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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은 몇 kg인가요?

by justit

나는 체중계이다. 뭐 대분류 하면 ‘저울'이 나를 끌어안는다. 그런데 저울이라는 고답적 기구는 좀 거칠다. 사람보다는 주로 물건 무게를 재는 데 사용한다. 들판에서 수확한 감자, 재활용 고철 중량 따위를 재는 데 쓰인다. 어디 그뿐이겠는가?
푸줏간에 걸리는 고기며, 더러 사람 체중 측정을 거들기도 한다. 하지만 인간을 저울질하는 일은 어째 모욕으로 여긴다. 그래서 사람에겐 주로 디지털 체중계[몸 체, 무거울 중, 셀 계]를 디민다. 어쨌든, 웬만한 무게는 감당할 수 있어 누군가 내 등위에 올라서는 게 크게 두렵지는 않다. 사실 내가 등 짝의 중량을 셈할 수 없을 정도로 파열을 일으킬 일은 상상해 본 적이 없다. 그 정도 까지라면 참 심각한 수준일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세상 제일 무거운 이는 무려 508kg까지 나간다고 한다.
도대체 이런 사람은 어떻게 감당한단 말인가?
아마도 우리는 180kg까지 측정 한계치가 설정된 듯하다. 그러니 이것은 나의 자연적 수명 외의 일이며, 내가 존속하는 한 한계를 맞을 일은 없길 바랄 뿐이다.
만일 그가 내 등에 올라선다면 나는 영락없이 내장을 망가뜨려 생을 마감할 것이다.
그 외에는 나는 별 감각 없이 두 자리 또는 세 자리 숫자로 잘 표현한다. 나는 이처럼 둔감하지만, 사람들은 어쩐 일인지 내가 드러내는 숫자에 즐거워하거나 마구 한숨을 쉬기도 한다. 좋아서 껴안는 사람들에겐 나도 기쁜 웃음을 보인다. 그러나 머리를 움켜쥐고 나를 부숴버릴 듯이 하는 사람들은 무섭다. 가만 생각해 보면, 내가 소멸하는 방법에는 이것도 더해지는 걸 깜박했다. 어찌하거나 나는 이런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나질 않기를 거듭 바라며 늘 조심스럽게 내 등에 올라타는 각종 발바닥을 맞이하는 것이다.

