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룻강아지는 범 무서운 줄 모른다. 단 하루를 눈뜨고 있으니 세상이 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말은 옳지 않을 것이다. 비유적으로 라면 몰라도, 그 강아지에게도 본능, 선험이란 게 있어 호랑이를 두려워 한다. 하루살이에게도 이런 일이 가능할까?
생명줄이 하루에 불과한 것만 빼면, 역시 사전에 기입된 본능에 따라 움직인다. 천적의 공격을 받으면 이리저리 날아다니면서 몸을 피한다. 단 하루를 살더라도 그에게는 수십 년, 수백 년의 삶을 사는 것과 같으니, 그의 1초, 1분은 분명 의미가 다르다.
그런데 하루실이는 입이 없어 먹이를 섭취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있다 하더라도 겨우 수분 정도나 확보하는 기능이라고 한다. 그냥 내 버려둬도 이들에게는 기나긴(?) 하루 만이 주어진다.
그런데 이것들이 사람을 성가시게 하거나 조그만 동물들에게 먹이로 잡히면, 그나마 하루를 넘겨보지도 못하고 생을 마감하게 된다. 이런 해괴한 생명은 참 이해하기 힘들다. 단 하루를 사느라 1년을 유충으로
지내거나, 겨우 일주일 정도를 위해 7년 간 땅속에 있는 매미 같은 경우를 보면 참으로 그렇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무활동, 죽은 듯이 엎드려 있던 시기가 정작 생명을 잘 보존하던 때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바깥세상으로 나온 것은 생명현상이라는 웅장함보다는, 오히려 죽음을 맞는 며칠 일지도 모른다. 한낱 벌레나 곤충 같은 삶이라고 비유적으로 비난하는 일은, 실상은 그 생김새나 활동에서의 거부감보다는, 살아가는 긍정성에 대한 마지막의 부정성에 가하는 제스처일지도 모른다. 물론 조그만 새, 사마귀, 거미따위에게는 생명유지라는 긍정적 기능을 제공하면서 말이다. 상위의 포식자로 옮기면서 이런 부정성은 정도가 약화되면서 긍정성이 더 크게 작동한다.
인생을 살면서 죽음은 막연히 두려워하니 말이다.
어느 시대, 민족에게는 각자 달리 받아들여 지겠지만, 우리 언어생활에서는 이런 일이 보다 감상적으로 다가왔나 보다. 우리나라 사람에게 새는 노래하는 존재가 아니라 '새가 운다'라는 것처럼 애잔한 감정이 실려 있다.
'나비는 참새, 부엉이, 독수리, 악어...'
이런 먹이 사슬을 염두에 둔 것일까?
그 용맹한 호랑이도 울부짖으니 말이다.
아마도 애달픈 삶을 살던 우리 민족의 정서가 투영된 원인이리라.
사람 기준으로 사물 이름을 붙일 수밖에 없긴 하지만, 암튼 이런 것을 생각하면 야릇하기는 하다.
그래서 하루살이는 하루살이가 아니라, 차라리 일 년 살이가 맞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