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의자 A씨는 피해자 B씨와 그녀의 어머니에게 흉기를 휘둘렀다. B씨는 즉사하고 그녀의 어머니는 중태이다.' 이런 내용은 요즘은 걸핏하면 뉴스 기사에 오르는것이다. 무엇에 대한 집착, 무시당하는 것에 대한 분노가 가히 병적이다. 피의자가 A씨이고 피해자가 B씨라는 익명성에서 그들 사건 당사자의 인권은 잘 지켜지는 듯보인다. 그런데 A나 B라는 익명성은 B가 A로 잘못 표현되어도 크게 주목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즉 피해자가 피의자로, 피의자가 피해자로 뒤집어져도 그들이 실명으로 밝혀지지는 않아 A,B로 표현해도 실감이 나지는 않는다. 피의자를 B, 피해자를 A로 설정해도 별 신경없이 무의식적으로 넘어가는 것이다. 이 대문자 A,B가 지시하는 바는 임의성이다. 물론 피해자와 피의자를 지시하는 대문자와 일관성있게 결합시키면 둘을 파악할 수 있게는 한다. 이런 대문자 A, B를 흉내내는 것이 소문자 a, b일 것이다. 우리가 A,B에 닿지 못할 때 소문자 a, b를 통해 마치 대문자에 도달한 것처럼 행세한다. 그런데 보다시피 A, B는 익명성이며 지칭을 바꾸어도 내용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A,B가 연루되어 하나는 가해자, 또 다른 한 명은 피해자라는 것 뿐이다. 알 수 없는 A,B를 두고 A와 B를 뒤집는다고 한들, A,B를 a,b라고 하더라도 무방하다. 그렇다고 현실에서 피의자를 피해자와 바꾸어 생각할 수는 없다. 하지만 요즘에는 그런 바꿔치기가 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피의자는 시대의 피해자처럼 자주 기억을 잃는다. 피해자는 피의자의 후속 보복이 두려워 침묵을 지킨다. 피의자는 자신이 떳떳하다는 듯 비열한 웃음을 짓는다. 이 익명성이 대문자 A를 소문자 a로 표현하는 것도 어렵게 한다. 대신에 B는 B외에 b로도 노출되어 이중의 피해자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