내가 사는 집에는 주인집 딸이 하나 있다. 이제 사회 초년생이라는 이 친구는 제 몸매 관리에 열중이다. 다이어트라는 걸 하느라 섭취 열량을 줄이고, 음식 종류에는 대단히 민감하다. 그러다 보니 주인아주머니와는 심심찮게 마찰이 일어난다.
살 빼는 것도 좋지만 영양실조로 병에 걸릴 수 있다는 잔소리와, 살찌는 것이라는 신경질이 늘 맞선다. 그러면서 내 등위에서 한숨짓는 그녀를 대할 때면, 나는 차라리 속여서라도 낮은 수치를 보여주고 싶다. 그러나 나는 곧이곧대로 표시하기만 할 뿐, 남을 속일 줄 모르게 태어났다. 그게 내 운명이다. 하지만, 가끔은 너무 정직하게 굴다가 내던져져 비정상적으로 생을 마감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따른다. 더욱이 바깥 다른 동료를 만나서 어떤 정도가 비만이라 하는지 알아본 적이 없는지라, 그녀의 기분을 맞출 수 있는 기준도 없어 막막하다. 내 능력치라고 해봐야 기껏 180kg 내에서 오차를 활용하는 것뿐이니 말이다.
그렇게 눈치 없이 살아온 결과일까?
마침내 나는 판단 오작동 사태를 맞이했다.
주인집 딸내미가 늘상의 기록 언저리일 뿐, 기대치에 못 미치자 나에게 사정없이 화풀이해 댄 것이다. 방바닥이 꺼질듯한 강한 압력은 내 등판을 후려쳤고, 그 후로는 내 눈이 뒤집히고 말았다. 정신을 차려 올바른 결괏값을 표현해야 하는 데, 데이터가 제 마음대로 흐느적인다. 혼미한 정신에 가리킬 측정값이 보이지 않는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내 재량을 발휘해 관대함을 보였어야 하는 건데, 너무 정직하기만 했던 것이다.
‘재량 載量 [물건을 쌓아 실은 분량이나 중량]'을‘재량[裁量 [자기의 생각과 판단에 따라 일을 처리함].' 또는‘재량 才量 [재주와 도량]'으로 여길 수 있었으면 나는 자연적 수명에 도달할 수도 있었으련만!
그런데 사람들은 재량 載量을 요구하면서도 왜 재량[裁量]이나 재량 才量이 작동하기를 바라는 걸까?
늘 정직하게 표현해 주기를 바라면서도, 고지식한 표현에는 분노하는 걸까?
암튼 내 몸은 망가지고 등짝 위로는 재활용품 스티커라는 기호가 달라붙었다. 아마도 내 몸은 이리저리 분리될 것이다. 뜬 눈으로 하룻밤을 보냈다. 몸뚱이가 욱신거린다. 그리곤 어느 날, 나는 마침내 분리 수거장 으로 향한다. 이윽고 센터 직원은 내 인식표를 발견하고는 트럭 짐칸에 옮겨 싣는다. 뒤 칸에는 벌써 여러 유적 존재들이 함께 쌓인다. 그리고도 이 아파트, 저 주거단지를 돌아다니다 보니, 시선 잃은 내 몸 위로 다른 친구들이 마구 얹힌다. 여태 감당해 보지 못한 중압감이 내 몸뚱이를 짓누르지만, 나는 이미 표현력을 잃어 얼마나 무거운지를 모르겠다. 혹은 내가 정상이더 라도, 이런 압력에서는 표현 불능이다. 그래서 내 눈에서는 정상적 수치가 아닌 'Error'라는 글자가 하소연했을 것이다. 견디기 힘든 상황에서는 이 외마디가 유일하다. 그런 순간에도, ‘무거워 죽겠다'라는 직설적 표현을 하지 못하고 단지 매우 점잖고 모호한 말로 '오류'라는 표현밖에 하질 못하는 것이다. 죽기를 각오하고 정직한 체중을 표시하다가 정작 한계에 이르러서야 겨우 추상 표현만 허용되는 것이다. 암튼 재활용센터라는 곳에서는 내 망가진 몸을 어떻게 처리할까?
이미 여러 곳에서 모인 제품들은 재분류되어 쌓인다. 다시금 내 몸을 짓누르는 무게 아래에서 나는 처분의 시간을 기다린다. 지나고 보니 참 우스꽝스럽긴 하다. 이 무게조차 힘듦에도 모든 중량을 감당할 듯이 자신 있게 세상에 나섰으니 말이다.
그런데 다소 억울하기는 하다. 마치 어떤 중력이라도 버텨내란 듯 나를 만들었지만 모순되게도 한계치를 두었으니 말이다. 내 경우에는 미처 그것에 이르기 전에 절멸했지만, 실제 한계는 물리적인 것보다는 인간 마음에 있던 것이다. 정작 사람 마음의 무게를 잴 수 있는 심중계였으면 어땠을까?
그런데 그건 매우 힘들다. 표정을 보고, 말소리를 듣고, 발자국을 짐작하고서 마음의 무게를 재는 일이 어찌 가능한 일일까?
더욱이, 사람들에겐 정동이란 게 있어 분위기, 그들을 둘러싼 공기의 미묘한 흐름에도 무게는 요동친다. 날씨가 좋아도 마음이 무거운 사람이 있으니 볕 좋은 날에는 사람들 마음이 가벼울 것이란 건 속단인 것처럼. 그래서 몸뚱이의 객관적 무게에 대해 주관적 중량은 정말 꿰뚫기 힘들다.
주인 딸내미의 주 객관적 무게가 같은 방향이었던 경우는 지극히 예외적인 상황이다.
이 알다가도 모를 인간의 무게라는 건 불일치가 정상이다. 사람들은 우리같이 고정된 값 대신에 몹시도 변덕스럽게 요동치는 존재이다.
허용 오차 내에서 그것을 붙잡아 둘 과단함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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