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혐오와 성차별은 당연하지 않다
장애혐오와 성차별은 당연하지 않다
감각이 예민해서 브래지어를 차지 못한다. 억지로 차고 버티면 누군가가 갈비뼈를 끈으로 묶고 숨통을 막아버리는 느낌이 든다. 멍해져서 다른 일에는 아예 손을 대지 못한다. 경험상으로는 6시간 정도 버티면 고통이 감각의 역치를 넘어가서인지 감각이 무뎌진다. 좀 덜 힘들어졌나 싶으면 이미 탈진해있다. 브래지어를 찰 때마다 이 고통을 반복해서 겪어야 했다. 적응할 수 있다고 설득당해본 기억은 있지만 실제로 적응한 기억은 없다.
브라 때문에 버티기 힘들다고 주변에 말해봐도 돌아오는 건 비장애인에게 맞춰진 충고뿐이었다. 자주 차고 다녀서 적응하면 편해진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브래지어를 차고 자보기도 했고 억지로 버티려고도 해봤지만 몇 년이 지나도 편해지지 않았다. 편한 브라를 찾으면 된다는 말도 들어봤다. 그런데 아무리 종류를 바꿔봐도 등 뒤에 무언가 닿는 느낌만 들면 끔찍한 감각이 되살아났다. 나를 키운 여성 양육자는 내가 황금 가슴이라도 가진 것처럼 유난을 떤다고 했다.
유난이 아니었다. 성인이 되고 나서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나는 자폐인이다. 공식적인 진단을 받을 기회도 없었고, 장애인 등록은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었다. 하지만 내 삶은 자폐인 여성의 삶이다. 자폐인인 줄 몰랐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학교에서 경험한 장애차별과 성차별
보수적인 지역에서 여자중학교를 나왔다. 알지도 못했던 장애 때문에 학교폭력에 시달렸던 초등학교 때보다는 낫다고 생각했지만, 성차별적인 학칙과 나의 자폐특성이 맞물리면서 당시에는 설명할 말조차 찾을 수 없던 피해를 봤다. 학교는 학생들의 속옷까지 통제했다. 눈에 띄지 않는 색깔의 브라에 끈 자국을 가릴 단정한 흰색 속옷을 요구했다. 어떤 학생은 무늬가 있는 브라를 차고 등교했다는 이유로 벌점을 받았다. 여자는 아이를 낳지 않으면 병에 걸리는 몸이라고 대놓고 말하던 선생님도 있었다. 2010년대에 일어난 일이다.
어렸을 때는 브라를 차지 않아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교복을 입어야 하는 중학교에서는 확실히 티가 났다. 특히 하복. 아까 언급했던 선생님이 내가 브라를 차지 않는다는 것을 눈치채고는 나를 따로 불러서 윽박질렀다. 뭐라고 말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말을 해도 내가 안 듣는다면서 ‘인성생활부’에 넘기겠다는 취지였다. 실제로 인성생활부장 선생님과 면담을 하게 되었다. 학교에서 배려할 만큼 배려해 줬는데 내가 기본을 안 지킨다고 따뜻하게 들리는 목소리로 조곤조곤 말씀하시더라. 나중에는 아예 담임 선생님이 다른 학생을 시켜서 내가 브라를 차고 다니는지 감시하게 만들었다. 여자인 네가 브라를 차지 않고 유두를 드러내는 행동은 ‘시각적 성추행’이라는 소리도 몇 번 들었다.
여기서 ‘인성생활부’ 와 ‘시각적 성추행'이라는 말에 주목해 보자. 인성생활부는 잘못을 저지른 학생들을 징계하는 부서다. 성추행은 범죄다. 나는 몸의 특성상 브라를 차고 버틸 수 없는데, 학교는 내가 브라를 차고 다니지 않는다는 이유로 징계 절차를 밟았다. 나 자신을 드러냈다는 이유로 범죄자나 다름없는 취급을 당했다. 유두가 교복 밖으로 드러나면 다른 학생들이 나를 피했다. 교복을 입고 있기 힘들어서 체육복 차림으로 최대한 오래 버티려고 했는데, 교복을 제대로 안 입고 다닌다며 교실에서 큰 소리로 모욕을 주는 선생님들이 있었다. 그때는 내가 장애인인 줄도 몰랐고, 장애의 특성 때문에 차별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은 더더욱 알 길이 없었다. 내가 무슨 일을 당하고 있는지, 왜 당하는지 전혀 모르는 상태로 경멸과 혐오를 받아내야 했다.
