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오기

3. 언어

by 민달팽이

https://www.youtube.com/watch?v=19kAM_2_qOU&list=RD19kAM_2_qOU&start_radio=1

들으면서 읽어보세요! 제 인생 곡

지금은 영어와 한국어를 둘 다 유창하게 하는 편이지만

러시아에 처음 갔을 때에는 당혹 그 자체였다.


한국에서는 글쓰기를 잘해 상을 종종 타던 나는

러시아 국제학교에 들어가자마자 “영어 도움반”으로 밀려났다.


열심히 적은 써 내려간 글을 본 선생님은 물었다.

“이거, 번역기를 돌린 거니?”

아무리 최선을 다해 글을 써도,

한국어의 어감으로 쓴 글은 번역기로 돌린 것 같이 어색했던 것이다.

그 순간, 나는 한순간에 글을 잘 쓰던 아이에서 서툰 아이로 변했다.


그렇게 태어나서 처음으로 무능한 아이로 학교 생활을 하던 중,

한 러시아 남자아이가 체육시간에 나에게 뭐라 하는 것을 들었다.

나는 알아듣지 못하는 러시아어였지만,

곁에 있던 친구가 번역해 주었다.


“너더러 멍청한 한국인이라 했어”


그런 말을 그냥 듣고 있을 내가 아니었다.

그 남자아이에게 서투른 영어로 말했다.

“내가 너보다는 수학은 훨씬 잘해.

못 알아듣는다고 함부로 이야기하지 마”


그 말을 하는 순간에 부끄럼이 없었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내가 쥔 유일한 방패는 한국에서 배운 수학 한 줌뿐이라는 것이,

그리고 지금 하는 말이 볼품없어 보일만큼 서툴러 보인다는 것이,

너무나 부끄러워 얼굴이 달아올랐다.


무능하고, 멍청한 아이.

그래, 학교에 적응 중이라는 변명으로 웬만큼 이해가 가능한 말이었다.

하지만 스스로에게 부끄러운 사람은 되고 싶지 않았다.


당시에 1년 사이에 읽었던 책들

그날 이후, 오기는 내 작은 불씨가 되었다.

매일 수업 중에 모르는 단어들이 있으면 수첩에 적어와

집에서 뜻을 찾아 외우고,

느리더라도 하루도 거르지 않고 영어책을 읽었다.


그 과정이 조금은 덜 힘들어지게 될 때 즈음에 노력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영어 도움반을 벗어나게 되었고,

성적은 점점 올랐으며,

나를 무시하는 사람은 점점 없어졌다.

조금은 슬프지만 “아는 게 힘이다”라는 말은 맞는 말이라는 걸 뼈저리게 느꼈다.


언어를 통해 나는 다른 사람들의 문화를 배웠고,

그들을 웃게 만드는 것에 함께 웃을 수 있었다.

새로운 느낌이었다.


언어는 나보다 먼저 도착했지만,

그 언어가 내 앞에 새로운 문을 열어젖혔다.


그 문을 통해 지금은 영국에서 어려움 없이 살아가고 있다.

그들과 비슷한 말투를 가지게 되었고,

그들과 함께 웃으며,

그들의 정이 어린 말에 위로받을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아직도 종종 무례한 사람을 만난다.

얼마 전 한 백인 남자는 내게 말했다.

“내가 아르바이트하는 레스토랑에 일본에서 온 여자애가 있어.

내가 영어를 종종 가르쳐 주는데 참 뿌듯하지.

너도 분명 내 도움이 필요할 거야.”


기만으로 가득한 말이었지만,

나는 벽에 기대 그 말을 들으며 깨달았다.

나는 그 사이 강해져 있었다.


여덟 해 전 체육시간,

스스로에 대한 부끄러움에 몸을 떨던 내가 아니었다.

이제 나는 홀로 영국에서 영어로 의학을 배우고 있었다.


내가 청하지도 않은 도움을 내세우며

스스로를 높이던 그의 말에,

나는 피식 웃어줄 수 있었다.


언어는 이제 나를 부끄럽게 하지 않았다.

오기 끝에 얻은 지식의 힘은

드디어 나를 지켜주고 있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날마다,

나는 그때의 오기를 떠올린다.

포기하지 않는 한, 언젠가 닿을 것이다.

그리고 그 끝에는 더 넓고 다채롭게 빛나는 세상이 기다리고 있음을 믿으며,

또 한 번 오기를 부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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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금 연재