 들어가면서 철커덕거리는 기계적인 결합소리가 났다. 그리고 아귀에 맞게 들어간 비디오가 TV 영상으로 송출되던 쾌감.
아이는 자신의 보물이었던 비디오테이프를 언제나 아무도 숨길 수 없는 곳에 숨겨두곤 했다. 아이가 가장 아이답게 눈을 반짝이며 역동적으로 변하는 순간은 그 순간뿐이었다.
그 비디오테이프는 아이가 시청하기에 적절하다고는 볼 수 없는 공포영화였지만, 처음 본 공포영화는 아이에게 강렬함으로 다가왔다. 피를 뚝뚝 흘리는 배우들의 분장은 조악하고 어색했지만 그 조차도 아이에겐 눈뜨고 마주 볼 수 없을 만큼 충격적인 것이었다. 소리 지르던 여배우와 음산하게 화면뒤에 배경처럼 서 있는 서늘한 인영. 그 모든 장면들이 어린아이의 마음속에 영화배우의 꿈을 꾸게 만들었다. 하지만 현실의 좁은 집안에서 아이가 꾸는 천진난만한 꿈은 그 공포영화 비디오테이프에 담겨 기약없이 집안을 부유할 뿐이었다.
아이의 눈에는 언제나 화면 속 세상이 현실의 세상보다 매력 있게 느껴졌다.
몇 번이나 돌려 본 테이프 속의 기괴한 그 여자는 이제 아이에게 가장 친숙한 존재였다.
그 화면 속 여자가 정말로 아이의 세상을 침범하기 전까지는.
분명히 닮았다. 영화 속에서 나오던 그 음산한 모습. 집 안에 들어와 머리를 벅벅 긁으며 집 안을 괴이하게 돌아다니는 그 형상. 그것은 때때로 집 안의 한 곳에 멈추어 가만히 있다가 갑자기 온몸을 비틀었다.
그것이 나타난 이후, 더없이 좁던 아이의 행동반경은 더더욱 고립되었다. 아이는 방에 숨어있다가 그 이상한 무언가가 움직이지 않을 때에만 살금살금 집 안에서 돌아다녀야 했다. 그저 지쳐 잠들 때까지, 부모님이 퇴근해서 돌아오는 것을 기다리며 방 밖의 형상이 방 안까지 들어오지 않길 바랄 뿐이었다.
그 존재가 나타난 이후 아이는 자신이 숨겨놓은 비디오를 다시 찾아올 수도, TV 앞에서 비디오를 볼 수도 없었다. 그저 아이는 캄캄한 어둠 속에 웅크려 부모님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유일한 낙이 사라진 아이에게는 잔혹하게도 마지막 남은 빛조차 닿지 않는 듯했다. 비디오를 플레이어에 넣는 행위만으로도 꿈을 꾸었던 자신은 더 이상 없었기에. 억지로 외로움을 밀어내고자 비디오 속 세상을 마음속에 채워 넣던 아이는 그저 집 안 어딘가에 어둠과 함께 누운 채 끝나지 않을 영원한 밤 속에 다시금 빠져들 뿐이었다.
나는 촬영팀을 따라 로케이션 촬영을 하기로 한 가장 허름한 빌라로 들어갔다. 빌라의 외관은 이곳의 건물 중 가장 현대적이고 높은 건물이었지만, 이상할 정도로 가장 심하게 훼손된 느낌이었다. 내 뒤에는 어린 아르바이트생들이 돼지머리를 들고 낑낑거리며 층계를 따라 올라오고 있었다. 건물에 들어온 직 후 감각이 한껏 예민해진 나는 맨 뒤에 따라오고 있는 무속인이 너무나도 신경 쓰였다. 기괴하고 무서운 화장을 두텁게 칠한 중년남성의 존재는 누가 공포영화의 주연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그가 간헐적으로 눈알을 까뒤집고
'여.. 자..... 발...코..ㄴ..ㅣ...... 여... 자....'
