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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음표 Sep 29. 2024

대학에서 노숙한 이야기

2학년이 시작하면서 배정받은 기숙사 방에서 웅웅 거리는 소리가 계속 들렸다. 방에 있기만 해도 온몸이 떨릴 정도로 거슬렸다. 소음을 묻어보려고 선풍기도 틀어보고 노이즈 캔슬링 헤드폰도 써봤지만 효과는 없었다. 안 그래도 소음에 민감한데 이런 방에서 계속 지내다 보니 점점 더 예민해졌다. 나중에는 방에서 한숨도 잘 수 없는 상황까지 갔다. 방을 바꿔달라고 학교에 꾸준히 항의했지만, 학교에서는 학년이 끝나갈 때까지 "방이 없다"면서 문제를 방치했다. 결국 나는 조금이라도 잠을 자기 위해 학생 휴게실에서 노숙하기 시작했다.


새벽 3시쯤 화장실에서 세수하면서 머리도 감았다. 3-4일에 한번 기숙사 방에 들어가서 몸도 씻고 빨래도 해결했다. 그 외에는 기숙사 방에 거의 들어가지 않았다. 탈가정을 결심하고 나서 부모를 피해 밖을 돌아다니던 때가 겹쳐 보였다. 그때는 스터디카페에 붙어있었고 대학에 입학해서는 학생 휴게실에 붙어 있다는 차이밖에 없었다.


노숙을 시작하고 나서부터는 학교에 다니면서도 아무것도 배울 수 없었다. 건강을 지키기 위해 입학 전부터 설계해서 1학년 내내 유지하던 루틴들도 망가졌다. 몸과 마음이 지칠 때 회복할 공간을 잃었다는 점이 가장 치명적이었다. 공부에 집중하려고 해도 고장 난 컴퓨터에 블루스크린이 뜨는 것처럼 생각이 '비어버렸다'.


의식주를 위협당해 체력과 정신력이 바닥까지 떨어지면 나를 나로 만들어주는 가치들을 하나하나 강제로 포기하게 된다. 나는 부당한 일을 당하면 끝까지 항의해서 바꾸려는 사람이다. 하지만 이때는 학교가 소음 문제를 몇 달 동안 방치해도 대응하지 못하고 끌려다니기만 했다. 대응할 만한 여력이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학에 입학하면서부터는 부당한 일이 생기면 바로바로 소통해서 해결하는 자세를 기르려고 노력했지만, 노숙까지 몰리면서 당한 일이 애써 기른 습관을 망가뜨렸다.


나는 진심으로 배움을 즐기는 사람이다. 소음에 시달리지 않았던 1학년 때는 토론 수업에서 언급된 책을 도서관에서 죄다 찾아서 읽어보고 교수한테 질문하러 갔다. 하지만 노숙하고 있었을 때는 읽어오라는 과제도 거의 읽어가지 못했다. 나는 무작정 외우는 대신 원리를 이해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노숙할 때는 개념을 붙잡고 앉아서 원리가 이해될 때까지 고민할 만한 집중력이 남아있지 않았다. 주워들은 내용을 무지성으로 던져 넣어서 과제를 제출하는 데만 급급할 때가 많았다. 기본적인 생존을 유지하는 데 모든 집중력을 빼앗겼기 때문이다. 열정이고 꿈이고 도전이고 기본권을 부정당하는 상황 앞에서는 소용없었다.


2학년이 끝나고 자취방을 구해 기숙사를 나갔다. 겉보기에는 상황이 나아지고 있었지만, 전적대(돌아갈 생각이 없어서 전적대라고 부른다)는 이미 속해있는 것 자체로 트라우마가 생기는 공간이 되어 있었다. 결국 나는 그다음 학기를 끝으로 전적대에 남은 모든 미련을 정리하고 살던 곳으로 돌아왔다.


나는 대학 등록금을 대기 위해 가정폭력 가해자들에게 손을 벌려야 하는 상황이었다. 가해자들의 소득 때문에 웬만한 장학금은 지원조차 할 수 없었다. 그리고 대학은 나의 경제적 족쇄였던 등록금을 매 학기 받아가면서도 기본적인 의식주를 위협당하는 상황에 나를 몇 달 동안 방치했다. 


돌아갈 수 있는 안전한 공간만 있었어도 대학교에서 노숙하는 말도 안 되는 일은 피해갈 수 있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돌아갈 곳이 없었다. 그래서 부당한 일을 당하면서도 속수무책으로 끌려다녔다. 내 성장기를 집어삼켰던 가정폭력이 나를 더 큰 폭력 속으로 밀어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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