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악 등반 그 무모한 도전 (2)

하루에 이루어진 기적의 시간들

by marina

-제2화 하루에 이루어진 기적의 시간들-하산의 험난한 길, 그리고 고마운 두 청년-



대청봉에서 머문 시간은 대충 잡아 30여분 남짓이라 열 시간 이상의 강행군으로 인한 노곤함이 풀리기엔 많이 부족한 시간이었지만 어둠을 피하려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어서 머뭇거릴 시간도 없었고 어디 머물러 쉴 곳도 마땅히 없었으며 장비 하나도 준비 없는 초행의 등반이다 보니 극기 훈련도 이런 극기 훈련이 없을 정도의 무모한 도전이라는 어리석음을 뒤늦게 자각했지만 결코 다른 선택지는 없었기에 하산을 시작한다.

산의 어둠은 일찍이 찾아오는데 사람의 시간은 다섯 시를 무심히 알리고 있고 애타는 사람의 마음을 외면한 채 모두 제각기 갈 길을 걷고 있다.


오색방향의 하산 길은 오를 때와 마찬가지로 울퉁불퉁 험난하고 급경사로 인한 모양새로 내려가는 길은 더 힘들다는데 체력은 바닥으로 떨어져 다리는 휘청이고 산의 어둠은 속도를 더 하며 우릴 감시하니 진퇴양난 이란 말이 지금의 우리를 두고 하는 말인 것만 같았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인한 선택과 설렘이 막다른 길일 수도 있다는 두려움의 엄습으로 인하여 정신은 혼미해지고 무서움은 나의 마음을 이미 지배하여 더 빠르게 더 빨리 발걸음을 재촉하라고 지시하고 있다.


산의 어둠 도시의 어둠과는 무척이나 다르다. 불빛하나 없는 캄캄함, 초록의 나무 빛도, 계곡의 물도, 낭떠러지도, 아무것도 분간할 수 없는 칠흑 같은 어둠 그 자체였다. 다만, 늦게 하산하는 사람들의 길을 밝혀주는 단 하나의 빛은 고운 달님의 온정과 배려의 빛 그것뿐이다.

외로운 하산 길을 동행해 주는 고마운 은인의 빛, 그나마 위험한 길로 빠지지 않도록 생명유지를 도와주는 은혜의 빛이다.


물론 등반을 자주 하는 사람들은 나무숲에 가려진 은은한 달빛을 즐기며 준비된 장비를 이용하여 산의 어둠을 뚫겠지만, 젊음을 무기로 생각한 준비성 없는 무모한 젊음은 무작정 어둠이 내려앉는 산길을 걸으려면 달님의 존재가 구세주가 되어야 한다. 어둠은 절대 자비가 없기 때문이다.


시간이 또 시간을 달리하고 어둠이 점점 색을 달리하여 우리를 쫒고 있으니 어둠 속에 갇혀가는 우리는 이제 두려움이나 위기의식조차 느낄 겨를이 없을 정도로 무의식 상태에 접근하고 있다.

플래시 하나 없는 손은 무심결에 짙어져 가는 어둠을 저으며 혹시나 있을지도 모를 사람의 흔적을 찾느라 그나마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있고 무작정 디뎌지는 발걸음을 따라 어렴풋한 의식에만 기대어 요행을 바라고 걷고 있다.


어디쯤 내려왔을까. 위치 분간을 잘 못하고 있을 즈음 설악산에서 밤을 지내려 텐트를 치고 있는 젊은 두 청년을 만난다.

어둠이 물든 산에서 사람을 만났다는 반가움에 우리는 다시금 정신을 차리며 내려갈 길을 묻는데, 그들은 우리의 상태를 살펴보고 안 되겠는지 함께 하산하자는 제의를 하고 풀었던 짐을 다시 꾸리기 시작한다. 우리는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며 죽음도 불사하는 무모한 행동이었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장비 하나 준비 없는 초행의 첫 등정을 새벽부터 시작하여 설악의 정상을 찍고 내려오려니 사랑도 죄고, 젊음도 죄고, 무지도 죄가 되는 상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마운 산 사람들과 어둠의 산길을 동행하여 수없이 휘청거리는 발걸음으로 계곡물에도 첨벙, 나뭇가지에도 긁히고,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그나마 엷은 빛을 내뿜는 플래시에 의지해 길을 찾으며 내려오고 또 내려오고, 몸은 이미 기운을 잃어 흐느적거리고 의식이 거의 흐릿해질 무렵이 되니 설악산 오색방향 하산 끝이란다.

드디어 평지에 내려선 것이다.


그때서야 정신이 좀 들었는지 '아 살았다'는 말이 나오며 안도의 큰 한숨을 쉬었던 것 같다.

온몸은 물에 젖고 흙에 쓸려 엉망이었어도 휘청이는 발걸음을 멈추고 다리를 쭉 뻗고 오색의 밤 아스팔트 위에 몸을 눕히고 나니 죽어가던 감정이 다시 살아나며 눈을 떠 오색의 밤하늘을 올려다본다.


눈앞 가까이 파란 하늘이 내려앉은 듯 선명하게 보이고 별들의 잔치가 있어 모두 그곳에 온갖 별들이 다 모였는지 반짝반짝 빛나는 찬란한 벌들이 촘촘히 하늘을 덮으며 그들 이야기로 오색의 밤을 수놓고 있어 生에 처음 보는 아름다운 광경에 지친 몸과 마음도 조금씩 회복되어 가고 있는 듯싶었다.


태초의 자연환경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청정한 환경이라서인지 강원도 설악의 하늘 별빛의 아름다운 광경은 그야말로 잊지 못할 극치의 찬란함이었다는 표현이 딱 맞는 것 같았다.

숙소로 간신히 돌아온 그날은 꿈도 자리를 잃은 까닭인지 산 듯, 죽은 듯, 그 시간들을 삼켜버렸고 다음 날 일어나니 점심시간이 훨씬 지난 오후의 시간이었다.


설악산 등정의 무모한 도전이나 성공에 박수를 보내야 할지 갈피를 못 잡겠는 무모한 도전이었지만 어쨌든 힘든 여정을 견뎌내고 성공의 강한 의지를 보인 우리 자신들에게 칭찬과 격려를 보내며, 자신들의 즐거운 설악의 일정을 포기하고 길 잃은 우리의 수호자가 되어 안전하게 목적지에 도착하도록 선의를 베푼 두 청년들께 깊은 고마움을 전하며 그들의 앞날이 멋지게 펼쳐지기를 기도했다.


젊은 날이었기에 할 수 있었던 도전은 평생 잊히지 않을 도전이었으며 이제는 그를 찾아갈 기회도, 오를 힘도 없는 연륜이 되어 그리운 곳으로만 남게 되었지만, 30여 년 전쯤 설악 대청봉에서 내려다본 파아란 바다 빛깔, 지상세계를 내려다보는 듯 한 신비롭고 정감 있는 풍광, 된바람과 시간을 내려놓고 한가로이 노닐던 따사로운 햇살, 신선의 놀이터에서 유유히 머물러 있던 운무, 그리고 다시 보고 싶은 그 산세의 수려함과 범접할 수 없는 장엄한 그 기운들, 다시 느낄 수 없으나 다시 느끼고 싶은 그 희망은 이제는 나의 꿈으로만 남게 되었다.


나의 젊은 날 그 발자국을 따라 다시금 오르고 싶은 대 설악의 대청봉이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