라고 중얼거리지만 않았어도 이렇게까지 거슬리진 않았을 텐데. 내 눈에는 그 무속인이라는 자가 계속해서 자신이 실력 있는 무속인임을 호소하고자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고 여겨졌다.
뻔했다. 내가 돌팔이 사짜들을 한 두 명 본 줄 아는 건가.
시간이 촉박한 관계로 빠르게 고사를 지내고 첫 촬영을 바로 시작한다고 했었다. 나는 모든 게 불만이었지만 드디어 촬영장소인 호 수가 있는 층의 복도에 섰을 때는 분위기에 압도되어 어떤 생각도 들지 않았다. 등줄기에 기어오르는 소름이 누군가의 손길처럼 느껴졌다.
시선. 분명 시선이 느껴졌다. 누군가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
그때 가장 어린 촬영팀 막내가 복도 끝 쪽에서 분명 누군가의 소리를 들었다고 울음을 터뜨렸다. 누군가가 콜록거리는 것 같은 소리를 들었다며 복도 끝의 빨간 페인트가 쩍쩍 갈라진 문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무속인은 막내에게 조심하라고 말했다. 저 안에서 수상한 기운이 느껴진다면서.
'투신귀'. 한참 무엇을 감지하려는 듯 두 눈을 감고 있던 무속인은 말했다. 투신하여 죽은 자로서 가장 악질적인 혼령이 분명하다고 했다.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무속인의 말에 모두가 굿판을 세팅하는데 더욱 박차를 가했다. 분위기에 압도된다는 건 무서운 일이었다. 평소엔 터무니없다고 코웃음 쳤을만한 이야기를 들으며 닭살이 돋은 나 자신에게 자존심이 상했다.
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멍하니 바라봤다. 나는 무속인을 속으로 조롱하며, 일순 '투신이고 나발이고 혹시 저 놈이 돌팔이가 아니라면 지금 내 조롱도 들릴까'라는 생각을 했다. 무속인이 내 쪽은 쳐다보지도 않는 걸 보며 나는 안도했다. 무속인은 '인세에 미련이 있는 혼령들은 자신이 죽은 줄도 모르는 경우가 많다. 이곳에 있는 영들을 해결하지 않고 촬영에 착수한다면 촬영장에는 끔찍한 일이 일어날 것이다.'라고 말하며 요란한 외투를 몸에 걸쳤다. 나는 그 으스스한 말에, 나야말로 이 음침한 장소에서 귀신을 보고 쇼크사라도하면 감독에게 달라붙어 평생을 괴롭힐 거라고 다짐했다.
사람들의 부산스러운 움직임 속에 복도에 조촐한 고사상이 차려졌다.
무속인은 지금부터 이곳의 영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생에 미련이 있는 영이 있다면 그들의 미련을 풀어주고 달래줄 것이라고 말했다. 뒤늦게 헐떡이며 올라온 감독이 혹시 모르니 이 장면들도 모두 카메라에 담자고 말했다.
무속인의 의식이 시작되자, 공포가 묻어난 작품 밖의 내 얼굴이 찍힐까 봐 부끄러운 마음에 나는 무리의 맨 뒤에 섰다. 그 바람에 하필 막내가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던, 예의 복도 끝 집의 문을 내가 최전방에서 등지고 있는 상황이 되었다. 무속인이 미친 사람처럼 눈을 뒤집고 의식을 시작하자, 부끄럽지만, 나는 등줄기에 닭살이 올라오는 기분이 들어 몇 번이나 뒤를 돌았다. 네 번쯤 뒤 돌아봤을 때 나는 생각했다.
'저 문 원래 열려있었나?'
어느 날이었다.
인기척이 들렸다. 분명히 부모님이 귀가할 시간이 아니었지만 누군가가 현관문 밖에 와 있었다. 소란스러운 그 소리는 너무나도 달콤하게 느껴졌다. 아이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살려면 지금 나가야 한다는 것을.
아이는 한참을 갈등했다. 그 존재. 분명 방 밖에 있을게 분명했다. 살금살금 문의 경첩소리가 나지 않도록 방문을 천천히 열었다.
