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잡담 글
짧은 영화 잡담글_<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내가 자취하던 때, 너무너무 깊은 사색으로 인해 심리적 잠수병에 걸렸었다.
그래서 진짜 질소중독이라도 왔던 건지, 가만히 있는데도 누구에게 쫓기 듯 숨이 가빠오고 하루하루가 어찌나 지독하게 외롭고 고독했는지 모른다.
혼자 하는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며 결국 언제나 부정적인 결론으로 귀결되기 마련이었고, 그 속에서 자기변호와 비하로 점철되어 있는 자신을 발견하곤 했다. 우울한 감정은 가시질 않았고 자존감은 바닥을 쳤다.
속된 말로 '예술충'으로서의 자아가 크게 성장했던 것 같다.
그 당시 내 심리적 자학의 주제들 중 하나는 "떠난 인연"들이란 주제였었는데, 손가락으로 브이만 해도 셀 수 있는 내 연애 횟수를 채워준 (구) 애인들을 떠올리는 일들이 바로 그것이었다.
슬프도록 아름다웠던 여러 장면들, 낯선 사랑이란 감정에 제대로 마음을 못 가누던 내 모습..... 나도 내가 불완전한 사람이라 여겨왔지만 이 정도로 불완전할 줄은 몰랐다. 복기하다 보니 지금조차도 쓴웃음이 나온다.
이 영화에 대한 첫 기억은 2012년, 내가 당시 짝사랑하던 사람이 추천해 줬던 영화다.
그렇게 몇 년을 잊고 살다가 연극, 영화를 배울 때 교보재로 이 영화를 부분 부분 다시 접하게 되었다.
그 이후 영상예술에 흥미를 가지기 시작했고, 또 몇 년이 지난 후 대학원에서 조교를 할 때쯤이었다. 그때 나는 늦은 밤 차가운 자취방에 혼자 이불을 뒤집어쓰고 영화를 보는 게 삶의 낙인 시기가 왔었다. 그런 감정적 암흑기에 보던 영화는 나에게 일상을 마비시킬 정도로 강력한 영감과 멜랑꼴리를 주곤 했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은 정말 나에게 있어 정말 해일 같은 무지막지한 감정의 동요를 준 영화였다. 심지어 당시 난 봉선화연정처럼 손대면 톡 하고 터질 것만 같은 사람이었기에.
남주 츠네오는 정말 평범한 대학생이다. 나름대로 성실한 면도 있고 친구들과 만나면 같이 학식을 먹으며 야한 농담 따먹기를 하기도 한다. 아르바이트를 하고 측은지심도 있으며 짝사랑하는 사람도 있고 잠자리파트너도 있다. 퍽퍽한 삶이지만 낭만이 있고 생을 좇으며, 추한 면도 있고 비밀도 있는, 그렇기 때문에 그냥 평범한 사람이다.
조제는 두 다리를 못 쓰고 휠체어에 앉아 생활하고 책을 사랑하며 고립된 삶을 살지만, 눈이 맑고 지혜로우며 더없이 사랑스러운 동화 같은 여자다.
내 눈에 영화 속 츠네오의 세상과 조제의 세상, 그리고 둘이 함께하는 세상이 각자 독립되어 보였다. A, B가 새로운 시너지를 주는 사랑. 그리고 헤어지면 다시 원래의 A, B로 돌아가는 이별.
이 영화에 내가 강한 감정적 타격을 받은 이유는 츠네오에게 내가 투영되어 보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평범한 세상을 보고 살던 사람의 세상에 갑자기 비집고 들어온 인연이다. 일직선으로 가던 기차선로가 마구마구 뒤섞이고 난리가 나면 어떤 기관사라도 동요할 것이다. 다만 츠네오는 강하지 않아서, 의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실력 좋은 기관사가 아니라서 엄청난 격동을 겪게 된 것뿐이다.
얼마나 행복하고 또 얼마나 괴로웠을까. 나의 끔찍했던 이별통이 절로 떠올랐다. 그래도 츠네오는 나보단 강했는지 격통을 성장통으로서 이겨내고 더 강해진 것으로 보인다. 조제가 지금 츠네오의 곁에 있을지 없을진 모르겠지만, 어느 쪽이던 이제 츠네오가 바라보는 세상은 완전히 변해있을 것이다.
내 사랑의 마음은 아직도 성장통을 딱히 이겨낸 것 같진 않다. 약간 고장 난 것 같은데.
조제는 너무나도 사랑스러운 여인이다. 영화를 보면서 시청자로서의 내가 극 중 인물에게 사랑에 빠지는 느낌이 상당히 새로웠다. 영화 내내 진심으로 조제의 행복을 빌었으며, 조제가 행복할 땐 나도 행복하고, 슬플 땐 나도 같이 슬펐다.
야무지고 똑순이 같지만, 불편한 몸으로 고립되어 쌓여온 모든 사소하고도 커다란 서러움들은 그녀도 결국 똑같은 사람임을 깨닫게 해 주었다. 츠네오와의 관계에서도 조제는 정말 강하고 현명했다. 순수하고 아이 같았지만 깊은 통찰을 하였고 그녀는 다리가 멀쩡한 츠네오보다 더 강하게 우뚝 설 줄 아는 사람이었다.
