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TV 프로그램에서는, 법륜스님의 즉문즉설이 방영되고 있었다. 대부분 방청객들의 질문을 근원에서부터 전복시켜, 호통치듯이 잠든 의식을 깨치게 하는 것이었다. 예를 들면, "스님, 저는 이러저러한 고민이 있는 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라고 질문하면, "그냥 버리세요. 그걸 붙잡으려니 집착이 생기는 겁니다. 갈등의 원천은 거기에 있는 데, 고민을 없애려고 하면서 놓아주지 않는다면, 그것은 내내 붙어있는 겁니다. 고민의 원천을 붙잡고 있으면서 그것을 떼내려 한다면 아무 소용이 없어요!" 이런 식이다. 어째 보면, "이걸 어떻게 해야 하죠?" 하는 물음에 마치, "잘해야지!" 하는 것 같은 허탈함이다. 어쩌면 그게 맞는지도 모른다. 무엇인가를 붙잡기 위해서는 힘이 잔뜩 들어가고, 그것은 사람의 정신을 더 피폐하게 만든다. 이럴 때는 동일한 물리력을 가해서는 충돌이 일어나고, 그것은 서로를 부러뜨리게 하는 일을 초래한다. 이럴 때는 오히려 상대편에서 힘을 놓게 하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일 것이다. 어쨌든 스님은 그러한 줄기에서 자신이 출가하게 된 계기를 덧붙인다.
"얘, 너 이리 와봐!"
"왜요? 스님."
"넌 어딜 간다고 그리 바삐 서둘러?"
"학원이요"
"거긴 가서 뭣하게?"
"대학 가게요"
그리고는 대학을 거쳐 취업, 그 후 결혼... 죽음....?
"넌 지금 여기 오기 전에는 어디서 왔어?"
"학교에서요"
그런 다음 집, 어머니 뱃속......?
"야 이놈아!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갈지도 모르는 놈이 뭘 그리 급하다고 헐떡거려!"
이 앞뒤가 정체불명인 인간은 사이에 끼어 있다.
아니, 근원도 모르고 지향점도 알지 못하고 있으니 차라리 공중에 떠 있다. 딛고 있는 것이 땅인 줄 알았더니 바로 허공이다. 존재하는 한, 존재가 무엇인지를 알 수 없는 게 존재 형식이다. 수많은 철학자, 종교가가 밤 잠을 설치며 식음을 전폐하고 궁리해도 끝내 알 길이 없다. 방향을 틀어 유물론적으로 유전자를 파헤쳐도 모르는 것은 여전히 모르는 것이다.
인간은 기껏해야 몸뚱이의 70%가 물로 이뤄진 물렁물렁한 존재이다. 어디서 와서 어느 곳으로 가는지 알 수 없으며, 미지에서 와서 모르는 곳으로 간다는 것만 알뿐이다. 이 알 수 없는 존재를 좇아, 싯다르타는 그가 살던 성에서 나와 고행을 한다. 헤르만 헤세 작품의 '싯다르타'에서는 그가 온갖 세속의 타락을 거쳐 마침내 그의 친구 고오빈다를 만나는 장면이 나온다. 물에서 깨달음을 얻는 것으로 소설은 마무리되지만, 그럴 만도 하다. 우리에게 흔하게 알려진,
'하고자 하는 것이 잘 풀리지 않으면 물 흐르듯 하는 것에 맡겨라'라고 한다. 과연 물이 근원 수에서 출발해 계곡을 지나고 강에서 합쳐져 바다를 만난다. 이것은 다시 어떤 형태가 되어 인간 몸으로 흡수되고...
결국 출발점에서 출발점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어디서 유래했고,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르는 주제에 이렇게 단정 짓는 것은 우스꽝 스럽지만, 황당한 질문에 황당한 설명이라면 일종의 그것이다. 하필 우리 몸이 70%의 수분을 머금고 있다고 하니, 고오빈다가 물에서 어떤 깨달음을 얻었다는 것을 한 번 생각해 보면, 그렇다는 것이다. 물 같은 녀석이라고 함부로 부를 일은 아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