거실에 우두커니 서 있는 그것은 미동도 없었다. 기괴할 정도로 이질적인, 완벽한 정지상태.
그리고 역광.
그 존재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자세히 식별되지 않고, 그저 실루엣만이 보일 뿐이었다. 정전기로 가닥가닥 떠 있는 솜털들처럼 머리 그림자의 윤곽은 사방으로 머리털이 뻗쳐있었다. 아이는 그것이 당장에라도 자신에게 괴성을 지르며 달려올 것 같아 떨려오는 팔다리를 있는 힘을 다해 제어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아이를 가장 공포스럽게 하는 것은 창 밖에 희미하게 비치는 자연광이 그것의 후광을 비추고 있는 것과, 그 때문에 그것이 서 있는 모습이 앞모습인 뒷모습인지를 분간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지금 저 존재가 서 있는 모습이 앞모습이라면? 그런 생각이 들자 아이는 도저히 현관문까지 갈 엄두를 낼 수 없었다. 공포감에 몸이 뻣뻣해진 아이는 한참을 고민하다 그 존재가 등을 돌리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현관문까지는 불과 3~4미터였다. 설령 저 존재가 지금 앞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었다면 전력질주하여 문을 박차고 나가 도움을 요청하리라.
'근데 문고리가 잠겨있다면? 위에 달린 걸쇠는?' 아이에게 간과하고 있던 생각이 떠올랐던 건 안타깝게도 발걸음을 떼면서와 동시였다. 그리고 그 존재가 뻣뻣하고 기괴한 발걸음으로 아이를 향해 다가오자 아이는 자신의 도박수가 틀렸음을 깨달았다. 아이는 미친 듯이 뛰는 심장을 부여잡고 급하게 진로를 바꾸어 어둠 속에 숨었다. 이곳은 어두웠기에 저 존재도 자신을 못 봤길 바라며.
그 존재는 급히 어둠 속에 몸을 숨긴 아이를 향해 곧장 걸어오기 시작했다. 정확히 식별되지 않는 그녀의 얼굴은 어떤 표정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건 쩌억쩌억거리며 바닥의 점성이 내는 소리로 인해 그 존재가 맨발이라는 것과 걸을 때마다 위아래로 흔들리는 몸 때문에 산발이 된 머리카락이 함께 들썩거리고 있다는 것. 그리고 달빛에 순간적으로 잠깐 보이는 손톱은 달빛에 저항하듯 새까맣다는 것.
방바닥만큼이나 끈적한 그 존재의 작은 숨소리가 고요한 집 안에 울려 퍼졌다. 그리고 아이에게 가까워진 그 존재의 숨소리가 속삭임 정도의 크기로 들리기 시작했을 때였다.
그 존재는 아이의 앞에서 진로를 바꾸어 현관문 쪽으로 향했다. 어둠 속에 몸을 묻고 입을 필사적으로 틀어막은 아이와 불과 오십 센티 정도가 떨어진 거리를 스쳐 지나갔다. 다행히 아이를 보지 못한 듯했지만, 불행히도 아이를 지나 그것은 현관문 앞에 서서 말뚝처럼 멈춰 섰다. 그리고 다시 기괴할 정도로 아무 미동도 없이 멈춰있었다. 아이는 그 괴이한 장면으로 인한 공포감보다 눈앞에서 탈출로가 막혔다는 사실에 크게 절망했다.
드디어 만나게 된, 어쩌면 마지막이었을지 모를 탈출의 기회. 결국 절망감에 아이는 처음으로 흐느껴 울었다. 통제를 잃은 울음소리는 그 존재에게 닿을 정도의 크기로 새어 나왔다.
그리고 울음소리가 그 존재에게 닿았을 때, 그 존재는 끔찍한 음성으로 커다란 괴성을 내기 시작했다.
그날 이후로 꽤 많은 시간이 지났다.
그날의 일은 아직도 떠올리고 싶지 싫다. 몇 번이나 그날의 회상과 직면하여 기억의 고통에 저항하려 해도, 그 대목에 이르러서는 지금까지도 몸이 부르르 떨린다.