예쁜 조제야. 잘 지내니.
헤어져도 친구로 남는 여자도 있지만 조제는 아니다.
조제를 만날 일은 다시는 없을 것이다.
가질 수 없기 때문에 더 아름다운 게 있는 법이다.
나는 미래지향적이라기 보단 과거에 사는 사람으로서, 현재도 과거가 내 자아의 최대주주이다. 한때 당연한 듯 나의 일부였던 것이 '이제는 다시 만날 수 없고, 다시 만날 일 없고, 다시 만나면 안 되는 존재'임을 알기에 더 괴로워지고 씁쓸해지는 것 같다. 이 감정조차도 사랑이 남기고 간 통증이라고 굳게 믿는다. 이제는 사실상 상상통이지만.
이별의 이유는 여러 가지였지만.... 아니, 사실은 하나다.
내가 도망친 것이다.
자조적이고 씁쓸하지만 덤덤한 성찰을 담은 꽤나 인상적인 독백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랑이라는 고결한 감정을 완전히 배신하고 등질만큼 츠네오는 개차반인 사람은 아니었다. 그저 만화 '원피스'에 나온 말처럼 "사랑은 언제나 허리케인!" 일 뿐이다.
나도 더 잘할 수 있었고 더 강할 수 있었을까. 그게 아니라면 미성숙하고 약했기에 아름다운 사랑이었을까?
오호. 통재라. 정말 지긋지긋하게도 시행착오가 많았다.
"언젠가 당신은 그 남자를 사랑하지 않게 되겠지" 베르나르는 조용히 말했다.
"그리고 언젠가는 나도 당신을 사랑하지 않게 될 거야, 우린 또다시 고독해지고.
모든 게 다 그래. 그저 그렇게 흘러간 1년의 세월만 있을 뿐이야"
쇼펜하우어가 말하길, 삶은 짊어지고 가야 할 부역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었다.
정신 차려보니 태어나있고 살아가게 된 우리는 그저 유한하고 한시적인 행복에 희망고문을 당하며 바보 같은 반복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너무 어리석고 가엾고 아름답다. 덧없기에 아름답다니.
오니가 되란 말은 꽤나 설득력이 있는 말이지 않을까 싶다, (Feat. 귀멸의 칼날)
예정된 이별, 예정된 괴로움을 이미 알고 있지만 바보같이 우리는 또다시 사랑할 수밖에 없다. 이별 때문에 사랑을 포기하기엔 사랑이란 언어 그대로처럼 너무나도 사랑스러우니까.
회자정리보다는 거자필반이 조금 더 강한 녀석이길.
처음부터 나는 그렇게 깊은 바닷속에 혼자 있었어. 하지만 그렇게 외롭지는 않아. 처음부터 혼자였으니까.
언젠가 네가 없어지게 되면 난 다시 미아가 된 조개껍데기처럼... 혼자서 바다 밑을 데굴데굴 굴러다니게 되겠지............
하지만... 그것도 괜찮아!
조제는 츠네오와 떠난 그 애틋한 여행에서 '세상에서 가장 야한 섹스를 하자'라고 말한다. 그리고 조개껍데기 모양의 침대가 있는 러브호텔에 가서 잠든 츠네오에게 속삭인다.
사실 이 대사가 영화를 관통하는 문장이다. 외로움이란 그야말로 모르는 게 약이다. "함께"라는 행복이 학습되면 그때부터 여실히 느껴지는 괴로운 감정. 너무나도 괴롭지만 동시에 사실은 가장 익숙한 감정.
그래서 외로움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게 되나 보다.
괴롭지만 편하니까.
해당 영화의 예찬론자로서 내 부족한 필력으로 갓띵작을 떠드는 게 예의가 아니라고 느껴진다.
하지만 동시에 내 인생에서 최고점의 강렬한 페이소스를 준 영화 중 하나를 이렇게나마 언급하는 것이 예의 같기도 하다는 생각이다.
나는 인생영화를 꼽으라면 망설이지 않고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이라고 말하는 사람인데, 왜 좋았냐고 물어보면 도저히 대답할 수가 없었다. 단순한 언어적 표현으로는 담을 수 없는 울림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때문에 앞으로 인생영화인 이유를 누가 묻는다면 이 글의 링크를 보내줄 생각이다. (대충 인생영화인 이유라는 글)
연출적인 면에서도 하고 싶은 말이 많은 영화이지만, 분석글보다는 예찬글이기에 글의 맥락과 흐름이 해당 분석에 대한 언급을 허락하지 않을 것 같다. 여기서 글은 이만 줄이는 걸로.
마지막으로 이 영화의 전체를 관통하는 끝내주는 말을 누가 영화 평점에 남겼더라. 혼자 보기 아까워서 첨부하며 글을 마무리하려 한다. "와 딱 이거다" 싶었다. 내 언어능력 반성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