초등학교 담임 선생님들 중에서 유일하게 내 장점을 먼저 봐주셨던 6학년 담임 선생님을 찾아가 내가 당한 일을 털어놓았다. 끔찍한 대답이 나왔다.
“지금 네가 얼마나 섹시한지 알아?”
이게 한국 나이로 14살짜리 청소년에게 할 말인가? 중학교 때보다 더 원색적인 장애차별이 난무하던 초등학교에서 거의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었던 사람과의 연결고리가 이때 끊어졌다.
억압에 순응하는 어른으로 커버린 나
그 뒤로도 몇 년간 고생하다가 괴물 취급당하지 않을 방법을 간신히 찾아냈다. 등에 달라붙는 고무줄이 없는 큰 캐미솔을 산 다음 브라 컵을 바느질해서 나만의 속옷을 조립(?)했다. 그 위에 큰 티셔츠를 입고 다녔다. 한동안은 그 방법으로 효과를 봤다. 그런데 <합정과 망원 사이>라는 책을 읽다가 생각이 바뀌었다. 유이영 작가는 브라를 처음 차던 날의 모욕감과 모멸감을 기억한다고 말했다. 브라 때문에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괴로웠던 사람이 나 혼자가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었던 계기였다. 작가도 신경다양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해봤지만 확인해볼 길은 없었다. 그날 오후에 캐미솔을 입지 않고 밖에 나가봤다. 성차별적이고 장애차별적인 압박에 굴복하기 싫어서 처음으로 용기를 냈다.
부정하고 싶은 결과였지만 20살의 나는 유두를 가리지 않으면 불안해서 밖에 나갈 수 없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보복당할 것 같다는 생각을 견딜 수 없어서 다시 방으로 돌아가 내가 만든 캐미솔을 꺼내입었다. 누구한테 어떤 보복을 당할지 구체적으로 상상할 수는 없었지만 어쨌든 당장 유두를 가리지 않으면 끔찍한 일이 일어날 것 같았다. 캐미솔을 다시 입으면서 절망했던 기억이 지금도 선명하다. 브라 컵이 달린 캐미솔은 차별에 굴복하는 고통을 줄이는 수단일 뿐이다. 신체적인 고통은 덜어줄지 몰라도 ‘여자는 예의상 유두를 가려야 한다'는 압박에는 흠집 하나 내지 못한다.
나중에 해외에서 지낼 기회를 잡아서 아무 거리낌 없이 유두를 드러내는 사람들을 여러 명 보고 나서야 유두를 가려야 한다는 압박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우리나라에 계속 있었으면 절대 벗어날 수 없었을 압박이다. 그런데 귀국하자마자 또 유두를 가려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차별을 피하기 위해 숨겨야 했던 건 유두 뿐만이 아니다. 신경전형인이 아니면 사람 취급 받기도 힘든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내 입을 막는 가면을 쓰고 버티는 법을 억지로 배웠다. 나를 함부로 대하는 사람이 있어도 보복이 두려워 항의하려다 망설이고, 면접을 보러 가면 탈락하기 싫어서 신경전형인 흉내를 낼 때도 있다. 미등록 장애인이기 때문에 장애차별을 당해도 법적인 보호를 받을 수 없어 더 몸을 사려야 한다.
장애차별이 두려워서 부당한 요구를 들어주고 싶지 않다. 페미니스트를 겨냥한 공격이 두려워서 내 경험과 생각을 숨기고 싶지 않다. 차별에 익숙해져서 억압을 재생산하는 어른이 되고 싶지 않다. 부당한 일을 참지 못하는 성격 때문에 끊임없이 배척당했고, 앞으로도 배척당할 일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꾸준히 목소리를 낼 힘을 길러갈 것이다. 이번 봄, 여름, 가을에는 브라를 착용하지 않는 것은 물론 대체품도 사용하지 않을 생각이다. 유두가 보인다는 이유로 신변의 위협을 당해도 최소한의 대체품만 사용할 것이고, 위협이 사라지면 바로 대체품 사용을 중단할 것이다. 나를 지우고 억압하는 모든 차별에서 벗어나기 위해 어떻게든 맞설 것이다.
**이 글의 초안은 여성신문 칼럼으로 게재되어 있다.
https://www.women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247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