망할 감독이 로케이션 촬영으로 말을 바꿀 때부터 이런 촬영은 그만뒀어야 했는데. 그 자식은 그때 고사와 굿판을 촬영한다고 모든 영상을 기록했겠지만 난 그 영상을 다시 볼 생각조차 들지 않는다. 굳이 볼 필요도 없다. 촬영이 한 달째 중단된 채로 정신과치료를 받고 있는 지금도 그때 그 순간은 여전히 방금 일처럼 선명하기에.
그 복도 끝에 있는 문이 열렸을 때, 문과 가장 가까이 있던 나는 모든 것을 볼 수밖에 없었다.
빌라의 복도를 가득 메울 정도로 괴성을 지르며 다가오던, 핏발 선 눈. 새카만 손톱과 산발한 머리는 분명 이 세상 사람의 것이 아닌 것처럼 보였었다.
그 섬뜩한 빨간 페인트가 쩍쩍 갈라진 복도 끝 현관문, 그것이 그 열린 문에서 나와 복도 끝에서부터 달려올 땐 모든 인원들이 혼비백산했다. 엎어지거나 도망가느라 서로 밀치며 계단에 굴러 떨어지는 등 그 현장은 지옥도와 다름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경악하여 함께 도망가던 무속인아저씨도 찍혔으려나. 그 영상은 공포영화가 아니라 코미디영화로 개봉해도 좋을 텐데. 하여튼 돌팔이들은.
난 아직도 몇 가지 의문이 있다. 그 기괴한 여자가 복도 끝에서부터 달려와 층계참으로 사라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 팀의 신고를 받은 경찰이 와서 빌라 건물 한 구석에 숨어 있던 그 여자를 잡아갔었다. 경찰말로는 장기간 그 건물을 무단점유하여 불법거주 하던 노숙자라고 했다. 감독이 했던 말은 역시 믿으면 안 됐다. '지역사회가 무단침입한 노숙자들을 엄중히 관리한다고?' 웃기고 있네.
본론으로 돌아와서, 내가 아직 해결하지 못한 의문은 그 노숙자가 귀신같은 몰골로 복도를 가로질러 우리를 향해 달려들 때, 그 너머로 보이던 열린 문. 그리고 집안에 울상이 되어 서 있던 그 여자아이다. 경찰조사에서도, 현장에 있던 어떤 이들도 그 여자아이에 대한 이야기는 왜 아무도 하지 않는지 아직도 영문을 모르겠다.
유일하게 그 돌팔이 무속인만 내가 여자아이에 대해 말할 때 반응을 보였다. 물론 그 아저씨는 이내 고개를 저으며 모른 척했지만. 아. 맞아. 그 산발한 노숙자도 아이에 대해 말했었다고 했지. 문 밖에 있는 촬영팀을 구경하고 있는데 등 뒤에서 어린아이가 흐느끼는 소리를 듣고 놀라서 뛰쳐나온 거라고.
그 이후 '여자아이'라는 단어를 들은 건 단 한 번뿐이다. 경찰조사가 마무리되었을 때쯤이었나. 그 노숙자가 무단점거하던 집. 오래전에 부모에게 방치된 여자아이가 혼자 놀다가 발코니에서 떨어져 실족사 한 사건이력이 있는 집이라고 했다.
가엾게도. 무슨 보물이라도 발코니에 숨겨놨었나.
뭐. 어쨌든 그 사건은 꽤 예전에 있었던 일이니 그날의 일과 관련은 없겠지만.
그나저나 요즘도 망할 그 감독 놈은 그날의 영상을 썩히긴 아깝다며 편집을 거쳐 단편 공포영화로 내보낸다고 난리다.
내가 봤던 그 여자아이가 영상에 찍혀있을진 모르겠지만, 만약 내가 본 것이 헛 것이 아니었다면 그 영화의 주연배우는 사실상 그 여자아이가 아닐까 싶다. 폐건물에 몰래 숨어 살던 노숙자의 뒤에 찍힌 여자아이라니. 섬뜩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